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로 커닝하고 '광녀'도 만들고...
  • 차형석 (papapipi@sisapress.com)
  • 승인 2003.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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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접수한 디카족과 디카 문화
디카족에게 디카(디지털 카메라)는 카메라가 아니다. ‘사진기 그 이상’이다. 디카는 휴대품화하고 인터넷과 결합하면서 사진기에서 정보통신기기로 진화하고 있다. 내년에는 무선 인터넷 기능을 가진 디카가 출시된다고 한다. 인터넷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디카족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디카 문화를 소개한다.

디카는 메모장 혹은 이쑤시개?

한 블로그 사이트(blogn.com)가 실시한 ‘생활 속의 디카 발견’ 이벤트에 기상천외한 디카 사용기들이 올라왔다.
공주대학교 강 아무개씨의 사용 후기를 보자. 그에게 디카는 휴대용 메모장이자, 필기 도구이며 커닝 페이퍼이다. 그는 강의 시간표를 디카로 찍어 보관한다. 인라인 동호회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을 자주 오가는 그는 고속버스 배차 시간표를 디카에 저장해 놓고 사용한다. 그가 최근에 발견한 디카의 ‘은밀한’ 용도는 커닝 페이퍼. 강씨는 “만약 시험 감독에게 걸리면 바로 지울 수 있는 것이 디카 페이퍼의 장점이다”라고 말했다.

ID ‘식초 사나이’는 식사 후 이에 디카를 들이댄다. 사진을 보고서 잇새에 낀 고춧가루를 제거한다. ID ‘Pris’인 가정주부는 디카를 교육용으로 사용한다. 아들이 일부러 색연필을 부러뜨리며 말썽을 부리자 그 과정을 디카로 찍고 나서 사진을 보여주며 아들을 다독였다. 그는 “아이가 자기의 잘못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자기 잘못을 깨닫게 하는 데 디카가 최고다”라고 말했다.

하루 방문자 35만명, 페이지뷰가 2천만에 이르는 국내 최대 디카동호회 ‘디시인사이드’는 인터넷 문화를 선도해 왔다. ‘아’ ‘방법’ ‘쌔우다’ ‘압박’ 등이 이 사이트에서 퍼져나간 신조어이다. 이같은 ‘외계어’와 함께 합성 문화가 디카 문화의 정수이다. 합성의 주요 소재가 되었던 이른바 ‘합성 필수 요소’들은 줄줄이 합성 사진계의 슈퍼스타(개벽이·초난강·장승업·신구·무뇌충·딸녀 등)로 탄생했다.

디카족이 낳은 슈퍼스타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 가운데 한 디카동호회가 인터넷 문화를 선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dcinside.com 운영자인 김유식씨의 분석에 따르면, 디카동호회가 ‘PC 통신의 적자(嫡子)’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등장해 PC 통신이 붕괴하면서 PC 통신에서 활동하던 ‘고수’ 두 부류는 산개했다. 기술적 능력이 뛰어났던 전산 전공 고수들은 IT 붐을 타고 벤처 기업으로 갔고, 게시판을 수놓던 사이버 논객(오피니언 리더)들은 인터넷 언론이나 정치 논객 사이트로 흩어졌다. 이 두 부류를 제외한 상당수 마니아층이 머무를 만한 사이트가 없던 상황에서 디카가 등장한 것이다. PC 통신 마니아들이 디카동호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김유식씨는 “오프라인 모임에 가보면 10대는 거의 없다. 대부분 20대 중반 이후부터 30대 중반이다. 디카족 리더들의 공통점은 어려서부터 PC 통신을 접해 컨텐츠를 만드는 데 발군의 생산력을 보인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민경배 교수(경희사이버대학교·사이버NGO학과)는 디카동호회에서 ‘아’ 등 외계어와 합성 슈퍼스타들이 등장하는 것을 ‘디카족의 구별짓기’ 전략이라고 분석한다. 초기에 폐쇄성을 보이던 디카족이 ‘우리는 다른 네티즌들과 다르다’는 집합적 정체성을 형성한 것이 ‘아’ 문화라는 설명이다. 집합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필요했던 합성 사진계의 ‘가상’ 인물들이 공동체의 대표 이미지로 등장했다. 애초 남과 구분짓기 위해 선택된 합성사진계의 슈퍼스타들로 인해 오히려 디카 동호회가 대중성을 얻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디카족은 말과 글에 이어 사진을 제3의 언어로 선택했다. 사진은 이들에게 생각과 메시지이다. 민경배 교수는 “네티즌의 컨텐츠 생산 방식이 텍스트 기반에서 비주얼 기반으로 넘어가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것이 디카이다”라고 말했다.

디카의 빛과 그림자

디카 문화의 부정적 측면도 지적된다. 바로 프라이버시 문제. 합성 사진계의 스타 ‘광녀’는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친구가 올린 한 사진 때문에 전국적 인물이 되어 버렸다. 1981년생 평범한 여성 광녀는 디시인사이드측에 자신의 사진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김양은 사이버문화연구소장은 “타인의 초상권을 침해하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는 풍조는 분명 문제다”라고 말했다. 언제, 어디서 자신도 모르게 사진이 찍힐 수 있다는 감시 카메라의 일상화. 디카와 카메라폰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새로운 판옵티콘’(원형 감시 체제)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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