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영국 식민 통치술 ‘답습’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3.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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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군사 지배 방식·주권 이양 프로그램 등 ‘판박이’
영국의 신속한 진격은 일찍부터 눈독을 들였던 석유 때문이었다. 1911년 대영제국의 해군 제독이던 윈스턴 처칠은 장차 석유가 대영제국의 해군을 움직이는 주된 에너지원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중동 원유를 확보하는 데 팔을 걷어붙였다. 당시 앵글로-페르시아 석유 회사의 지분 51%를 사들이고, 직접 유전을 확보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던 것이다.

영국의 이라크 지배 구조는 1917년 3월 바그다드를 접수하면서 윤곽이 잡혔는데, 초창기 영국의 지배 방식은 실질적인 군사 점령 아래 민간 정부에 의한 통치를 가미한 것이었다. 미국이 지난 3월 바그다드를 점령한 이후 현재까지 실행하고 있는 통치 방식은 큰 틀에서 보면 80여 년 전 영국의 선택과 다르지 않다. 미국은 현재 이라크를 모두 6개 지역으로 분할해 군사 점령하고 있으며(이 가운데 두 지역은 영국과 폴란드가 관할), 민간 행정 기구로 연립과도기구(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를 운영하고 있다.

영국이 이라크인들에게 주권을 넘겨준 것은 1921년께였다. 이보다 한 해 전 여름, 독립 움직임이 이라크 전국을 뒤흔들자 식민장관을 맡고 있던 처칠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긴급 회의를 소집해 ‘직접 통치’에서 ‘간접 통치’로 전환한 것이다. 영국은 이라크에 주권을 내주었지만, 소수의 영국인 고문을 통해 이라크의 내정에 관여했다. 영국의 간접 통치는 이라크가 완전 독립하게 된 1934년까지 지속되었다.

미국이 이라크에 대해 천명한 주권 이양 계획 프로그램은 바로 이같은 ‘영국 모델’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 영국은 파이잘 이븐 후세인을 국왕으로 옹립해 왕정을 세웠지만, 미국은 2005년까지 겉으로나마 선거와 투표에 의해 지도자와 헌법을 마련하는 미국식 민주 국가를 계획하고 있다. 이것이 팍스 브리타니카와 팍스 아메리카나의 차이라면 차이다.
미국의 저명한 군사 문제 전문가 앤서니 코즈먼은 지난 7월 말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미군에 대한 이라크인들의 저항이 본격화하는 모습을 지적하며 ‘제3차 페르시아 만 전쟁’을 경고한 바 있다. 전후 복구와 경제 재건 등 미국이 이라크에 진주하면서 내건 약속들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채, 미군과 동맹군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처럼 계속 행동할 경우, 머지 않아 전쟁이 다시 터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약 4개월이 지난 지금 코즈먼의 경고가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지난 12월3일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열린 나토 관계 장관 회의에 참석해 ‘산발적인 폭력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라크의 대부분은 비교적 안정된 상태’라고 호언했지만, 이는 의도적인 ‘전황 축소’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럼스펠드 장관은 회원국들에 병력 등 추가 군사 지원을 ‘구걸’하고 있었다.

8~12개 부대 편성한 저항군, 세포 조직도 운영

이보다 며칠 앞선 11월30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120km 떨어진 사마라에서 미군이 이라크를 점령한 이래 최대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튿날 미군 브리핑에 따르면, 전투는 미군이 유통시킬 새 이라크 화폐를 은행으로 옮기던 중 발생했다. 병력 93명이 투입된 사마라 전투에서, 미군은 ‘적군 54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발표했다. 이 전투에는 미군 탱크 8대와 브래들리 장갑차 4대, 험비 차량 6대가 동원되었다. 병력·동원된 장비·사상자 등 모든 면에서 사마라 교전은 ‘정규전’이라고 규정하기에 손색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미군측 피해는 둘째치고라도 미군이 실질적인 전쟁 상태에 돌입해 있다는 사실은, 지난 11월2일 미군 치누크 헬기가 이라크 저항 세력의 공격을 받아 격추된 직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는 토벌 작전, 이른바 ‘쇠망치 작전’에서도 확인된다. 미군 당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이라크 주둔 미군은 지난 11월16∼23일, 이라크 전역에서 순찰 약 1만2천회, 수색 2백30회를 했다. 쇠망치 작전에는 또 ‘적’의 은신처를 공격하기 위해 중무장한 헬리콥터까지 동원했다. 이를 ‘전쟁 상태’라고 하지 않는다면, 지구상에는 달리 전쟁이라고 이를 만한 군사적 충돌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같은 전쟁이 한층 심해질 것이라는 데 있다. 미군은 당초 이라크 저항 세력의 정체를 후세인 잔당과 일부 테러 분자 등 극소수라고 파악했다. 또 이들은 정확한 명령 전달 체계 없이 제각각 ‘세포 단위’로 움직이며, 산발적인 소규모 공격을 자행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미군의 이같은 인식은 현실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12월2일 바그다드 방어 임무를 띠고 있는 미군 제1 기갑사단 마틴 뎀시 준장이 이라크 저항 세력에 ‘중앙 지휘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한 것이다.
뎀시 준장이 AP통신에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저항 세력은 자금 조달망과 하부 조직과의 통신망까지 갖추고 있으며, 100명 안팎의 병력을 전투 단위로 하여 8~12개 부대까지 편성해 운영하고 있다. 중앙지휘부는 또 따로 10~20명을 구성원으로 한 소규모 세포 조직도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중앙지휘부를 구성하고 전투 부대까지 편성한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미국 정보 당국과 전문가들은 이라크 저항 세력을 크게 세 부류로 분류한다. 과거 이라크군의 최정예이자 사담 후세인의 확실한 기반이었던 공화국수비대, 1995년 후세인 맏아들 우다이에 의해 창설된 페다인 사담(‘사담의 순교자’) 출신, 그리고 보안기관 출신들이 주축을 이룬 ‘후세인 추종 세력’이 첫 번째 부류이다. 이들은 사담 후세인의 지휘를 직접 받거나 후세인 정권의 2인자인 이자트 알 두리 휘하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용병들, 미군 1명 죽일 때마다 1천 달러 받는다”

이들의 주요 활동 무대는 수도 바그다드와 후세인의 고향 티그리트, 그리고 바그다드 서쪽 라마디를 잇는 이른바 ‘수니 트라이앵글’이다. 수니파의 본거지여서 일찍부터 주목되었던 이 지역은 지난 수 개월 동안 발생한 굵직굵직한 폭탄 테러 및 기습 공격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앞에서 언급한 종전 이후 최대 규모 교전이 일어난 사마라도 이 지역에 속해 있다. 한마디로 수니 트라이앵글은 가장 격렬한 저항이 발생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또한 후세인의 권력 기반이 된 바트당 충성파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이라크 저항 세력을 구성하는 또 다른 부류는 성전을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돈을 벌기 위해 주변 국가에서 국경을 넘어온 ‘외국 용병’들이다. 미군 당국은 이들이 국경을 넘는 루트를 대략 3개 방면으로 파악하고 있다. 시리아·사우디아라비아·이란과 이라크의 접경 지대이다. 이 중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이 시리아이다. 미국은 지난 3월 이라크 전쟁이 끝나갈 무렵, 시리아에 대해 ‘테러 분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행위 자체를 테러 행위로 간주하겠다’고 협박한 바 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상당수 이슬람 전사들이 시리아에서 이라크로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최근에도 국경 경비를 강화했지만 문제는 국경을 완전히 봉쇄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현재 이라크 과도 통치기구를 책임지고 있는 폴 브레머는 지난 11월 미국으로 귀환해 바그다드와 이라크의 긴박한 상황을 설명한 바 있는데, 그 때에도 그는 국경 봉쇄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사방에서 넘어오는 외국 용병을 감시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모자랄 뿐 아니라,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잠입하는 그들을 식별해내기는 아예 불가능하다고 밝힌 바 있다.

주변국에서 넘어오는 이슬람 전사들에게 ‘용병’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들이 돈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은 지난 11월 말, 체포된 테러 용의자의 증언을 인용해 ‘미군 병사 1명을 죽일 때마다 1천 달러가 건네진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미군 당국은 그동안 이라크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자살 폭탄 테러와 민간인에 대한 기습 공격이 바로 이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미군의 이라크 점령을 위협하는 마지막 부류는 알 카에다·알 안사르 등 기존 테러 조직이다. 알 카에다는 9·11 참사 때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국제 테러 조직이다. 알 안사르는 미군의 이라크 점령 이후 자살 폭탄 테러가 급증함에 따라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테러 조직이다. 대부분 쿠르드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란에 근거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월19일 바그다드 유엔본부가 폭탄 트럭에 폭파된 사고는 바로 이들의 소행인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후세인, ‘전쟁 자금’ 10억~30억 달러 확보

미군은 이처럼 후세인 잔당·외국 용병·국제 테러 조직 등 복합적인 저항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지난 11월에만 80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 문제는 이같은 공격이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먼저 이라크 저항 세력들은 소규모이지만 손발을 맞추기 시작했다. 헬리콥터 격추, 경찰서 습격 등이 좋은 예다. 이라크 점령군의 최고 사령관인 존 아비자이드 중장은 최근 “이라크 저항 세력 안에 전국 규모의 작전을 실시할 만한 지휘부가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일정 수준에서 조율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시인했다. 미군은 잠재적인 ‘전국 지휘부’인 사담 후세인과 그의 주요 측근의 소재는 물론 생사 여부조차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미군은 후세인도 후세인이지만 후세인측이 빼돌린 돈을 찾지 못해 안달이다. 사담 후세인측은 전쟁이 나기 오래 전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석유 판매 대금을 해외로 빼돌렸다. 미군 당국은 최소 10억 달러, 최대 30억 달러에 이르는 이 돈이 사담 후세인의 ‘전쟁 자금’이라고 보고 있다. 사담 후세인측에 이 돈이 남아 있는 한, 앞으로 상당 기간 현재와 같은 저항이 계속되거나 때에 따라 격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의 저항을 점치는 데에는 또 하나의 중대한 변수가 있다. 미국은 지금까지 후세인 잔당만 토벌하면 이라크 안정화 작업은 시간 문제일 뿐이라고 호언해왔다. 하지만 이라크에는 수니파와 시아파를 막론하고 외국의 점령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과 저항의 역사, 그리고 강렬한 민족주의 정서가 있다.

이라크는 1914년부터 1932년까지 영국의 위임 통치를 받았다. 위임 통치에 대한 이라크인의 저항은 ‘1920년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거세게 불붙어 영국의 식민 통치 방식까지 바꾸었다. 당시 식민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은 이듬해인 1921년, 이라크 통치 방식을 ‘직접 통치’에서 ‘간접 통치’로 바꾸었다.

이라크의 저항과 관련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트당의 역사다. 오늘날 ‘수니파의 당’ 또는 ‘후세인 당’으로 통하는 바트당은 원래 1944년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던 시리아에서 태동한 민족 해방 운동 조직으로, 종파와 국가를 초월한 범아랍주의와 강한 민족주의를 특색으로 하고 있다. 바트당의 지향점은 사담 후세인이 바트당을 사당화하기 전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다. 바트당은 사담 후세인이 망한 오늘날에도 시리아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정치 조직으로 남아 있다. 미군은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오랜 생명력을 지닌 ‘무형의 적’과도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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