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 체제 KBS ‘불안한 연착륙’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3.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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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는 내부 불안 심리와 조·중·동의 감시망. 한나라당의 KBS 2TV 민영화 전략이라는 난제를 돌파하고 개혁의 볼륨을 높일 것인가. 취임 100일째를 맞는 정연주 사장의 ‘KBS 개혁’ 실험을 긴급 진단한다.
8월2일이면 정연주 전 <한겨레> 논설주간이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한국방송(KBS) 사장 임명장을 받은 지 100일째를 맞는다. 정연주 사장이 취임한 뒤 연 매출액 1조3천억원에 국내 언론 매체 영향력 1위를 달리는 KBS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서울 여의도 KBS 신관 로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전국언론노조 KBS 본부(노조위원장 김영삼)가 내건 ‘국민의 방송 KBS 말살 정책, 한나라당 해체하자’라는 홍보 깃발이다. 깃발 옆에는 KBS 노조가 6월23일 한나라당 해체를 주장하며 여의도 당사 앞에서 벌인 격렬한 시위 사진 수십여 장이 걸개그림처럼 붙어 있다.
KBS 노조 관계자는 “내년 총선까지 한나라당과 긴장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난해까지 MBC가 한나라당과 불편한 관계였다면 올해부터는 KBS와 한나라당의 대결 구도가 뚜렷하다(34~35쪽 상자 기사 참조).

사장과 노조의 ‘친밀성’은 정연주 체제 출범 뒤 두드러진 변화이다. 정사장이 역대 KBS 사장과 다르다는 인상을 강하게 남긴 장면 하나. 지난 7월15일 아침 10시께, 정사장은 예고 없이 신관 1층에 있는 노조 사무실을 방문했다. 회사 돌아가는 얘기도 설명해주고 노조의 고충도 듣고 싶다는 것이 방문한 이유였다.

그러나 정사장이 방문한 직접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다. 정사장은 “‘노조는 몸을 던져가며 한나라당과 싸우는데, 사장은 뭐하고 있느냐’라는 (외부)전화를 받고 미안해서 왔다…그래 다친 사람들은 다 나았나?”라며 노조원들을 위로했다. KBS 노조는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집회를 벌이다 진압 경찰과 충돌해 한 노조원이 이가 부러졌고, 일부는 타박상을 입었다. 사장이 노조원들의 ‘투쟁’을 격려한 것은 지금까지 KBS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KBS 제작본부 교양국 소속의 한 PD는 “공기업의 적당주의나 무사안일한 삶에 젖어 있던 눈으로 보면 KBS는 지금 상전벽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정연주 사장이 변화를 몰고왔다는 점은 직원과 간부 모두가 인정한다. KBS 노조 공정방송위원회 권오훈 간사는 “부서마다 회의실이 부족할 정도로 쌍방향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조직이 활발해졌다”라고 말했다. 정연주 사장에게 비판적이라는 간부 ㄱ씨도 “정사장 취임 뒤 탈권위주위와 열린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정연주 사장의 탈권위적 행동을 보여준 일화 한 토막. 취임 직후인 4월 말, 정사장이 KBS 연구동에 있는 구성작가실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느닷없이 나타나 고충이 있으면 얘기하라는 정사장의 말에 작가들은 “작가실에 랜(LAN)이 깔리지 않아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한다. 밤샘 작업이 많은데, 방충망이 없어서 모기와 해충에 시달린다”라고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정사장은 KBS 작가실이 그때까지도 전화선과 모뎀을 이용한 PC통신을 사용할 만큼 낙후한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정사장이 다녀간 며칠 뒤, 연구동과 별관의 KBS 작가실에 랜이 깔리고, 컴퓨터가 2대 설치되어 인터넷 환경이 갖추어졌다. KBS 작가 김 아무개씨는 <방송작가회보>에 쓴 글을 통해 ‘몇년 간의 숙원 사업이 (며칠 만에) 해결되었다. 정사장의 첫 방문지가 KBS에서 가장 소외된 부분이라고 할 만한 작가실이라는 점부터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라며 정사장의 작가실 방문을 KBS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KBS 노조 관계자는 “노조가 정사장 100일을 평가할 예정이지만 지금까지는 성공적인 연착륙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KBS 내부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노조의 주장과 많이 다르다. 정사장 체제의 KBS를 불안해 하는 분위기도 만만치 않다. 이런 시각은 주로 40대 차장급 이상 중견 직원들에게 꽤 널리 퍼져 있다. 이들은 정사장 취임 뒤 KBS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KBS가 봄 개편 뒤 내세웠던 <미디어 포커스>나 <인물 현대사> 등 개혁 프로그램들은 현재 시청률이 10% 미만이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이 7월16일 발표한 ‘지상파 TV 3사 봄 프로그램 개편 편성 분석’에 따르면, 6월 한달 동안 방송 3사 가운데 KBS 2 TV의 오락 프로그램 편성 비율이 가장 높은(59%) 것으로 드러나 공영 방송 이미지가 무색해졌다. KBS는 당장 <어린이 뉴스 탐험>이나 <도전 골든벨> 등 교양 프로그램 일부가 연예오락 장르로 분류됐다며 반발했지만, 취임 뒤 KBS 1 라디오를 24시간 뉴스·시사 전문 채널로 바꿀 정도로 ‘공영성’을 강조해온 정연주 사장으로서는 뼈아픈 대목이었다.

현재 KBS에서 그나마 제몫을 해내는 부서로는 보도본부(본부장 김 홍)가 꼽힌다. 지난 7월 넷째 주, 시청률은 MBC <뉴스 데스크>를 더블 스코어 차이로 따돌렸다. 시청률 조사기관인 닐슨미디어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7월24일 수도권 7백 가구 시청률 표본조사 결과 는 25.7%, MBC <뉴스 데스크>는 10.2%로 조사되었다. 7월23일에는 KBS 23.3%, MBC 12.8%였다.

그러나 KBS 보도국이 웃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KBS 기자 ㄱ씨는 “몇년 전부터 계속된 KBS 프리미엄일 뿐이다. KBS의 주 시청자는 50대 이상 보수층이고, 부산에서는 KBS 뉴스 시청률이 MBC의 2배 이상이다. 뉴스가 마음에 들어 보는 적극적인 시청자가 아니라 관성적으로 보는 사람들이어서 큰 의미가 없다”라고 말했다. 요즘 KBS 보도국 간부들은 KBS가 계속 친정부적인 뉴스를 생산해낼 경우 시청률이 금방 바닥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고 한다.

KBS 인사들은 정연주 사장 취임 뒤 KBS 내부가 단합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정연주 사장 개인의 약점을 꼽는다. 정사장은 4월28일 사장 취임사에서 “정치권과 정부 쪽에 줄을 대 인사에서 이익을 보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오히려 불이익이 돌아가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간부 ㄱ씨는 “정사장 자신이 지난 4월2일 청와대에서 노조·시민단체 관계자·청와대 인사의 천거를 받았다”라며 ‘태생적 한계’를 지적했다.

조·중·동이 공격거리로 삼았던 정사장과 두 아들의 ‘병역 미필’도 정사장으로서는 부담이었다. 지난 7월 초 정사장은 <조선일보> 간부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나도 병역 문제로 검증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라며 지난 대선 때 한나라당 후보의 병역 문제를 공격한 데 대해 겸연쩍어했다고 한다. KBS 제작본부의 한 PD에 따르면, 정연주 사장 취임 뒤 1998년 KBS개혁팀(팀장 김철수)이 제작했다가 불방되었던 <조선일보를 해부한다> 프로그램을 다시 방송해야 한다는 내부 여론이 있었지만 때마침 정사장의 병역 문제가 불거지는 바람에 ‘확전’을 우려한 간부들이 말려 무산되었다고 한다.


정사장을 비판하는 목소리 가운데는 정연주 사장의 100일이 ‘무늬만 개혁’이었다고 혹평하는 이들도 있다. KBS 중견 PD ㄱ씨는 “특정 고교를 척결한다고 했지만 정작 특정 고교 출신인 정사장 친인척 ㅇ씨(61)가 외부에서 본부장 인사를 조언했다는 얘기가 많았다”라며 정사장이 특정 고교 출신 척결에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KBS PD ㄱ씨는 정사장 체제 이후 가장 큰 문제는 “간부들이 일부 ‘탈레반 PD’들의 눈치만 보면서 스스로 데스크 역할을 소홀히 하거나 ‘게이트 키핑’을 하지 않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ㄱ씨는 간부가 사전에 프로그램을 점검하지 못한 대표적 사례로 <시민 프로젝트, 나와주세요>의 첫 방송(7월2일)을 꼽았다. ㄱ씨는 “당사자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얼굴은커녕 집안 모습조차 보여주지 못하고, 골목길에서 한밤중에 생방송을 한 것은 무례한 행동이고, 촌극이었다. 간부가 사전에 진행 내용을 보고받고 개입했어야 마땅하다”라고 주장했다.

개혁적인 PD로 알려진 한 인사는 “간부들이 정사장이 ‘운동권’이라고 넘겨짚고 눈치를 보거나 오히려 ‘오버’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이것을 통제하지 못하면 방영하는 개혁 프로그램마다 지뢰밭처럼 사고가 터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인사는 이어 “정사장이 취임한 뒤 ‘방송인이 됐으니 프로그램으로 말하겠다’고 했는데, 이 말대로라면 정치적인 편향성을 띠거나 품질 낮은 프로그램에 대해 정사장이 모두 책임져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라고 걱정했다. 개혁을 주장한 프로그램들이 ‘공영 방송’의 수위를 넘을 경우 정연주 사장과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 있는 정당이나 지역과 갈등을 빚게 되고, 그 결과가 수신료 거부 운동 등으로 이어지면 공영 방송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는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KBS 안팎에서는 오는 8월 2일부터 1주일마다 정규 방송으로 편성될 개혁 프로그램 가 그런 우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고품질을 담보해야 한다고 본다. 이 프로그램은 KBS PD 14명과 보도국 기자 2명이 참여해 대법원 해부와 정치 자금 문제 등 예민한 사회 현안들을 매주 내보낼 예정이어서 보수 진영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정연주 사장의 개혁이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한 간부급 인사는 “사원들의 애경사를 챙기는 사장도 좋지만, KBS 사장은 국민이 낸 수신료(준조세)가 주수입원인 국가 기간 방송을 어떻게 운영해 가겠다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공영 방송이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 식으로 정권의 입맛에 맞는 프로그램을 내보낸다면 절대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정연주 사장에게는 지나온 100일보다 KBS 내부 직원들의 이같은 불안 심리와 조·중·동의 감시망, 한나라당의 KBS 2 TV 민영화 전략이라는 삼각 파도를 헤쳐 가야 하는 험난한 과제가 남아 있다. 방송계 인사들은 그 첫 고비가 9월께부터 시작될 KBS 노사의 임단협이 될 것으로 내다본다. 정연주 사장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조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정연주 체제 KBS의 미래가 판가름 나리라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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