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붕 ‘세 실업자’ 시대
  • 이철현·차형석 기자 ()
  • 승인 2003.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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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구가 없다
요즘 한 아무개씨(30)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한숨만 나온다. 3D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벤처 기업에서 마케팅 담당 대리로 일하던 한씨는 지난해 12월 직장을 잃었다. 회사가 경영난에 빠지면서 감원 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취업하기는 쉽지 않았다. “주위 소개도 받고 이력서도 수십 차례 보냈으나 헛수고였다. 함께 회사를 나온 친한 동료 6명 가운데 재취업에 성공한 이는 한 사람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한씨의 가족은 ‘한 지붕 세 실업자’ 형편이다. 아버지와 오빠가 모두 실직해 있다. 아버지는 석유업체에 다니다가 명예퇴직해 집에서 쉬고 있다. 얼마 전까지 카페를 운영하던 오빠는 경기 불황으로 문을 닫았다. 손님이 70%까지 줄어 유지비마저 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씨 가족은 ‘각개격파식’으로 용돈과 생활비를 충당한다. 한씨도 통장에 모아놓은 돈으로 몇 개월은 버틸 수 있다. 한씨는 가족 창업을 해야 하나 궁리 중이다. 어떻게든 ‘실업 가족’을 면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그는 매일 밖으로 돈다. 대낮에 세 사람이 한 집에서 할 일 없이 신문을 뒤적이는 일은 고역이기 때문이다.

‘지하 생활자’ 20대 청년 박 아무개씨는 이와는 정반대 생활을 한다. 그는 안방거사이다. 지난 2월 서울의 한 사립 대학 상경계 학과를 졸업한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취방에서 보낸다. 백수 초창기에는 학교 도서관을 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바깥 출입을 거의 하지 않는다. 식비·교통비 등 움직이면 돈이고, 선후배를 도서관에서 만나는 것도 부담스럽다.

박씨가 이력서를 넣어본 기업은 30여 군데.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적다. 면접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30타수 무안타. 영어 성적이 신통치 않아서라고 그는 생각한다. 연거푸 서류 전형에서 미끄러지자 요즘은 이력서를 내지 않았다. “어차피 안 될 거….” 그의 한탄이다.

최근 그는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과외를 알선하는 사이트에 등록했다(알선 업체가 첫 달은 50%, 둘째 달은 20%, 이후 10%씩 알선 수수료를 떼간다). 방세까지 50만원을 부쳐 주는 부모님에게 미안해서다. 하반기에는 눈높이를 낮추어 볼 생각이다. 그는 “영업직은 자신이 없고, 적성에 맞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그동안 지원하지 않았다. 이제는 직종을 가리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한국은 ‘실업 공화국’이라는 말이 이제 낯설지 않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 한 다리만 건너면 직장을 잃은 중년 실업자나 아예 직장을 구하지도 못한 청년 실업자를 쉽게 찾을 수 있다. 2003년 6월 현재 청년 실업자는 37만명 가량. 청년 실업률은 7.4%로 1998년 이후 줄곧 6∼7%를 유지하고 있다. 전체 실업률 3.3%보다 2배가 넘는 수치이다. 취업을 아예 포기한 청년층을 포함하면 올해 5월 현재 실제 청년 실업률은 24.5%(1백39만명)에 달한다
한씨 집안처럼 부모와 자식이 동시에 실직한 이대(二代) 실업 가족은 국내 고용 시장의 구조와 문제점을 함축해 보여준다. 취업 알선 기관인 ‘잡링크’에는 아버지와 자식이 함께 구직 신청을 하는 사례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잡링크 김현희 실장은 “부자, 모자, 형제, 자매 등 한 가족 안에서 2인 이상 구직 회원으로 등록한 사람이 의외로 많다”라고 말했다.

‘이대 실업’은 장년층의 조기 퇴직과 청년층의 대량 실업 사태가 동시에 증가하면서 나타나는 사회 현상이다. 강순희 중앙고용정보원장은 “기업들이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임금 수준이 높은 장년층 인력을 크게 줄이고 있다. 인력 감축으로 인한 업무 공백은 대학 졸업자나 경력이 일천한 신입 사원을 뽑지 않고 경력자를 채용해 메우고 있다”라고 말했다.

1997년 이후 청년의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3백인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사업체 1천76개 사업장에서 일하는 청년층(15∼29세) 노동자 수치를 살펴보면 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1996년에 64만명이던 것이 2001년에는 43만명으로 줄었다. 또한 3백인 이상의 대규모 사업체에서는 경력직을 선호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1997년에는 신규 채용이 63.1%, 경력 채용이 29.2%였으나, 2001년에는 각각 22.1%, 62.3%로 역전했다(표 참조).

중·장년층의 상황은 좀 다르다. 지난 8월7일 노동부는 상용 노동자 5인 이상 6천여 사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임금구조 통계를 발표했다. 1990년 3.0%이던 55세 이상 노동자 구성비가 2002년에는 6.9%로 크게 증가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장년 노동자의 구성비가 늘었다는 사실은 언뜻 보면 장년층 실업 문제가 점차 해소되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의 시각은 정반대이다. 박경숙 교수(동아대·사회학)는 “중·장년층 노동자 구성비가 증가하는 현상은 우리 사회 빈곤의 심각성을 반영한다”라고 말했다. 실직 중·장년이 생계 때문에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재진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교수는 55세 이상 고연령층 2천5백여 명의 1998년∼2000년 일자리 이동을 추적 조사했다. 일자리 이동에서 가장 전형적인 경우는 장기 비취업이다(66.7%에서 68.2%로). 3년에 걸쳐 정규직 임금 근로자의 비율은 점점 줄어들고(8.3%에서 5.6%로) 비정규직은 지속적으로 늘었다(4.7%에서 5.9%로).
고령 노동자는 주로 농·어업, 자영업 등 제도적 정년의 규제를 받지 않는 비임금 분야에서 일한다. 반면 고령 임금 노동자는 구조 조정 과정에서 조기 정년화 현상을 겪고 있다. 박교수는 “대부분 사업장에서 인원 감축 대상은 고령층 임금 노동자이다. 근대적 은퇴를 경험하는 임금 노동자의 비중이 감소하는 추세이다”라고 말했다.

만성 실업 시대의 징후는 입시 학원가에서도 나타난다. 지난 2월 삼성경제연구소는 6대 도시 중고생 1천2백여 명을 상대로 장래 희망 직업을 조사했다. 교사·의사·컴퓨터 분야 직업·기업가 순이었다. 상대적으로 고용이 안정된 직업들이다.

대학생들의 유턴 현상도 특기할 만하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교대나 의대를 준비하는 20, 30대 수능생(장수생)이 늘고 있다. 노량진 대성학원은 의대에 진학하려는 수험생이 너무 늘어 올해 처음으로 의대 진학반을 꾸렸다. 이영덕 평가실장은 “노량진과 강남만 따져도 장수생 수백명이 의대에 도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황 아무개씨도 장수생 중 한 사람이다. 지난해 2월 서울의 한 사립 대학을 졸업한 황씨는 지난해 취업에 어려움을 겪다가 수능 시험을 다시 치러 교대에 입학했다. 그는 ‘어차피 적성에 맞는 일을 찾기 힘든 세상’이라는 생각에 학교에는 적만 두고, 의대 입학을 준비하고 있다. 황씨는 “의대에 들어가려면 최하 전국 상위 1%에 들어야 한다. 취업 준비 때와 비교하면, 차라리 공부해 1% 안에 들어가는 게 더 현실성 있고 마음도 편하다”라고 말했다.

일자리가 줄어들다 보니 구직자들 간에 ‘구직 포기 현상’도 심해지고 있다. 채용 전문 업체 인크루트의 조사에 따르면, 구직자 2천9백여명 중 8백여 명은 ‘취업 포기 상태’라고 응답했다.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씨는 장기 실업 청년층이 ‘학습된 절망감’ 상태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만성 실업의 심각성을 인식해 정부는 2003년 실업 및 고용 안정 대책 예산으로 2조4백억원을 책정했다. 예산이 가장 많이 투여되는 쪽은 실업자 생활 안정 지원 사업(1조1천9백억원). 실업 급여와 단기 일자리 제공에 쓰인다. 취약계층 고용 안정 대책(4천4백억원), 직업훈련 프로그램 운영(2천5백억원), 청년층 실업 대책(9백억원) 등을 실시하고 있다. 경력자를 선호하는 기업 채용 방식에 맞추어 청소년 직장체험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올해 예산으로 5백40억원을 책정해 청소년 4만4천명에게 직장 체험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그러나 정부의 대책에도 불구하고, 올해 하반기 고용 시장 전망은 암울하기만 하다. 국내외 경제 연구기관들은 올해 경제성장률이 2∼3%에 불과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노동부에 따르면, 국내 기업 4곳 가운데 3곳은 올 3/4분기 채용 계획이 아예 없거나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가을 졸업으로 신규 노동 시장에 진출할 예비 실업자를 감안한다면, 취업난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현재의 실업 문제는 단기간에 극복될 문제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국의 아버지들과 자녀 세대는 본격적인 ‘만성 실업 시대’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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