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이 뽑은 올해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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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9.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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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한국의 생태 사상><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한국의 생태 사상>
박희병 지음·돌베개 펴냄

추천인
배병삼(성심외국어대·한국정치사상)
정옥자(서울대 규장각 소장·국사학)
주승택(안동대·한문학)
전신재(한림대·국문학)


최근 한국학은 실학 개념 해체와 더불어 그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 70년대 비판적 지성들에 의하여 개진되었던 실학 개념은, 90년대에 들어서는 더 이상 한국학의 중심 개념이 아니다.

사실 실학 연구는 자생적 근대화의 기점을 확인하려는 생산적 논의를 문학·역사·철학 각 방면에서 추동하여 왔다. 그러다가 목전의 경제적 발전이 구가되면서 자본주의 맹아론에 집착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생활사와 문화 활동의 세부 사실에 대한 분석이 점차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동아시아 문화권이라는 다소 막연한 개념이 대두했다. 이 논의 방식들은 경제적 성장을 인정하는 일종의 자신감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지성들은 경제적 발전이 가져오는 부정적 결과를 경고하고 있다. 인간 본위의 생태 사상을 추구하고 계몽하려는 의도에서, 한국의 전통 사상에서 생태론을 검증하려는 연구가 나왔다. 전통 사상에 생태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있을까, 도대체 전통 사상이 생태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일은 현대사적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할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실천적 목표를 지닌다. 박희병 교수의 <한국의 생태 사상>
은 바로 그러한 지적 고투의 산물이다. 박교수는 홍대용이 제시한 ‘인간과 물(物)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명제에 전통적 인본주의의 사유 양식이 담겨 있다고 논했다. 그간 전통 사상에서 근대적 의식을 확인하려는 논의 구도에서, 홍대용은 과학주의 내지는 서구적 근대 의식을 지닌 인물로서 부각되었다. 하지만 박교수는 그러한 관점에 대해 비판적이다. 박교수는 유교적 생생지인(生生之仁 : 만물을 낳고 낳는 인)의 이념과 도가적 제물론(齊物論)이 민족사상가에 의하여 개화되고 또 그 두 관념이 교차되어 온 방식에서 생태 사상의 전통을 읽어냈다.
또한 예술이나 글쓰기가 생태주의를 확산하는 실천 방안일 수 있다는 사실을 민족 문학의 역사에서 발굴했다. 과거의 지식인들이 궁극적으로 생태와의 일체성(物我一體)을 지향해 왔고, 사적 욕망을 억제하고 경물과 정신과의 만남(景與意會)에서 정신적 자유를 추구해 왔다는 사실을, 이 책은 논증했다. 그러나 박교수는 불교적 사유에 담긴 생태 사상을 다루지 않았다. 불교 사상은 생태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유교나 도가의 생태 사상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쳐 왔다.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 것이리라.

박교수는 전통적인 생태 사상이 신비주의와 결합될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이 점은 사실 더욱 충분하게 거론되었어야 할 듯하다. 근래에 기술적 과학주의를 전면으로 반성하면서 그것에 편승해 반과학주의가 우리 사회에 또 다른 병폐를 낳고 있다. 그러한 전락을 엄중히 경계하는 것도 한국학의 과제라고 생각된다.

박교수가 개괄한 것처럼 ‘인간과 물(物)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명제가 전통적 생태 사상의 축이었다고 할 때, 이른바 인간과 물의 분리를 강구하는 합리적·근대적 이성이 그 전통 사상에서 어떻게 분화해 나왔는가 하는 박교수의 입론(立論)은 한국학 분야에 새로운 논쟁점을 제시했다.
심경호 (고려대 교수·한문학)한국학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최완수 지음·대원사 펴냄

겸재의 금강산 그림에는 ‘진경
시대’라는 문화의 꽃을 피워낸
당대의 정신 세계가 담겨 있다.


우리 선조에게 금강산은 어떤 산이었을까? 금강산은 통일 신라 이후 불가(佛家)에서 신산(神山)으로 받들어 왔으며, 조선 시대 문화 절정기였던 18세기 진경 시대에 이르러서는 지식인·예술가라면 반드시 친견해야 하는 성지와 다름없었다.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은, 진경 시대의 선두에 섰던 겸재 정 선이 금강산을 어떻게 찾아 그림을 그렸는지를 설명한 ‘금강산 안내서’이다. 진경 시대 시인·화가 들은 주체성을 자각하면서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화폭에 담았는데, 겸재의 작품 가운데 금강산 풍경은 절반 가량에 이른다.이 책은 제목 그대로 겸재가 남긴 그림을 통해 금강산을 두루 살펴보게 한다. 여느 안내서와 다른 점은, 겸재 그림을 통해 금강산 풍경을 감상하게 한다는 점 외에도 금강산에 대한 조선 성리학자들의 태도와 정신 자세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18세기를 진경 시대라고 이름 붙인 지은이는, 겸재의 그림에 들어 있는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과 그림에 녹아 있는 정신 및 빼어난 예술성을 아울러 소개했다.

지은이에 따르면, 겸재의 위대함이란 금강산의 절경을 있는 그대로 사생한 데서 끝나지 않는다. 겸재의 그림에는 진경 시대라는 꽃을 피워낸 당대의 정신 세계와 색채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금강산은 율곡 이이가 나와서 이기이원론인 주자성리학을 이기일원론으로 발전시켜 조선성리학으로 토착화시키면서부터, 성리학 이념이 이상적으로 구현된 천하 제일 명승으로 각광받게 되었다”라고 지은이는 말했다. 겸재는 조선의 고유 이념을 금강산이라는 소재를 통해 그림으로 표출했다는 얘기이다.

이 책은 겸재의 작품 세계뿐 아니라, 우리 땅과 문화에 대한 조선 시대 지식인들의 자부심과 자존 의식을 명쾌하게 드러내 보인다. 이 책이 한국학 분야에서 올해의 좋은 책으로 꼽힌 까닭은 여기에 연유한다. 쭦

成宇濟 기자올해 한국학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은 포만감을 느낄 만하다. 당장 햇빛을 보아야 할 우리 고전과 자료들이 서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굵직굵직한 작업들이 결실을 맺어 국학이 본궤도에 오르고 있는 징후가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국학 분야 초미의 과제는 흩어진 자료를 한데 모으고, 한문으로 쓰인 전적들의 먼지를 털어내어 현대어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히는 것이다. 이 분야에서 올해는 유난히 눈길을 끄는 성과가 많았다. 원로 한학자 홍찬유씨가 감수하고, 소장 국문학자 정후수 교수(한성대)가 우리말로 옮긴 〈추사 김정희 시 전집〉(풀빛)이 비근한 예. 지난 10월에는 실시학사연구회 연구원들이 공동 번역한 〈조희룡 전집〉(전6권·한길아트)이 5년 간의 노력 끝에 빛을 보기도 했다.

〈추사 김정희 시 전집〉은 특히 고(故) 임창순씨 등 한학계의 노(老) 대가들이 잇달아 타계하는 최근, 한시 해석의 1인자라는 평을 들어온 홍찬유씨가 후학들을 지도해, 난해하기로 유명해 감히 손을 대지 못했던 큰 숙제를 몸소 풀었다는 점에서 자못 의미가 크다.

실시학사연구회을 이끌고 있는 이우성씨의 북돋움으로 올해 활짝 빛을 본
〈조희룡 전집〉도 이와 비슷한 경우다. 추사의 문인이면서도, 추사와는 또 다른 예술 세계를 열었던 호산 조희룡은 조선 후기 문예사와 사회사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그의 전집이 번역되어 나옴으로써 한국학계는 또 하나의 귀중한 자양분을 얻은 셈이다.

상업적 국역이 아닌 ‘연구 번역’의 성과로는 〈조선 시대의 한시-허 균 편〉(문헌과해석사)과 〈동무유고(東武遺稿)〉(청계)도 입에 오르내린다. 〈조선 시대…〉는 조선 시대 최고의 시선집인 허 균의 〈국조시산(國朝詩刪)〉을 소장 학자 4명이 번역한 것이며, 〈동무유고〉는 ‘사상의학’으로 유명한 동무 이제마의 유고집을 옮긴 것이다.

무려 열두 권으로 묶인 〈한국의 별신굿 무가〉(국학자료원)와 국문학자 5명이 8년간 작업해 완성한 〈한국 고전소설 독해사전〉(태학사), 〈역주 흠흠신서〉(전4권·현대실학사) 따위도 빼놓을 수 없는 이 방면의 대작들.
전신재 교수는 “서둘러서 책을 내온 경솔함을 일깨우고, 기초가 튼튼해야 한국학이 설 수 있음을 실제 성과물을 통해 입증한 사례다”라며 반색한다.
최근 몇년간 봇물을 이루고 있는 ‘한국학 대중화’ 작업도 간단 없이 이어졌다.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외에 〈조선왕조실록 어떤 책인가〉(동방미디어), 〈관동십경〉(효형) 등이 모두 이 방면의 성과들이다.
아울러 〈한국의 생태 사상〉(돌베개) 〈아시아적 가치〉(전통과현대) 등 몇몇 책은 한국학이 과거의 학문이 아니라 현재의 학문임을 다시금 일깨운 작품이라는 의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같은 성과는 문학·예술·사상과 더불어 한국학의 한 축을 이루는 역사학 쪽에서도 나왔다. 〈5백년 고려사〉(박종기·푸른역사)는, 그동안 한국사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대접받아온 고려 시대 연구를 한 단계 높이고, 이를 또한 현재의 학문으로 인식시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 책이라는 평을 듣는다. 평이한 강의식 문체로 풀어 쓴 이 책은, 고려 왕조의 다양한 성격을 호주 제도와 분단 상황, 5·16 등 현대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연결지어 비교 설명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흐뭇함의 한켠에서 한국학계의 위기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도 있어 학계를 긴장시켰다. 다름 아닌 〈하늘은 말이 없고, 도는 형상이 없다〉(퇴계학연구원) 출간이 바로 그것이다. 마이클 칼튼이라는 서양 학자에 의해 10년 전 쓰여진 이 책은 퇴계 이 황의 〈성학십도〉를 영어로 옮긴 것이다. 말하자면 한문으로 쓰인 우리 고전이 일단 영어로 번역되었다가 다시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국학을 하기 위해서는 하버드 옌칭연구소나 하와이 대학 동서문화센터를 다녀오는 것이 필수가 될 날도 멀지 않았다”라는 개탄도 들린다.

朴晟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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