초선 의원 노무현, 명패 투척하다
  • 차형석 기자 (cha@sisapress.com)
  • 승인 2004.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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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움직이는 10인 ‘15년 전의 초상’/이건희 회장 ‘평생 직장’ 주창
2004년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뽑힌 10인은 <시사저널>이 창간된 1989년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15년 전 노무현 대통령은 초선의원이었다. 1988년 4월 13대 선거에서 허삼수씨를 꺾고 부산 동구에서 당선된 노의원은 초선이었지만 ‘청문회 스타’로 두각을 나타내 인지도가 상당히 높았다. 이해찬 총리도 노무현·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이름을 날리던 시기다.

1989년 정치권의 화두는 과거 청산이었다. 5공특위와 광주특위는 전국민의 관심사였다. 그 해 봄과 겨울, 노무현 의원은 두 번의 사건으로 그 존재를 세상에 각인했다.

1989년 1월, 5공특위와 광주특위는 집권 여당인 민정당이 불참해 파국을 맞고 있었다. 5공화국의 피해자와 기운 빠진 야당 의원들만 있는 반쪽짜리 청문회장에서 당시 노무현 의원은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열흘 뒤 사퇴를 번복했지만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돈 키호테·소영웅주의라는 비판과 하루빨리 복귀하라는 성원이 동시에 일었다.

이른바 ‘명패 투척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명패 투척 사건은 백담사에 머무르던 전두환씨가 국회에서 증언하던 그 해 마지막 날에 일어났다. 당시 노의원은 전씨가 떠난 빈 증언대에 자신의 의원 명패를 집어던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사건 이후 명패를 전두환씨에게 던진 것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해명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저서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전두환씨에게 명패를 던진 것이 아니라, 과격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평민당이 판을 깰 것이니 우리 당은 절대 항의하지 말라고 지시한 당시 통일민주당 지도부에 대해 화가 치밀어 명패를 내동댕이친 것이다’라고 적었다.

명패 사건이 있은 다음 해 1월. 민정당·민주당·공화당이 합당을 선언해 하루아침에 여소야대가 여대야소로 바뀌었다. 노무현·김정길 의원은 소신에 따라 3당 합당을 거부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당시 정치권과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있었다. 1989년 10월26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지 10주년이 되는 날. 당시 38세이던 박근혜씨는 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 대표를 맡았는데, 근화봉사단을 조직해 박대통령 10주기 추도식을 열었다. 사후 10년 만에 치르는 첫 추도식이었기 때문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2만여 명이 참여한 박대통령 10주기 추도 행사에 김종필 당시 공화당 총재가 참석하지 않아 불화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아직 정계에 진출하지는 않았으나 이 무렵부터 ‘박근혜 정계 진출설’이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육여사 15주기 추도식(8월15일)과 박대통령 10주기 추모식 등 대규모 행사를 잇달아 열었기 때문이다.

정치권과 거리가 멀었던 것은 정동영 통일부장관과 천정배 열린우리당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정동영 장관은 당시 문화방송 LA 특파원이었다. 정동영 기자는 ‘0시 뉴스’ 앵커를 마치고 1989년 5월 특파원 발령을 받았다. 13대 총선을 앞두고 여당 의원의 ‘돈봉투 사건’을 보도해 회사 고위층과 마찰을 빚은 정동영 기자는 인사가 부당하다고 여겨 완강히 거부했다. 내키지 않은 인사였지만 정동영 특파원에게는 ‘사건 복’이 터졌다. 평소에 별다른 사건이 없던 지역에 폭동과 지진이 일어났고, 페르시아 만 전쟁이 발발해 현장에 급파되었다. 1990년대 중반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김일성 사망 보도 등 주요 사건을 취재했던 그는 18년 방송 생활을 마친 현재도 기자보다 앵커로 기억되는 것을 섭섭해 한다.
정동영은 기자, 천정배는 인권 변호사

천정배 열린우리당 대표는 인권 변호사로 어느 해보다 바쁜 해를 보내고 있었다. 1989년은 임수경 방북 이후 공안정국 한파가 몰아치던 때였다. 문익환·임수경·문규현·서경원·리영희 등의 방북 관련 사건, 안산 지역 노동자 구속 사건 등 각종 공안 사건에 변호인으로 참가했다. 대형 로펌인 김&장에서 4년 동안 외환·무역·조세와 관련한 국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인권 변호사로 방향을 바꾼 것은 고 조영래 변호사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조영래 변호사·노동운동가 박석운씨와 함께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를 만들고, 1988년 5월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을 창립했다.

당시 재계는 지금과는 상이한 모습이었다. 당시 매출액 기준으로 본 기업 순위는 삼성물산(6조8천억원) 현대종합상사(5조6천억원) 대우(4조7천억원) 삼성생명(4조1천억원) 한국전력(4조원) 포항제철(3조7천억원) 순이었다. 7위가 현대자동차(3조4천억원)이고, 8위가 삼성전자(3조원), 9위가 금성사(2조8천억원)였다. 삼성전자가 반도체보다는 백색가전에 중점을 두던 시기였다. 그 무렵 대학생 여론조사를 보면 대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은 업종을 ‘종합상사’라고 꼽았으니, 명실상부한 종합상사 전성시대였다. 당시 대학생 가운데 60%가 초임으로 ‘월 45만원 이상’ 받기를 원했다.

1989년 11월 삼성은 이건희 회장 체제 2년을 맞이했다. 당시 언론은 이회장 체제 출범 이후 삼성그룹 내에서 가장 급속도로 떠오른 측근으로 홍석현 삼성코닝 전무(현재 중앙일보 회장)를 손꼽았다. 당시 이회장이 내세운 경영 철학은 ‘평생 직장’, ‘인간 존중의 경영’이었다. 요즘 삼성이 내세우는 ‘천재 경영’과는 사뭇 다르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아직 2세 체제가 갖추어지지 않아 내부적으로 불안한 상태였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활발하게 활동했고, 정세영 회장이 현대그룹 회장을 맡고 있었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정공 회장으로 현대자동차서비스·현대정공·현대강관·현대산업개발·인천제철 등 이른바 ‘MK 그룹’을 이끌고 있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동생 정세영 회장이 20여 년간 현대자동차의 경영을 맡아오고 있던 상황에서 자동차사업의 경영권을 놓고 정세영 회장과 정몽구 회장 사이에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명박 서울시장도 이때는 ‘현대맨’이었다. 1988년 3월 46세 때 현대건설 회장에 오름으로써 샐러리맨의 우상이 되었다. 회장이 되고 나서는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함께 여러 차례 소련을 방문해 경제 협력을 추진했다. 현재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이헌재 경제 부총리는 당시 한국신용평가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15년 동안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위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1989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해 대미사를 열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종교계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 세력으로부터 정신적 지주로 인정받던 시기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 15년 전 ‘파워맨’들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일은 낯설기까지 하다. 그때의 초심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15년 간의 변화를 지켜본 동시대인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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