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장의 힘을 보여주마”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3.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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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의원에 도전장 낸 시·구청장들/정대철·김동일 등 ‘외나무 대결’
이병령 전 대전 유성구청장(자민련)이 총선 출마를 위해 구청장 직을 그만두던 지난 12월17일, 구청에서 열린 이임식에 참석한 이 지역 송석찬 의원(열린우리당)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을 했다. 이씨가 이임사를 읽어 내리다가 “(현역 의원들이) 확실히 처신했다면 감히 도전할 수 있었겠느냐”라며 자신을 정면으로 겨냥한 도발성 발언을 했던 것. 이 날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며 이씨에게 꽃다발까지 건넸던 송의원은, 지역 주민과 공무원·기초 의원 들이 빼곡이 모인 자리에서 무안을 당한 셈이 되었다.

총선에 출마할 단체장들의 사퇴 시한(12월17일)을 넘긴 현재, 자리를 내놓은 단체장은 전국에서 13명. 이 중에는 김혁규 전 경남도지사처럼 지역구로 출마할지 전국구로 출마할지 불투명한 사람도 있지만, 나머지 12명은 거개가 자신을 단체장으로 키워준 지역에서 출마할 결심을 굳혔다(표 참조).

이에 따라 같은 지역을 놓고 겨루게 될 현역 의원과 이에 맞선 도전자들은 신경이 곤두섰다. 애초에 50∼60명이 될 것으로 점쳐졌던 출마 단체장 숫자가 대폭 줄어 다른 지역 출마자들이 희희낙락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들 해당 지역 출마자들은 ‘올 것이 왔다’며 일전을 치를 태세를 가다듬고 있다.
단체장이 가장 경쟁력 있는 후보군에 속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단체장의 일거수 일투족은 모조리 사전 선거운동’이라는 얘기가 있을 만큼 단체장들은 임기 동안 지역 예산·공사 인허가권 등을 적절히 활용해 지역 민심을 사로잡을 수 있다. 이 때문에 현역 의원들은 단체장이 총선에 나오기 어렵도록 선거법으로 꽁꽁 묶어두는가 하면, 확실한 자기 사람을 지역 단체장 후보에 공천함으로써 ‘배신’을 미연에 방지하는 식으로 단체장을 장악하려 애써 왔다.

송석찬·이병령, 1년 전부터 신경전

그렇지만 현역 의원과 단체장이 속한 당이 다르면 이런 방식도 통하지 않아, 둘이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다. 앞서의 이병령 전 유성구청장과 송석찬 의원이 꼭 그런 경우다. 이임식 날은 송의원이 뒤통수를 맞았지만 1년 전에는 정반대였다. 2002년 12월 송의원은 이씨보고 구청장 직을 사퇴하라고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이씨가 단체장에 선출된 직후 업무상 횡령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아 직무가 정지되어 있는데도 틈만 나면 관내의 각종 모임에 참석해 구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당시 지역 사회 일각에서는 송의원이 일찌감치 라이벌 죽이기에 나섰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핵공학박사이자 한국형 경수로 개발 책임자라는 이력을 앞세운 이씨가 송의원으로서는 눈엣가시였을 법하다는 것이다. 그 뒤 항소심에서 벌금형으로 형이 깎여 이씨가 구청장 직무를 다시 수행하게 되자 두 사람 간의 대립은 격화했다. 두 사람간 갈등으로 인해 지역 발전이 저해되고 있다는 우려마저 제기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이씨는 구청장 직을 사퇴하며 “지역의 갈등 구조를 화해 구조로 바꾸기 위해 출마한다”라고 뼈 있는 한 마디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단체장이 금배지를 단다고 갈등 구조가 화해 구조로 바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오랜 세월 ‘찰떡 궁합’을 과시해 온 현역 의원과 단체장마저 적이 되어 갈라서고 있는 것이 이번 총선의 특징이다. 김동일 전 중구청장(민주당)과 정대철 의원(우리당), 김충환 전 강동구청장(한나라당)과 이부영 의원(열린우리당)이 대표적인 예다.
전남 장성 출신인 김동일 전 청장은 중구청장에 임명된 1993년 이래 지난 10년간 정대철 의원과 동지적 인연을 맺어 왔다. 민선 지자체 시대가 도래한 뒤 정의원은 선거 때마다 빠짐없이 김씨를 공개 지원했다. 서울대 정치학과 선후배 사이인 이부영 의원과 김충환 전 청장도 마찬가지.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던 김씨를 1991년 정치권으로 처음 끌어들인 이래 이의원은 12년 후배인 김씨의 정치적 후견인 노릇을 해 왔다. 이같은 후원에 힘입어 김씨는 올해로 만 49세라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3선 구청장을 지내며 서울시장을 넘보는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2명 중 7명이 열린우리당 의원과 맞서

그러나 신당 출현이라는 정치 지각의 대변동 앞에서는 10년 우정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민주당은 정대철 의원이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옮기자 기다렸다는 듯 김동일 전 청장을 영입해 표적 공천 사례로 삼았다. 김씨는 오는 1월10일 지구당 개편대회를 갖고 정의원에 대해 본격적으로 날을 세울 계획이다. 그런가 하면 김충환 전 청장은 이부영 의원이 한나라당을 탈당한 직후 한나라당 강동 갑 조직책을 신청함으로써 이의원과 신뢰 관계에서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다. 이를 두고 인간적으로 너무한 것 아니냐는 쑥덕거림도 있었지만 김씨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이의원이 정치 8단이라면 나도 8단이다. 이의원에게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은 있지만, 어차피 서로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경합이라고 생각해 페어 플레이를 펼치겠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들말고 다른 단체장에게도 신당 및 4당 체제 출현은 출마 욕망에 불을 당긴 인화제나 다름없었다. 출마 의지를 밝힌 단체장 12명 중 상대할 현역 의원의 소속 정당이 열린우리당인 경우가 7명에 달함이 이를 잘 보여준다.

반대로 단체장이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바꾸어 구정치를 심판하겠다며 나선 경우도 있다. 원혜영 전 부천시장이 그런 경우다.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 시절부터 노무현 대통령과 각별한 친분을 쌓아온 원씨는 후단협 출신인 민주당 최선영 의원을 상대로 부천 오정구에서 친노(親盧) 대 반노 전선을 형성하게 될 전망이다. 그런가 하면 열린우리당이 공들인 끝에 낚은 ‘대어’ 김혁규 전 지사는 ‘HK호와 함께 희망의 바다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자신과 함께 신당에 합류할 영남 지역 인사들을 계속해서 규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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