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과학은 ‘21세기 통합 학문’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3.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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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통합 학문 주인공 된다
비록 그리스 시대 철학자이자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가 뇌를 마음의 자리라고 주장했지만, 17세기까지 인간의 두뇌는 자연과학의 탐구 대상이 아니었다. 몸과 마음이 하나인가 둘인가 하는 철학 논쟁이 뇌에 가장 근접한 탐구 주제였을 뿐이다. 뇌가 자연과학의 연구 대상으로 본격 등장한 것은 20세기 이후였다.

뇌 연구가 전쟁과 사고, 인간의 실수를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러시아의 임상의사 루리아 박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머리를 다친 상이 군인을 치료하다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군인은 집을 빤히 쳐다보면서도 다른 데로 간다든지, 장작을 팰 때 도끼가 자꾸 엉뚱한 데를 찍는다든지 하는 이상 행동을 보였다. 이 군인의 사례가 보고되고서야 인류는 눈이 제대로 보여도 보는 것이 아니라는, 다시 말해 ‘본다’는 행위는 눈을 통해 취합한 사물을 마음(뇌) 속에서 통합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950년대 의학계는 H.M.이라는 머리 글자로 불리는 사람을 주목했다. 그는 간질병 치료를 위해 뇌 조직 절제 수술을 받은 뒤부터 이상해졌다. 이 청년은 여전히 붙임성있고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지만, 새로 자신의 치료를 맡게 된 의사와 마주칠 때면 늘 처음 보는 사람 대하듯 정중히 인사하는 것이 아닌가. 관찰 결과 수술 이후 경험한 것은 하나도 기억으로 저장하지 못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를 통해 의학계는 해마라는 뇌 조직이 기억과 중요한 상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쟁·사고·실수 같은 우연한 계기 통해 진전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야 한 걸음씩 진전되던 뇌 연구는 양전자 방출 촬영(PET)과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등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86년 이후 인류는 영상으로 보는 뇌의 이미지를 통해 살아 있는 인간의 뇌가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인지신경과학자인 강은주 박사(서울대·핵의학과)는 “뇌의 비밀은 캐면 캘수록 무궁무진하다. 뇌는 그만큼 역동적이고 유연한 기관이다”라고 말한다. 가령 청각 장애자의 뇌에서 청각과 관련된 조직은 그냥 놀지 않고 다른 기능을 하는 것으로 역할이 바뀐다. 일반인이 점자를 배울 때와 후천적인 시각 장애인이 점자를 배울 때, 선천적인 시각 장애인이 점자를 배울 때 쓰는 뇌의 부위도 각각 다르다.

하지만 뇌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이 인간의 사고를 통제하는 행위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뇌는 컴퓨터와 달라서, 세포 하나하나에 완결된 콘텐츠가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운동을 통해 그때그때 사고를 조합해내기 때문이다.

뇌 연구의 발전은 인문·사회 과학과 자연과학, 철학과 의학, 심리학과 생물학이라는 전통적인 학문 영역 구분마저 허물어뜨리고 있다. 이정모 교수(성균관대·심리학과)는 “나노과학·생명과학·정보과학과 함께 인지과학이 21세기의 중심 학문이 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20세기 초반 철학의 영역에서 과학의 대상으로 자리를 옮긴 인간의 뇌가 앞으로 새로운 통합 학문의 주인공으로 재등장할 날이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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