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들끓는 고통의 땅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3.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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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은 한없이 아프다. 어른들은 생업을 포기한 채 매일 투쟁한다. 아이들도 화염병을 들었다. 수십년 이웃 사촌은 핵폐기장 문제로 원수가 되었다. ‘좌절의 땅’ 부안의 6박7일을 생중계한다.
“부안은 아픕니다.” 단식 농성 중인 김인경 원불교 교무는 외지인을 대할 때면 언제나 이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김종규 부안군수가 위도 핵폐기장 유치 신청을 한 지난 7월 이래 부안은 고통 없이 지낸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는 것이다. 단식 중인 문규현 신부도 “눈물 없이 하루를 보낸 적이 없을 정도로 한없이 아픈 가슴을 가눌 길이 없다”라고 했다.

부안 사람들은 그동안 집회에 나왔다가 전경과 충돌해 3백여 명이 다쳤다. 이 광경을 보고 분에 못 이긴 사람들은 쇠파이프를 휘두르다 구속되었다. 언론에 폭도로 몰린 군민들은 다시 한번 울어야 했다. 주민들 사이에 골은 더욱 깊어졌다. 전경들에게 밥을 판다고 식당을 때려부순 사람이 있었고, 이를 말리다 싸운 사람도 있었다. 수십 년간 사이좋게 지내오던 이웃들이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편이 갈려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원수 사이가 되었다. 정부가 나 몰라라 하는 사이 부안 사람들은 1백40일이 넘게 싸우고 멍들고 아파하고 있다. <시사저널> 취재진은 6박7일간 머무르며 주민의 고통을 보았다.

새벽 5시(11월23일) 부안의 하루는 한두 시간 일찍 시작된다. 촛불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변산 지서리에 사는 정인선씨(46)는 8t 동력선을 몰고 바다로 나갔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11시에 돌아왔다. 그는 30년 동안 배를 탔지만 요즈음처럼 답답한 때가 없었다고 한다. 일을 마치고도 그는 여간해서는 마을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어망과 말뚝 그리고 선박 연료를 실은 트럭은 언제나 검문 대상이었고 정씨는 경찰서에 여러 번 끌려갔다.
아침 8시(22일) 상서면에서 농사를 짓는 공석두씨(49)는 벌써 한나절 일을 마쳤다. “낮에나 저녁에는 폐기장 문제로 볼 일이 많아 새벽에 일해야 한다.” 부안에서 올 농사를 그르친 사람이 열에 서넛은 된다고 했다. 곰소의 젓갈도 예년에 비해 절반 정도만 팔려나가고 있다. 변산과 격포에서는 그 정도가 심하다. 관광객은 반으로 줄었고 횟집 매상도 예년의 3분의 1 수준이다.

욕설로 노래 만들어 부르는 여중생들

10시(23일) 열린우리당 장영달 의원이 부안 성당을 찾았다. 20일에는 민주당 추미애 의원, 22일에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24일에는 민주당 의원들이 부안성당을 찾았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부안 주민에게 욕만 먹어야 했다. 부안은 격앙되어 있다. 평소에 말을 꺼내기 앞서 으레 하던 ‘거시기’ 대신에 욕설이 바로 나왔다. 아줌마·아저씨는 물론 여고생·여중생도 마찬가지였다. 여중생들은 욕설로 노랫말을 만들어 부르고 다녔다.

12시(23일) 백산고 교사 정재철씨는 정부와 어른들이 아이들을 너무 무시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부안 학생들은 43일 동안 학교에 못 갔지만 무관심할 뿐이다. 중학생들이 화염병을 든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라고 말했다.

15시(23일) 원전센터 유치에 나섰던 위도발전협의회 위원장 정영복씨(51)가 전주 전북도청에서 기자들과 만나 “원전센터 유치 당사자인 위도 주민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연내 주민투표가 논의되고 있는 사실에 분개한다” 라고 말했다.

15시30분(24일) 전국에서 모인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십자가를 앞세우고 성당에서 수협까지 평화 행진을 했다. 지나는 사람도, 차도 숨을 멈추었다. 전경들에게도 ‘입을 다물라’는 상부의 지시가 떨어졌다.

16시(26일) 수협 앞 광장 천막에서 8일째 단식 농성 중인 김인경 교무는 전기 히터를 켜지 않은 채 담요를 쓰고 있었다. 추워서 히터를 켜야겠다고 하자 김교무는 “전기를 얻어 쓰는 주제에 낮에는 안 써야지”라며 거절했다. 김교무는 “추운 것은 참을 만하다. 하지만 정부 때문에 부안 주민이 아픈 것은 못 참겠다”라고 말했다.

“낮에는 사람이 살고 밤에는 까마귀가 산다”

17시(28일)‘핵폐기장 백지화 범군민대책위’에서 홍보를 맡고 있는 최동호씨(43)는 8t 덤프트럭을 개조한 홍보 차량을 타고 거리 선전전에 나섰다. 3분 가량 되는 선전 연설을 하루 15∼20 차례 반복한다.

밤이 되자 부안은 낯빛이 달라졌다. “부안의 낮은 사람이 살고 부안의 밤은 까마귀가 산다.” 부안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부안 군민은 전경을 까마귀떼라고 불렀다.
18시(28일) 전경을 실은 차량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거리마다 전경들이 진을 쳤다. 도청과 경찰서 길목은 전경들로 인해 통제되었다.

19시(28일) 촛불 집회의 막이 올랐다. 꼭 1백25일째였다. 반핵민주광장이라 불리는 부안 수협 광장의 집회가 원천 봉쇄되어 부안 군민은 부안성당에 모여 촛불을 들었다.

19시(27일) 수협 광장의 촛불은 단식 농성 중인 문규현 신부, 김인경 원불교 교무 그리고 내소사 주지인 진원 스님이 지켰다. 단식하던 문규현 신부가 천막을 나섰다. 하지만 오늘도 한 걸음 나가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다. 전경들은 두 겹 세 겹으로 천막을 에워싸고 있었다. 겨우 한 발짝을 떼고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촛불을 켜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다. 촛불에 불을 붙일 때마다 얼굴을 맞대고 있는 전경이 ‘후’ 하고 입 바람으로 촛불을 꺼버렸다. 몇 번을 다시 붙였지만 전경도 그치지 않았다. “내 집에서 맘대로 촛불도 못 켜나.” 문신부는 기자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책임자에게 여러 번 항의를 하고 나서야 문신부는 촛불을 켤 수 있었다.

19시30분(23일) 예수교 신자 10여 명이 십자가를 든 채 찬송가를 부르며 거리 행진을 시작했다. 10m를 행진했을 때 이들 앞을 전경 100여 명이 가로막았다. 그 뒤에는 1천여 전경이 대기하고 있었다. 전경들이 강하게 밀어붙이자 시위대의 찬송가 소리도 더 커졌다. 주민들도 합세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30분 만에 성당으로 돌아가야 했다.

20시(27일) 수협 앞에서 시위하던 군민 1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19일 시위 때 전경의 방패에 맞아 앞니 2개가 부러지고 입술이 찢어진 고교생 희전이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병원복을 입고 있어 연행은 면했다.
21시(25일) 쌀쌀한 날씨였지만 성당 안 열기는 뜨거웠다. 오늘도 부안여중 1학년 슬아(14)는 친구 성희와 함께 성당에 나왔다. 학교 시험과 숙제로 사나흘 빠진 것을 제외하고는 매일 성당에서 촛불을 들었다. 학교를 안 나간 43일 동안도 마찬가지였다. 슬아는 “후손에게 이 아름다운 부안을 물려줄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슬아가 매일 성당에 오는 다른 이유는 아버지를 보기 위해서다. 부안농민회 회장인 아버지 김진원씨는 부안 사태가 일어난 후부터 수배자 신분이 되어 성당에서 생활하고 있다. 슬아는 상경 투쟁도 하고, 고속도로 점거에 가담하기도 했다. 학교 뒷산을 넘다 선생님께 매를 맞기도 했지만 앞으로도 반핵 행사에 참여할 것이라고 했다. 소신이라고 했다. 변산공동체학교에 다니는 정하(15·중2)도 성당에 나왔다. 정하는 학교 친구들과 함께 수배된 담임 선생님 김희정씨를 보러 매일 성당에 온다.

22시(24일) 격포에서 횟집을 하는 정관엽씨(43)도 어김없이 집회에 나왔다. 그는 “저녁이면 횟집을 닫고 성당에 나온다. 쫙 깔린 전경들에게 위협감을 느낀 손님들이 회를 먹으러 오지도 않는다”라고 말했다. 격포에서 민박집을 하는 김성균씨(44)도 일손을 놓은 지 오래다. 김씨는 “사람들이 미쳐가고 있다. 부안 사람들은 행복할 권리조차 박탈당했다”라고 말했다.

위도로 가는 뱃길이 열리는 격포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주로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어 폐기장이 생길 경우 타격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부안에서 45분 거리인 격포에서는 24일 100여 명이 집회에 참가했다. 대형 버스 한 대와 24인승 학원 버스 2대 그리고 승용차가 대여섯 대 동원되었다고 한다. 격포 사람들은 관광버스를 대절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자 5백만원을 들여 중고 버스 한 대를 구입했다.

22시(24일) 김경은 원불교 교무의 기도로 촛불 집회는 끝이 났다.

22시30분(25일) 부안을 방문한 전국민중연대 대표단은 군민과 촛불 집회를 함께 했다. 집회를 마친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피 흘려서 얻은 민주주의가 부안에서 죽어가고 있다. 정부가 고집을 부리면 부안에 더 심각한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23시(26일) 30여 군민은 성모병원 앞에 모여 구호를 외쳤다. 이들 대부분은 촛불 시위를 마치고 시위하다가 다친 가족을 간호하기 위해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전경 1천여 명이 사방에서 몰려와 둘러쌌고, 시위대는 병원으로, 집으로 흩어졌다.

전경들, 냉수로 샤워하고 냉골에서 새우잠

23시30분(26일) 부안의 아픔은 군민의 것만은 아니었다. 시위를 막는 전경들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수협 사거리를 지키던 전남기동대 소속 전경들은 이제서야 잠자리를 보기 시작했다. 10시30분 시위가 끝난 다음에야 헬멧을 벗고 긴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숙소로 쓰는 곳은 김제의 폐교 대촌초등학교 안에 세운 간이 시설물로 한 방에 100여 명이 넘게 묵는다. 시설도 형편없다. 찬물로 샤워를 하기가 일쑤고 방바닥도 차가웠다. 이 부대 김정인 일경에게는 남다른 아픔 하나가 더 있다. 그는 시위 현장에서 아버지와 마주쳤다. 김일경의 고향은 부안 계화면이다. 이곳에 부모님과 형이 산다. 부모님은 김일경에게 “힘들어도 기죽지 말고 열심히 임무를 다하라”고 당부했고, 김일경은 부모님께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으니 가급적이면 시위하는 곳에는 나오지 말라”고 했다. 김일경은 “부대에서 나와 생활하는 게 낯설 뿐 힘든 것은 없다”라고 의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최대중 중대장은 “입대한 지 6개월이 가장 힘들 때인데 김일경은 고향 사람들과 대치해야 하니 더욱 가슴 아프다”라고 말했다.

24시(27일) 아직도 부안의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촛불은 결코 꺼질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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