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마 이후'를 창조하는 사람들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0.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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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원·이동웅·김현우 등, 체질 세분화로 창조적 계승
동무 이제마가 창안한 사상의학의 특징은 의사들의 의학이 아니라 민중의 의학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의 저서 <동의수세보원> 서문에 ‘집집마다 자신의 병을 알고 고치는 법을 알면 원기를 보존해 수를 누릴 수 있다(家家知醫 人人知病然後 可以壽世保元)’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요즘같이 병원에 가서 푸대접받기 일쑤인 세상에서는 귀가 번쩍 트이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일반적으로 전통 한의학 또는 동양 의학은 환자 개개인의 질병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대단히 복잡한 변수들을 고려한다. 이른바 `‘8강변증’이라는 것으로, 각 병증의 표리(表裏) 한열(寒熱) 허실(虛實) 관계를 먼저 변증(辨證)한 다음에야 처방이 가능하다. 그 과정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오랜 숙련 기간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이제마에서 발원하는 체질 의학은 이 복잡한 과정을 단 한 가지로 압축해 놓았다. 즉 각 개인의 체질만 정확하게 감별하면 병증의 원인, 경과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까지 예측할 수 있다. 또한 <동의수세보원>에 이미 체질별·병증별 약 처방전이 들어 있어 ‘집집마다 병을 알고 고치는 일’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마는 사상의학을 완성하지 못했다. 이제마가 위대한 천재이기는 했지만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새로운 의학 체계를 완성하기에는 그의 생이 짧았다. 그래서 그는 <동의수세보원> 곳곳에서 자신이 미처 못한 일을 후세에 당부하기도 했는데, 이런 이유로 인해 자신의 사후 100년이 지나면 이 의학이 크게 떨치리라고 예언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예언 상당 부분이 적중했다고 할 수 있다. 약 10년 전부터 `갑자기 체질 의학 선풍이 일어나더니 그의 서거 100주년을 즈음해서 유수한 체질의학자들이 이 의학을 완성하기 위하여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일반인 사이에 체질 의학 붐을 일으킨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한의학자가 아닌 양의학자였다. 서울대 의대 교수 출신인 이명복씨가 저술한 <체질을 알면 건강이 보인다>는 책이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붐이 일었는데, 이명복씨 스스로도 고백했듯이 이 책에서 소개한 ‘팔상 의학’ 창안자는 그가 아니었다. 그는 이 의학을 ‘`권도원’이라는 한의사로부터 전수받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체질 의학을 신봉하는 한의사들이 마치 `‘살아 있는 신(神)’처럼 신봉하는 권도원이라는 인물이 일반 대중에게 처음 모습을 나타낸 순간이었다.

8체질 의학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권도원씨가 이처럼 ‘신비한 인물’로 구전되어온 까닭은 그가 매스컴을 철저하게 피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제자들이 권씨의 가르침을 받아 정리한 <8체질건강법>(고려원미디어)이라는 책에 따르면, 권씨가 체질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신의 체질 때문이었다고 한다. 즉 그는 고기만 먹으면 탈이 나는 `‘태양인’ 체질이었는데, 자신의 체질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던 중 이제마 선생의 사상의학을 접하고 깊이 빠져들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에 이 학문을 접하고 한때 보급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던 그는 점차 한계에 부딪혔다. 우선 체질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이제마가 제시한 네 가지 체질 이외에 또 다른 체질이 있을 수 있다는 의문에 휩싸였다. 이런 의문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그는 8개의 체질과 맥진법 그리고 체질 침법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1965년 10월 그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세계침술학회에 자신의 8체질론을 발표해 눈길을 모았다. 그러나 국내의 반응은 냉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내 한의학계에서는 이제마의 학설과 다른 주장은 모두 이단이라고 몰아붙였던 것이다. 급기야 당시 한 일간지에 권씨의 8체질 의학을 비방하는 기고문이 실렸고, 이에 충격을 받은 그는 모든 대외 활동을 접고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에만 전념했다. 일종의 은둔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단순한 은둔이 아니라 자신의 의학을 완성하기 위한 무서운 집념의 기간이었다.
이 기간에도 권씨가 운영하는 서울 신당동 ‘제선한의원’은 전국에서 몰려드는 환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몇 년 전부터 그는 일반 질병은 제자들에게 맡기고 암이나 간질환(간염 간경화 간암) 그리고 안과에서 불치병으로 알려진 녹내장 환자만 받아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

그렇다면 권씨의 8체질 의학의 위력은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그의 의술은 우선 이제마의 사상체질론을 더 세분화한 8체질론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폐(대장), 비(위), 간(담), 신(방광) 4장부의 대소우열 관계를 가지고 사람의 체질을 구분한다. 예를 들어 소양인은 비(위)의 기능이 신장(방광)의 기능보다 발달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소양인의 2차 장부라 할 수 있는 폐와 간의 관계에도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즉 폐가 간보다 큰 소양인과 간이 폐보다 큰 소양인이 있을 수 있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이 점에 대한 언급이 없는 데 비해 권도원은 이런 2차 장기의 대소 관계까지 감안해 8체질론을 정립한 것이다.

특히 그가 창안한 체질 침법은 체질 의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에는 침 치료법은 전무하다. 약 처방전을 창안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에서 후대의 누군가가 침법을 발견해 주기를 고대하는 기록을 남겨두었다.

그 이제마의 유지가 권도원에게서 이루어진 것이다. 권도원의 체질 침법의 뿌리는 임진왜란 당시 전설적인 명의였던 사암(舍岩) 황정학 선생의 사암침법(舍岩針法), 일명 오행침법(五行針法)이다. 사명 대사의 제자로 보통 사암도인이라고 알려져온 황정학 선생은 팔다리의 오수혈(五輸穴;12경락의 361 혈 중 주관절과 슬관절 아래 부분에 존재하는 60개 혈)의 상생 상극 관계를 절묘하게 활용해 난치법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사암침법 체계를 세웠다.

그런데 이 침법은 체질에 맞을 경우는 신기할 정도로 효과가 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점이었다. 바로 이런 문제점이 권도원의 8체질론과 결합해 사라지게 되었고, 치료 효과가 현저히 개선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권도원의 8체질 침법은 우리 민족 의학의 양대 정수를 결합했다는 점에서도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지난 30여 년 간의 임상을 통해 그의 의술은 이미 완성 단계에 도달했다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의 제자 중에는, 그의 의술이 모두 9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재 공개한 것은 그 중 극히 일부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권씨는 자신의 의술이 섣불리 공개될 경우 한의학계나 양의학계의 기득권 세력이 공격할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그가 한창 젊었을 때는 자신의 의술을 알리기 위해 활발히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한때 양의사들과 워크숍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한 내과의사가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의 의술이 대단히 훌륭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술이 보편화하면 우리는 모두 문을 닫아야 합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의술을 완성하기 전에 섣불리 공개할 경우 자칫하면 ‘밥그릇’ 싸움에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처음 그의 의술에 매료되었던 한의사들 중에는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맥진을 통해 체질을 감별하는 방식이 분명 이제마보다 진일보한 것은 사실이나 숙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침 처방의 원리나 이론적 체계가 밝혀지지 않아 기계적인 답보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도 큰 요인이 되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이가 바로 이동웅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1997년 출간한 <팔상체질학 강좌>(행림출판)라는 책으로 일약 체질의학계의 이론가로 떠올랐다. 그는 이 책에서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에 이미 8개 체질의 징후들이 존재함을 지적해, 이제마의 사상의학과 8체질 의학의 상관 관계를 밝혀냈다. 또한 체질 침법의 구성 원리를 오수혈의 오행론적 상호 작용과 사암침법의 원리를 토대로 해서 명쾌하게 밝혀냈다. 이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침술 처방을 창안하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또한 기존의 사상방 위주로 되어 있는 약 처방을 8개 체질로 구분해놓은 것도 그의 업적
이다.
그는 매우 놀라운 탐구력과 이론적 통찰력을 가지고 그 뒤로도 탁월한 연구 업적을 발표했다. 1999년 출간한 <체질음양론>(사상체질연구원)은 동양 의학의 또 한 가지 이론인 음양론을 체질의학과 결합해 각 체질의 한열 구조를 규명한 이론서이다. 특히 각 체질별 음양 순환 통로에 관한 이론은 그의 독창적인 발견으로 체질 병리를 규명하는 데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었다고 평가된다.

이씨는 최근 그동안의 임상 경험과 <동의수세보원>을 재검토해 8체질을 더 세분화한 십육상체질론을 정립했다. 그는 십육상체질론의 실마리 역시 <동의수세보원>의 병증론에서 찾고 있는데, 현재 그에 맞는 처방전을 확립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아직 모색 단계이기는 하지만 김현우씨(덕진한의원 원장)가 주장하고 있는 ‘64체질유형론’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올해 3월 출간한 <신체질 건강혁명>(국일미디어)이라는 책에서, 이제마나 후대의 체질의학자들이 무시해온 화장부(火臟腑·심장 소장 심포 삼초)의 경락 허실 구조를 밝혀내 체질 구분의 새로운 기준으로 제시했다. 그 역시 각 체질 유형별 치료법을 정비하기 위해 실험적인 모색을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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