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김택진 차승재 오성윤 조택연 이나미 박미라
  • 李文宰·成宇濟·金恩男·魯順同 기자 ()
  • 승인 2000.02.1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온라인 게임에서 종이책까지 컨텐츠 개발 주역들
문화에서 문화산업으로 이동하는 속도가 눈부시다. 문화산업은 전통적 장르를 디지털로 저장, 유통시키는 한편, 인터넷 온라인을 통해 네티즌들을 연결시킨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만나 ‘잡종강세’를 일으키는 이 과도기를 문화 프로듀서들은 어떻게 통과하고 있을까. 문화의 미래로 먼저 가 있는 젊은 상상력들은 각기 문화 전쟁의 최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NC소프트 김택진 사장은 “모든 문명이기의 종착역은 엔터테인먼트”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인터넷도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이다. 1991년 미국 보스톤 소프트웨어 연구소에 근무할 때, 인터넷을 처음 접하고 그 무한한 잠재력을 발견한 그는 1995~96년, 국내 최초의 인터넷 온라인 서비스인 아미넷(‘신비로’의 전신)을 개발했다.

일찍이 ‘한글’을 개발하고, 한메소프트를 창립하는 등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출발했지만, 그의 주특기는 인터넷이었다. 1997년 넷츠고서비스를 개발한 뒤 인터넷과 엔터테인먼트를 접합시키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1998년 NC소프트가 내놓은 인터넷 온라인 게임 ‘리니지’는 ‘스타크래프트’를 바짝 추격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올 1월 현재 총 누적 회원수가 1백20만 명, 최고 동시 접속자 수가 2만 명을 넘어섰다. 하루 평균 접속자가 8만 명 선. 당초 예상을 10배 이상 능가하는 대성공이었다.

김사장은 한국에만 있는 PC방이 온라인 게임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PC방과 게임 매니아들을 통해 ‘집중적인 검증’을 받기 때문이다. 김사장은 “앞으로 3~4년 안에 온라인 게임이 전체 게임 시장의 20% 이상을 점유할 것”이라며 이 분야의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한다. 김사장은 이제 소프트웨어 개발자라기 보다는 벤처 기업 경영자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윤리적-심리적 문제까지 깊이 연구해야 한다는 그는 “가장 강한 경쟁력은 연구, 즉 사람에게서 나온다”라고 말한다.충무로에는 지금 지각 변동이 일고 있다. 최근 대기업 자본이 대거 철수하는 바람에 위기감이 고조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 위기감은 곧 잦아들 것 같다. 충무로는 지난 연말, ‘무한영상벤처투자조합’을 설립하고, 이제 막 경쟁력을 인정받기 시작한 한국 영화계에 수혈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 새로운 움직임의 중심에 우노필름 차승재 사장이 있다. 그가 이 투자조합에서 투자할 영화를 선정하는 실무를 맡았다.

차승재 사장은 지금까지 영화 9편을 제작한 스타급 프로듀서. 흥행작 <비트>를 위시해, <8월의 크리스마 스> <처녀들의 저녁식사> <모텔 선인장> 등 국제영화제에서 초청을 받은 작품들을 잇달아 제작했다. 합리적이고도 넉넉한 일처리 솜씨로, 충무로를 대표하는 프로듀서이다. 대중의 기호를 읽어내 자본과 감독을 연결하고, 작품의 수준과 제작 일정을 관리하는 능력이 남다르다.

그가 충무로의 브랜드로 자리잡은 이유는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려는 노력 때문이었다. “흥행에 실패하더라도 작품에는 결함이 없다는 평가를 얻자는 것이 내 원칙”이라고 말한다. 그는 위험 부담이 있더라도 한 걸음 앞서나가는 스타일을 선호한다. 당장 시장을 뒤흔드는 파괴력이 없다고 해도, 영화 시장을 전진시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제주 4·3을 배경으로 한 장편 역사 애니메이션 <오돌또기>와 박수동 원작의 성인용 애니메이션 <고인돌>. (주)오돌또기 애니메이션 총괄 프로듀서인 오성윤씨는 이 두 작품의 산파역을 맡고 있다. 1996년 박재동 화백과 (주)오돌또기를 공동 창립하고 본격적으로 팀을 꾸려 제작에 들어갔지만, 재원을 마련이 여의치 않아 제자리 걸음 상태였다. 지난 해 10월, 한 회사가 투자 의사를 밝혀 프로젝트를 재가동시켰다.

애니메이션 프로듀서는 영화 프로듀서와 역할이 비슷하지만, 제작 과정에 대한 관여도가 훨씬 크다. 세분화되어 있는 제작 공정을 매끄럽게 이어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작품의 의도가 대중의 감성과 맞아 떨어져야 하고, 시나리오와 실제 그림 사이의 간격도 조정해야 한다. 그림에 대한 안목은 필수적이고 마케팅 능력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오프로듀서는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지만, 재학 중 연극에 전념하면서 대중 예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연극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영화로 옮아갔다. 회화가 영화를 만났으니, 곧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는 애니메이션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80년대 후반의 한국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하청업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울무비에서 8년 동안 기획자로 활약하는 동안 김수정 원작의 <둘리의 얼음나라>를 기획, 의미있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 애니메이션은 지금까지 순수 국내자본을 투자해 적자를 보지 않은 유일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현기영씨의 소설을 모티브로 박재동씨가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는 <오돌또기>는 리얼리즘과 판타지가 결합하는데, 작품성으로 승부하는 최초의 본격 애니메이션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오프로듀서는 긴밀한 팀웍을 강조한다. 애니메이션 감독 이춘백, 배경 감독 유승배, 그리고 박재동 화백이 없다면 자신의 기획과 제작도 성립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일정표대로라면 <오돌또기>는 2001년 12월에 개봉된다.건축가 조택연 교수(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는 아직 지은 집이 없다. 설계는 무수하게 했지만, 아무도 그의 디자인을 시공하지 못했다. 그의 건축이 세워지는 공간은 현실이 아니라 사이버 공간인 까닭이다. 서양 현대건축에는 ‘페이퍼 건축’이란 흐름이 있었다. 실현 불가능한 설계이지만, 이 개념 건축이 건축사의 진화를 가능케 했다.

컴퓨터 기술이 급진전하면서 페이퍼 건축은 디지털 건축으로 탈바꿈했다. 조교수처럼 미래의 인간과 도시를 탐구하는 건축가에게 컴퓨터는 ‘꿈의 공간’이다. 청소년기에 과학소설을 탐독했던 그는 미국 유학 시절에 접한 신과학을 건축 안으로 끌어들였다. UCLA 건축대학원 졸업 논문이 <공상과학소설을 위한 건축>이었다.

그는 디지털 건축을 영화나 게임에 비유한다.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하지만 느낄 수는 있는 사이버 세계를 통해 사유와 상상력의 극지를 실험하는 것이다. 디지털 건축은 아이디어 뱅크이다. 컨셉트 카가 자동차 기술을 발전시키듯이, 디지털 건축은 현실 공간을 대상으로 하는 건축가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다른 장르에 비해 건축 디자인은 미래 지향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그는 두 번째 개인전에서 세 가지 관점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모색한다. 2042년의 파리에서는 생태 건축을, 2042년 뉴욕에서는 자연이 인간을 수용하는 단계를, 그리고 2042년 서울에서는 사이버 공간과 인간의 삶에 주목한다. 조교수가 사유하는 시간과 공간의 크기는 한국 건축계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그는 크로마뇽인에서부터 인간의 기억을 담고 있지만 전혀 다른 형태일 미래 인류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거듭한다.

스튜디오 바프 이나미 실장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양손에 쥐고 있다. 표지만이 아니라 본문 디자인, 최종 제작까지 관장하는 북 프러듀서인 동시에 웹 사이트 디자인도 하고 있다. 그에게 책은 영화 같은 종합예술이자 그 무대이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부터 글과 그림, 디자인을 혼자 담당하는 원맨 시스템을 익혀왔다. LA와 뉴욕에서 프리랜서로 활동하다가 94년 귀국, 디자인하우스에서 창간한 여성지 <이브>의 편집장 겸 아트디렉터로 일했다.

그는 인터넷 시대에 오히려 편집 디자인의 역할이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가 보기에, 웹은 이제 속도가 아니라 컨텐츠의 질이 문제다. 컨텐츠는 책처럼 스토리텔링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는 산업디자인진흥원이 세계디자인대회를 개최할 때 웹 사이트를 디자인했는데,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코너에 스토리텔링 기법을 적용, 큰 호응을 받았다. 그림책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사이트는 지난해 조선일보 디지털 대전에서 상을 받았다. 책과 웹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보는 그는 “앞으로는 편집이 상위 개념이다. 디지털 웹과 아날로그 책은 모두 편집 디자인 영역으로 편입될 것”이라고 말한다.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편집장 박미라씨는 늘 아웃사이더였다. 거대담론이 난무하던 80년대 대학캠퍼스에서 그는 여학생 운동이라는 지극히 주변적인 영역을 떠맡게 되었다. 당시 총여학생회 주최로 대동제를 벌이면 ‘보통’ 여학생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대의’가 아닌 ‘일상’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하고 논문을 쓰기 위해 전국 각지의 노동요를 채록하면서 ‘여자들만의 언어’가 따로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1997년 <이프> 창간에 관여하면서 그는 여자 속에 은밀하게 숨어 있던 여자들의 언어를 토해내라고 충동질하는 ‘악녀’로 변신했다. <이프>는 여성계에서도 비주류 집단에 속한다. 심각하게, 정면으로 성차별 문제와 맞서는 대신 깐죽거리며 세상의 옆구리를 치고 빠진다. 지식인의 위선을 가차없이 쪼아댔다. <이프>는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여성들’을 일차 공격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행복하다고 믿어온 일상을 낯설게 하고, 그 지점에서 나와 남이 더불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케 했다.

계간지 <이프>는 창간 1년 만에 손익 분기점에 도달했다. 독자층이 한정되기 마련인 계간지가 거둔 이 놀라운 성과는 한국 사회가 새로운 페미니즘, 일상의 페미니즘에 얼마나 목말라하고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박미라씨는 ‘20 대 80의 사회’에서 하위 80% 사회의 남녀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임을 인식하고 여성 각자가 삶의 주체로 서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