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밖으로 떠밀려 삶에 굶주린 아이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4.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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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소득 2만 달러 시대가 멀지 않았다고 외치지만 굶기를 밥먹듯 하는 아이들이 수십만명에 달한다.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굶주림뿐이 아니다. 정신적·교육적 빈곤도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다.
“간장도 모자라 바닥 나는 학교는 처음 봤어요.” 서울 강북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 문영희씨(가명)는 이렇게 말했다.

빈곤층 밀집 거주지로 유명한 이 지역 초등학교에 문씨가 발령을 받아 온 것은 3년 전. 중산층이 주로 모여 살던 아파트 단지 내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이 학교로 오게 된 문씨는 처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이전에 근무하던 중산층 학교에서는 급식 시간에 밥 안 먹겠다고 투정하는 아이들 ‘꼬드기는’ 일이 교사의 주 임무였다고 문씨는 말한다. 그런데 이 학교에 오고 나니 그럴 일이 전혀 없었다. 아니, 급식 독려는커녕 서로 밥을 더 많이 먹겠다고 다투는 아이들을 뜯어말리는 것이 큰일이었다.

급식 더 먹겠다고 아우성

12월 중순, 기자가 이 학교 5학년 교실에 찾아간 날도 아이들은 급식대를 앞에 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날의 급식 당번은 모두 5명. 이들은 각각 밥·순두부국·오징어무침·햄·감자조림·김치를 담은 배식통 앞에 나란히 서서 이를 같은 반 친구들에게 차례로 나누어 주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밥 당번을 맡은 한 여자아이의 행동이었다. 이 아이는 배식대 앞에 서자마자 밥 주걱을 들고 네모난 식판에 담겨 있는 밥을 학급 학생 수대로 정확히 35등분했다. 왜 밥을 나누느냐고 묻자 아이는 말했다. “이렇게 안하면 싸움 나요.” 그냥 눈대중으로 밥을 떠주면 누구는 밥이 많고 누구는 밥이 적다고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급식 당번이 모두 여자 어린이라는 사실도 눈길을 끌었다. “남자아이들한테 맡기면 서로 제 몫을 더 챙기려고 해 급식 시간이 엉망이 된다”라고 학급 담임은 말했다. 실제로 이렇게 공평하게 밥을 배분했는데도 식판을 받아든 철호(가명)는 입을 비죽거렸다. “여자애들은요, 남자들한테 밥을 조금밖에 안줘요.”

교사들의 말마따나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먹는 데 ‘목숨을 거는’ 이유는 간단했다. 학교에서 먹는 점심 한 끼로 하루를 때우는 아이가 수두룩하기 때문이었다. “아침 먹고 오는 아이보다 못 먹고 오는 아이가 훨씬 많다. 부모들이 일하러 아침 일찍 집을 나가는 경우도 있고, 밤 늦게까지 일하다 돌아와 늦잠을 자느라 아침을 못 챙겨주는 경우도 허다하다”라고 이 학교를 담당하는 사회복지사 황경옥씨는 말했다.

방과 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황씨는 말했다. 맞벌이 부모가 대부분인 집에서 저녁을 혼자 챙겨 먹어야 하는 아이가 많고, 그러다 보니 귀찮다고 저녁을 아예 굶어버리거나 군것질로 끼니를 때우는 아이들이 상당수라는 것이었다.

과연 그런지 기자는 5학년 아이들에게 질문해 보았다. “오늘 아침 못 먹고 온 사람?” 35명 중 13명이 손을 든다. “아침에 늦잠을 자서 못 먹고 왔어요” “밥맛이 없어서 안먹었어요”라고 아이들은 쉴새없이 재잘거린다. 그래도 사회복지사가 말한 것보다 적은 규모여서 안도하려는데, 담임 교사가 기자에게 귓속말을 건넨다. “쟤들 거짓말하는 거예요. 고학년 올라갈수록 아이들이 자존심 때문에 밥 굶고 다닌다는 얘기를 잘 안하거든요.”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붙들고 물어보지 않는 이상 교사 말이 맞는지 어떤지 확인할 길은 없다. 어쨌거나 아이들은 “감사히 먹겠습니다~”하고 식사를 시작한 순간부터 무섭게 빠른 속도로 음식을 먹어치웠다. 수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리는 속에서 아이들은 5분 안에 밥이며 국을 깨끗하게 비웠다. 간장조차 모자란다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이는 이 학교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최근 성서신학대 최선희 교수가 저소득층 지역 학생 7천5백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하루 두 끼 이하 식사를 하는 빈곤 어린이는 10명 중 3.5명(35%)꼴로 일반 어린이(18%)에 비해 두 배 가량 많았다(<서울 저소득층 밀집지역 조사 결과>). 학교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번 취재에 응하면서 이 학교 박 아무개 교감은 눈시울을 붉혔다. “저는 많은 것 바라지 않습니다. 이 불쌍한 아이들, 배불리 먹일 수 있기라도 하면 좋겠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5천 달러를 넘어 2만 달러를 향해 달려가는 이 시대에도 이렇게 굶주리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실감하지 못한다. 최근 대구에 사는 한 영세민 부부의 네 살배기 아들이 굶어 죽은 사건에 온 나라가 충격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25쪽 상자 기사 참조).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다. 2004년 말 현재, 학교 급식비를 지원받는 어린이·청소년은 모두 30만5천 명. 이 중 대다수는 가구 소득이 최저생계비(4인 가족 기준 월 1백5만5천원)를 밑도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자의 자녀들이다. 우리 사회의 최극빈층이라 할 수 있는 이들에게는 생계·의료·주거·교육 등 기초적인 사회 보장이 제공된다.

문제는 이들보다 상황이 약간 낫다는 ‘준빈곤층’이다. 이른바 ‘차상위 계층’이라고도 불리는 이들 준빈곤층은 가구 소득이 최저생계비를 겨우 넘어서기는 하되, 일자리가 불안정해 언제라도 최극빈층으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산다.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가장 동요가 심한 것도 이들 준빈곤층이다.

준빈곤층은 생활 수준이 급격히 하락했을 경우 극빈층과 달리 사회 보장 혜택을 제한적으로밖에 받지 못하기 때문에 더 많은 사회 문제를 야기한다(이번에 굶어 죽은 네 살배기 아이의 부모도 이같은 준빈곤층이었다). 현재 이같은 준빈곤층 규모는 대략 3백20만명으로 추산된다. 기초생활수급 대상자(1백35만여명)의 약 2.5배에 달하는 규모이다.

학교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이 이들 준빈곤층 자녀들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준빈곤층까지 합치면 빈곤 어린이 규모가 1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기자가 찾아간 학교의 경우 전교생 1천8백여명 중 교육청으로부터 급식 지원을 받는 어린이는 1백50명이었다. 이 중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는 87명. 이들을 제외하면 준빈곤층에서 무료 급식을 지원받는 어린이는 70여 명에 불과했다. 이는 학교 전체 결식 어린이 규모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라고 박교감은 말했다.

이 학교에서는 석 달 이상 급식비가 밀린 장기 체납자도 2백명에 달했다. “생활이 어려워져서인지 한 달 3만5천원 수준인 급식비를 제때 내지 못하는 부모가 최근 몇년 사이 크게 늘?있다”라고 학교측은 밝혔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외부 민간기관으로부터 급식비를 지원받아 놓고도 이를 떼어먹는 부모가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학교 김 아무개 교사는 “아이 통장에 들어온 급식 지원비로 밀린 세금을 내거나 술을 사 마시는 사람들이 있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초등학교 무료 급식이 하루빨리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빈곤 지역으로 파악된 곳부터라도 단계적으로 전교생 무료 급식을 시행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물질적 굶주림뿐만이 아니다. 이 아이들은 정신적·교육적으로도 준빈곤 상태이다. 교사 문영희씨는 이 학교에 와서 가장 놀란 일이 상위 그룹이 없다는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공부를 잘하는 학교건 못하는 학교건 웬만한 학교에는 이른바 ‘상위 10%’라고 불리는 우등생 그룹이 있게 마련이다. 물론 반대편에는 하위 10%도 있다.
강남은 해외 연수 ‘봇물’, 강북은 전학 ‘홍수’

그러나 이는 과거의 상식일 뿐이라고 문씨는 말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빈곤 지역 학교에는 상위 그룹이 사라지고 중하위 그룹만 남는 기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아이들의 이해력이 떨어지고 산만하다. 5학년인데도 받침 있는 글자를 제대로 못쓰는 애들이 수두룩하다”라고 문씨는 말했다. <서울 저소득층 밀집지역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는 저소득층 지역 일반에 보편화한 현상이기도 하다. 일반 어린이 중 공부를 못하는 어린이 비율이 30%인 데 비해 빈곤 어린이 중 공부를 못하는 어린이 비율은 무려 67%에 달한다고 이 조사는 전하고 있다.

학부모의 학력이 전반적으로 낮은 것 또한 이들 지역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다. 기자가 찾아간 5학년 ○반의 경우 엄마 아빠가 둘 다 대졸 이상 학력을 가진 아이는 단 1명도 없었다. 담임 교사는 아빠가 대졸인 아이가 딱 2명 있다고 알려 주었다. 1명은 전문대, 다른 1명은 지방 대학 출신이었다. 그나마 옆 반은 대졸 아빠가 아예 한 사람도 없었다.

담임 교사는 “10여 년 전까지는 아무리 못사는 동네 학교라 해도 괜찮게 사는 집 아이가 몇몇은 끼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게 전혀 없다”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진학 때부터 철저하게 서로 다른 학교를 선택하면서 잘사는 아이들과 가난한 아이들이 처음부터 아예 섞일 일이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들은 완전히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다. 박교감은 최근 강남의 한 초등학교 교감으로 있는 동기를 만났다가 이를 실감했다고 말했다. 방학을 앞두고 해외 연수 신청자가 너무 많아 골치가 아프다는 상대방 앞에서 박교감은 할말을 잃었다. 그의 학교에서 해외 연수 신청자는 물론 단 한 명도 없었다.

동기가 해외 연수 신청서 처리하느라 바쁠 그 시각에 박교감은 전학 서류 치다꺼리하느라 바빴다. 그가 다루는 전학 서류는 약간 특이하다. 어린이가 전학할 학교 이름이 쓰여 있지 않고 관할 교육청만 쓰여 있는 것이다. “폭력 남편이나 빚쟁이를 피해 아무도 모르게 아이 학교를 옮기고 싶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이런 배려를 하고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렇게 교육청을 상대로 전학 신청을 내면 해당 교육청이 알아서 학교를 배치해 준다. 올해 그가 이렇게 처리한 서류는 모두 17통이다.

기자가 찾아간 날도 작은 촌극이 있었다. 사진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한 아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던 것. 아이는 거의 울 듯한 얼굴로 이렇게 애원했다. “매스컴에 내 얼굴 나가면 안돼요. 엄마랑 아무도 모르게 도망쳐 왔는데 아빠가 (우리 있는 곳을) 알게 되면 끝장이에요.”

이혼·별거·가출 등으로 인한 가족 해체는 이들의 교육 환경을 더 황폐하게 만드는 주범이기도 하다. 사회복지사 황경옥씨는 “급식 지원을 받는 아이 1백50명 중 3분의 1 가량이 한 부모 가정인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말했다. 한 부모 가정이 빈곤에 취약하다는 것을 그간의 연구 결과들은 보여주고 있다. 2003년 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한부모 가정의 빈곤율은 27.7%로 일반 가정의 3배에 육박한다.
스웨덴 100분의 1에도 못미치는 아동 복지

이런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특히나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 아이들 중에는 ‘신문에나 나올 법한 사연’들을 안고 사는 아이들이 많다. 툭하면 ‘놀다 다쳤다’며 학교 보건실에 파스를 얻으러 갔다가 상습적인 가정 폭력의 희생자임이 드러나게 된 지윤이, 의붓아버지에게 정신적인 학대를 당하다 못해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을 갑자기 구타하는 등 이상 행동을 보이는 석이, 알코올 중독인 아빠가 평소처럼 술에 취해 자는 줄 알고 죽은 아빠와 한 집에서 사흘을 함께 지낸 미경이(이상 가명)…. 이런 기구한 사연들을 안고 아이들은 살아간다.

이 아이들을 방치하면 ‘가난의 대물림’이 고착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대통령 자문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 고득영 과장은 말했다. 이를 막기 위해 정부가 ‘빈곤 아동·청소년 종합 대책’을 발표하고 나섰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다(24~25쪽 딸린 기사 참조).

어린이 1인당 복지비 지출 규모를 따져보았을 때 한국은 40 달러로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유럽 국가(프랑스 2천 달러, 독일 1천7백 달러)와는 비교하기도 민망하거니와 미국(2백97 달러)과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는 수준이다.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스웨덴의 어린이 1인당 복지비는 3천9백 달러 수준으로 한국보다 무려 100배 가량 많다. 한국은 결코 선진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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