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외교, 어깨에 힘 뺄까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4.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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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주의 완화” “강경책 지속” 전망 갈려…국제 사회는 ‘실용 노선’ 주문
앞으로 4년, 부시는 세계를 어떻게 요리할까. 민주당 후보 존 케리의 깨끗한 승복으로 조지 부시 대통령의 재선이 확정되면서 세계의 관심은, 미국의 다음번 행보에 쏠리고 있다. 더욱이 이번에 재선에 성공한 부시 대통령은, 2000년 첫 도전에서 불과 50만 표라는 아슬아슬한 표차로 백악관에 입성해 집권 초반 심각한 정통성 위기를 드러냈던 어제의 그, 허약한 부시가 아니다.

부시 대통령은 한층 더 강해진 터미네이터가 되어 돌아왔다. 비록 지지율 면에서는 경쟁 상대였던 존 케리 민주당 후보에게 약 2% 앞서는 우세를 보였지만, 지역적으로는 미국 서부와 동북부의 몇 개 주를 뺀 대부분의 주에서 케리 후보를 눌렀다. 대선과 함께 실시된 의회 선거에서도 부시 대통령이 이끄는 공화당은 완승을 거두었다.

부시 대통령은 또 선거 기간 민주당 진영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받았던 ‘이라크 전쟁 실수’에 대해서도 사실상의 면죄부를 받았다. 부시 대통령의 향후 대외 정책을 예측할 때 최우선 고려 사항은 바로 여기에 숨어 있다. ‘테러와의 전쟁’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번 대선 결과 드러난 미국인들의 ‘민의’을 통해서나, 부시 대통령 자신의 발언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된다. 부시 대통령은 재선이 확정된 직후 행한 한 연설에서 ‘미국은 미국의 적에 의해 결코 겁먹거나 영향받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미국 정부가 말하는 ‘미국의 적’에는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1기 부시 정부에서 국무부 정책실장을 맡았던 리처드 하스 미국 외교협회(CFR) 회장은,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기고를 통해 ‘미국은 현재 최소 3개의 분쟁에 연루되어 있다’며, 그 항목을 열거했다. 첫째는 알 카에다 등 테러 집단과의 전쟁이요, 둘째는 이라크 분쟁, 셋째는 아프가니스탄 분쟁이다.

다음으로 그는 부시가 요리해야 할 메뉴로 이란과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지목했다. 하스 회장은 ‘두 나라 모두 핵 무장을 했을 경우, 이웃 나라들이 저마다 사례를 따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곧 ‘세계의 안정’을 크게 뒤흔드는 사태로 이어질 것이므로, ‘세계의 보안관’ 부시로서는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될 막중한 과제라는 것이다.

지난 10월21일 미국 기업연구소와 브루킹스 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한 토론회에서 패널리스트로 참석한 월 스트리트 저널의 칼라 로빈슨 외교 전문 기자는 한술 더 떴다. 이란·북한을 포함한 이른바 악의 축 문제는 ‘하루 24시간, 1주일의 7일간’ 2기 부시 대통령의 외교·안보팀 책상을 떠나지 않을 현안 중의 현안이라는 것이다.
2기 부시 정부의 ‘외교 조리대’에는 테러와의 전쟁, 대량살상무기 확산 외에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으로 대표되는 중동 평화, 대서양 동맹과의 관계 복원 문제 등이 올라와 있다. 특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최근 막강한 권한을 갖고 팔레스타인을 이끌어오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의 생명이 위독해지면서, 가장 먼저 손을 대야 할 메뉴가 될 공산이 높아지고 있다.

문제는 ‘메뉴’가 아니라 ‘요리법’과 관련되어 있다. 1기 행정부에서 부시 대통령은 똑같은 재료라도 이를 뜨거운 불에 올려놓고 기름에 튀기거나 삶아내는 ‘화식법’을 즐겨 썼다. 뜨뜻미지근한 외교술을 동원하기보다는 강력한 무력 행사에 의존하는 ‘힘의 정치’를 선호했다. 이른바 ‘무력 사용’에 관계된 부분이다.

1기 행정부에서는 또 대체로 요리법도 일방적으로 정했고, 요리된 음식에 다른 손님이 손대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주어진 재료로 어떤 음식을 만들 것인지도 혼자서 결정했다. 이른바 ‘일방주의’라고 지적받는 부분이다.

선제 공격으로 대표되는 무력 사용 성향과, ‘미국은 미국의 판단과 결정에 의해서만 행동한다’는 일방주의는 2001년 10월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2003년 3월의 이라크 전쟁을 통해 극대화했다.

일단은 ‘현실적 보수주의’ 택할 조짐

2기 부시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세계가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이같은 일방주의와 힘에 의한 정치라는 종래의 요리법이 여전히 계속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 견해가 엇갈린다.

우선 일방주의가 계속될 것이라는 관점.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는 미국 대선 직후인 지난 11월4일, 미국 대선 평가회를 가졌다. 이 연구소 미국유럽센터의 필립 고든 선임연구원은 이 자리에서, ‘부시 행정부는 자신들이 바른 궤도를 밟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확실하게 믿고 있고 있다’면서, 일방주의는 2기 부시 행정부에서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미국의 일방주의에 가장 강력하게 제동을 걸었던 유럽 주요국들을 향해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게 부시의 재선은 달갑게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유럽 국가들은 결국 부시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의 동북아위원회 문정인 위원장 등은 다른 견해를 내놓는다. 아무리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라 할지라도 일방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며, 이런 한계를 무시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도 결코 이롭지 않다는 점 또한 분명해지고 있으므로, 2기 행정부가 출범하면 ‘모종의 변화’가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관측인 것이다.

사실 1기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는 심지어 세계적 차원의 미국 패권 유지를 옹호하는 이론가들로부터도 비판받아 왔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잘못된 힘의 행사가 미국을 점점 고립시켜, 종국에는 패권 방어는 물론 바람직한 힘의 행사도 가로막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공화당 상원의원 척 헤겔도 지난 여름 <포린 어페어즈>에 발표한 글에서 ‘미국의 장기적인 안보 이해는 동맹과 연합·국제 기구와 연관되어 있다’고 강조하며, 일방주의 완화를 주문한 바 있다.

2기 부시는 과연 세계 경영 요리법을 바꿀 것인가. 곧 단행될 2기 행정부 개각에서 누가 외교 안보 라인에 나서느냐에 따라 미국 대외정책의 큰 방향을 점칠 수 있을 것이다(38, 40쪽 딸린 기사 참조). 하지만 일단 2기 부시가 ‘완화된 일방주의’ 또는 ‘현실적 보수주의’로 요리법을 바꿀 조짐은 보인다. 우선 부시 대통령은 국내적으로도 2000년에 이어 이번 대선 과정을 통해 더욱 악화한 국론 분열 현상을 치유할 과제를 떠안고 있다. 국민 대통합 차원에서 자신에 대한 비판 여론을 ‘통 크게’ 수용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미국 언론 일각에서 차기 국무장관감으로 댄 포스 현 유엔 대사는 물론 민주당계의 리처드 루가 전 상원의원까지 물망에 오르는 것도 이같은 기류와 관련이 있다.

둘째, 국제 사회에서 이번에는 실용 노선에 대한 주문이 쏟아지고 있다. 부시 대통령의 재선 확정 직후인 11월4일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2기 부시의 3대 외교 과제로 ‘이라크·이란·북한’을 지적하며, 이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에 휘둘리지 말고, 실용 노선에 입각해 더 많은 친구를 만들라’고 권유했다.

미국이 지난 4년도 모자라 앞으로 4년을 또다시 일방주의로 치닫는다면, 미국의 적들은 손뼉을 치고, 친구들은 등을 돌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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