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신 패권 전략’ 떴다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3.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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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와 감축 작전에 돌입했다. 세계 군사 질서 재편에 나선 것이다.
이라크 전쟁이 끝나면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서 지위가 더욱 확고해진 미국은 앞으로 그들의 패권을 어떻게 운용할까. 미국의 막강한 힘은 기본적으로는 미국 본토에 있는 지상군 약 1백10만명과, 해외에 배치되었거나 항공모함을 타고서 5대양을 누비는 해외 주둔 미군 약 25만명에게서 나온다. 미국은 ‘언제, 어디서든’ 자기네의 막강한 군사력을 자유자재로 해외에 ‘투사(projection)’하기 위해 키티 호크·엔터프라이즈 등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전단 12개를 편성해 운영하고 있다. 미국의 패권 국가적 면모는 미군이 설치·운용하는 사령부의 작전 범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미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을 비롯해 전세계를 모두 ‘5개 작전 지역’으로 나누어 관리하는 유일한 나라다. 예컨대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 전역과 아프리카 일대·중동 지역 일부(시리아·레바논 등) 관리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본부를 둔 ‘미국 유럽통합사령부’가 맡고 있다. 이라크 전쟁을 치러 유명해진 ‘미국 중부사령부’도 중동 중심부 대부분을 ‘작전 지역’으로 삼고 있다. 이외에도 미국은 북부사령부·남부사령부 등을 두고 있다.

미군 3만7천명이 주둔해온 한국의 경우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통상 ‘한반도 전쟁 억지력’으로 불리는 주한미군은, 주일미군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통합사령부(본부 미국 하와이)인 ‘태평양 사령부’(1947년 창설됨)에 소속된 미국의 주된 해외 병력이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태평양사령부의 작전 권역 안에 미국이 ‘잠재적인 적국’으로 간주하고 있는 중국이 편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해외 주둔 미군은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어느 특정 국가에 주둔하는 미군 병력은 때로는 해당 국가 국방 정책의 골간이 될 정도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지만, 미국 정부나 미군의 처지에서는 언제라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장기판의 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주한미군도 마찬가지다. 만약 세계 전략상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미군은 언제든 한반도에서 발을 뺄 수 있다.

그런 미국이 마침내 장기판에 놓인 말들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해외 주둔 미군을 재배치하는 큰 그림은 우선 해외에 배치한 병력을 대대적으로 축소하는 모양으로 그려지고 있다. 유럽·중동·동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도 미군 감축 및 재배치가 깊이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중동 지역 미군 재배치 작업의 핵심 무대는 사우디아라비아이다. 미국과 사우디 정부는, 늦어도 올해 안으로 사우디에 주둔해왔던 미군 병력 대부분을 철수하기로 최근 합의했다. 미군은 1991년 페르시아 만 전쟁 이래, 이라크 남부 지역에 설정한 ‘비행 금지 구역(No-fly zone)’을 순찰한다는 명목으로 사우디에만 약 8천명, 페르시아 만 전체로는 약 2만5천명을 주둔시켜 왔다. 그런데 최근 이라크 전쟁을 통한 미국의 ‘후세인 축출’로 인해 비행 금지 구역 자체가 무의미해지면서 미군의 사우디 주둔 필요성이 자동 소멸된 것이다.

사우디 주둔 미군은 ‘사우디 군을 훈련시킬 최소 병력만 남겨두고’ 전원 철수한다. 미군은 이와 함께 프린스 술탄 공군 기지에 있던 미국 공군 작전지휘부도 카타르(예정지 알 우데이드 공군 기지)로 옮길 예정이다. 사우디 주둔 미군을 재배치하려는 결정은 해외 주둔 미군의 이중적 성격과 국제 정치의 변화무쌍함을 보여준다. 미국과 사우디는 60년 가까이 ‘혈맹’이라는 표현이 미흡할 정도로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어왔다. 두 나라의 협력 관계는 1947년,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사우디의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 국왕을 만나 사우디의 풍부한 석유 자원을 미국이 얻는 대신, 국가(왕실)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시작되었다. 석유를 매개로 이루어진 약속은 때에 따라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미국이 이라크라는 새 전략 근거지를 수중에 넣기 전까지는 대체로 굳게 지켜져 왔다.

중동 지역의 전략 지형이 이렇게 바뀌고 있는 사이, 유럽에서도 중대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유럽에는 미군 약 11만5천명이 주둔해 왔으며, 이 중 7만명이 독일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근 유럽 주둔 미군의 주력인 독일 주둔 미군이 ‘떠날 때가 되었다’며 귀거래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 독일 주둔 미군 재배치는 거의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영국의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최근 독일 주둔 미군이 재배치될 유력한 후보지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지목했다. 두 나라가 모두 자발적으로 미국에 기지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지리적으로도 이들 지역이 독일에 비해 코카서스나 중동으로 미군 병력이 신속하게 이동하는 데 유리해 미국으로서도 충분히 구미가 당기는 곳이라는 것이다. 루마니아에는 과거 발칸 전쟁 때 미국이 사용했던 콘스탄차 항구가 있다. 불가리아 역시 군사 기지용으로 적합한 부르가스 항을 보유하고 있다.


사우디 경우와는 달리 독일 주둔 미군의 재배치는 아직 공식 확정·발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물밑 협상이 겉보기와 달리 훨씬 더 깊숙이 진행되어 왔음을 시사하는 증거가 있다. 지난 5월 중순 폴 월포위츠 미국 국방부 부장관의 루마니아 방문이 바로 그것이다. 월포위츠 부장관은 당시 기지 사용 문제를 논의했는지 여부를 따지는 루마니아 기자의 질문에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라면서도 “이라크 전쟁 때 루마니아의 시설이 매우 유용했으며, 루마니아 정부의 지지가 큰 도움이 됐다는 것은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라고 답변했다. 월포위츠 부장관은 기지 제공 논의 여부를 재차 묻자 “루마니아 국방부측이 상당한 정보를 제공했다”라고도 밝혔다.

동북아 방면에서의 미군 재배치 움직임은 주한미군의 한강 이남 재배치 문제가 떠오르면서 이미 한·미 간에 뜨거운 현안이 되었다. 1990년대 한때 오스트레일리아 북부로 이동이 검토되었던 오키나와 주둔 미국 해병의 재배치 문제도 다시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의 <월 스트리트 저널>은 지난 5월27일, 지난해 여름부터 미국 국방부가 앤디 호언 전략 담당 부차관을 중심으로 전문가 10여 명을 동원해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 문제를 집중 연구해 왔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은 독일·한국 등은 앞으로도 계속 ‘전략 기지(strategic bases)’라는 지위를 유지하지만, 이들 지역 병력에 대해서만큼은 본토의 미군과 함께 키르키스탄·싱가포르·남아프리카공화국·동유럽 등에 순환 배치시키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아울러, 미국은 루마니아·키르키스탄 등을 소규모 병력이 주둔하는 ‘전방 기지(forward operating bases)’로 삼아 유사시 전쟁에 대비토록 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이 밖에도 미군은 아프리카의 말리, 중앙아시아의 아제르바이잔,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 등 요소요소에 병력을 상시 주둔시키지는 않지만, 훈련 때 사용하는 지점, 즉 ‘전방 거점(forward operating locations)’을 설치·운영할 계획이다. 미국의 전략가들은 이같은 계획이 실현될 경우,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큰 전략 변화를 맞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전세계에 배치된 해외 미군 병력을 재배치하는 문제가 본격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공산권이 무너지고 냉전 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했던 1990년대 초반에도 이같은 논의가 일어, 해외 주둔 미군이 대폭 축소된 사례가 있다. 2001년 초 미국 정권 교체기에도, 클린턴 정부 시절 해외 주둔 미군의 방만한 운영 실태와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미국 내 일부 군사 연구자들 사이에 ‘해외 주둔 미군 10% 감축론’이 제기되는 등 재배치 문제가 고개를 들기도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미국이 최근 해외 주둔 미군을 재배치하기 위해 나선 근본적인 동기를 조지 부시 정권의 국방 전략과,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강력한 군 개혁 의지에서 찾는다. 이른바 ‘럼스펠드 독트린’으로 알려진 럼스펠드 장관의 군 개혁 방침은, ‘테러 및 대량살상무기 위협 사전 예방 및 선제 공격’을 주요 골자로 한 미국의 국방 원칙(지난해 9월 <미국의 국방 전략>이라는 보고서 형태로 발표되었다)과 부시 정권 출범 이전부터 강조했던 미사일 방어(MD) 시스템 구축과 맞물리면서 세계적 규모의 미군 재배치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74~75쪽 딸린 기사 참조).


미국 국방 당국의 이같은 계획은 이미 곳곳에서 본격 실행을 위한 예행 연습을 거치고 있다. 지난 5월22일 미국 해병대가 실시한 이동 훈련도 그 중 하나다. 미국 해병은 일본 오키나와 기지에서 1개 대대 병력 5백명과 장비를 고속 여객 화물선에 싣고 24시간도 안 걸려 경북 포항에 도착했다. 주한미군 해병대사령관 티머시 도노반 소장은 이때 배포한 보도 자료를 통해 ‘태평양 지역 미군 병력을 신속하게 한반도에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이 훈련의 의미를 설명했다. 미군은 이라크 전쟁 때에도 카타르에서 쿠웨이트로 병력을 옮기면서 정규 화물선보다 2배 이상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쾌속선을 이용해 48시간 만에 임무를 완료한 바 있다. 주한미군을 빼야 되느니, 말아야 되느니 논란을 빚고 있는 사이에 미국은 이처럼 전체 계획에 따른 부분 조처를 착착 진행해 가고 있는 것이다. 부분에 집착하다 보면 본질을 놓칠 수 있다. 나무를 보면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중요한 것은 지금 미국이 세계를 상대로 장기를 다시 두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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