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바람에 휩쓸린 4·13 총선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0.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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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자금 초과 예사…21세기 정치개혁 구호 실종
16대 총선은 ‘돈 먹는 하마’인가. 아직 본격 선거전에 돌입하기 전인데도 각당 후보들은 벌써 자금을 다 풀었느니, 10억은 더 써야 한다느니 실토하면서 실탄 부족을 호소한다. 정치 개혁을 구호로 내걸고 총선에 뛰어든 이른바 386세대를 포함해 정치 신인들도 현실 앞에 무릎을 꿇기는 마찬가지다. 주로 수도권에 출마한 이들은 최소한 10억원은 뿌려야 안심할 수 있다며 중앙당에 실탄 지원을 애걸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야 각 진영은 중앙당까지 총동원해 서로 상대방의 돈선거 행태를 폭로하기에 바쁘다. 공세의 포문은 한나라당이 먼저 열었다. 한나라당 부정선거감시단(단장 서청원 의원)은 3월15일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민주당의 돈선거 사례 40여 건을 폭로하며 이번 선거전 양태를 자유당 말기의 3·15 부정 선거에 비유했다. 이에 질세라 민주당은 당내 공명선거대책위원회(위원장 신 건)를 통해 한나라당 각 지구당에서 벌어졌다는 불법 매표 행위를 맞폭로하고, 흑색 선전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다.

본격 선거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고공에서 맞붙은 돈선거 논쟁은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훨씬 심각한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시사저널> 취재팀이 각당 후보 20여 명을 익명을 전제로 만나 그간 뿌린 돈과 앞으로 쓸 돈을 조사한 결과 이번 선거에서 수도권 후보는 최소 10억원, 중소 도시 및 지방에 출전한 후보는 최소 5억원을 잡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액수도 각 후보 진영이 줄잡아 뽑은 평균치에 불과하다. 수도권 접전지에 출마한 어느 정치 신인처럼 이미 10억여원을 지출한 경우도 있었다. 수도권의 한 지역구에 나선 민주당 재력가가 그 장본인. 그가 후보 등록도 마치기 전에 이처럼 많은 돈을 뿌리게 된 것은, 공천 후유증으로 발생한 지역구내 조직 갈등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돈 많은 정치 신인을 울궈먹으려는 지역내 일부 선거 브로커들의 등쌀에 휘둘린 것도 한몫을 했다. 통상 지역구 후보의 동별 연락사무소는 동책의 집에 전화 한 대 설치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그는 지역구 관내 10여개 동마다 번듯한 선거 사무실을 차린 것. 여기에다 공천후 흔들리는 조직을 복구하기 위해 초반부터 집중적인 물량 공세를 퍼부었다.386 세대도 돈선거에 휩쓸려

꼼짝없이 선관위와 야당 후보 진영으로부터 꼬투리를 잡힐 것을 우려한 중앙당에서는 서둘러 이 후보의 동별 연락사무소를 폐쇄하도록 조처하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워낙 티 나게 돈을 써서 그렇지 이 후보가 선거 비용으로 뿌린 돈이 남달리 많은 것은 아니다. 신인이나 중진을 가릴 것 없이 이번 선거전에서 돈의 위력에 초연한 후보는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의 한 지역구에 공천을 받은 386세대 야당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조직을 가동해온 저쪽(상대 당) 현역 중진 의원은 이미 합법적인 의정 보고회에다 불법적인 사랑방좌담회 등을 열면서 십수억원을 뿌리고 수만명의 유권자를 접촉했다. 이런 상태에서 신인이 경쟁할 수 있는 길은 다른 비상한 방법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다. 그 방법을 쓰는 데도 돈이 필요하다.”

조직과 지명도에서 열세인 그가 말하는 비상한 방법이란 텔레마케팅 기법이다. 이 기법은 지난 15대 총선때 김현철 사단이 동원하여 효과를 보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여야를 막론하고 주로 신인들이 거액을 마다하지 않고 앞다투어 뛰어드는 불법 선거운동이다. 이 기법을 동원하려면 통상 2억~5억 원 가량의 자금이 필요하다.

총선 무렵만 되면 돈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고질이나 다름없는 지구당 운영 관행에서 비롯된다. 현역 의원들은 4년 동안 지역구를 관리하면서 사실상 유권자들과 돈으로 매개된다. 특히 돈이 집중 투입되는 시기는 각당의 공천이 있기 6개월 전부터이다. 이때쯤부터 현역들은 당원 단합대회·의정 보고대회 등을 명목으로 유권자 관리에 들어가는데, 재공천을 받기 위해서는 중앙당이 실시하는 지역구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율을 보여야 하므로 이를 위해 실탄을 듬뿍 뿌리는 관행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수도권에서 재공천을 받고 재선 고지에 도전하는 민주당의 한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각당 중진 후보들에게는 선거 시기에 돈을 얼마 쓰느냐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 이미 지난해 말까지 뿌릴 수 있는 돈은 티 안나게 다 뿌렸기 때문이다. 그런 돈이 서울의 지역구에서는 수십억원대에 달한다. 그러나 자금 동원력이 변변치 않은 초·재선들은 지난해 말 일제히 열었던 후원회에서 자금을 확보해 공천 준비 자금으로 쓰고, 공천 후에는 중앙당 지원금과 지역 상공인들이 보태주는 자금으로 선거를 치른다.”

이 후보가 지난해 말 후원회에서 확보한 자금은 5억여원. 대외적으로는 2억원이라고 알렸다. 실제 행사장에서는 2억여원 정도만 모금되었다. 그러나 티 나게 돈을 전달하고 싶어하는 지역 상공인들은 후원회장에서 기부하지 않고 직접 찾아와 전달했다고 한다. 정치인에게 선거 자금 모금 방법과 총액을 가르쳐 달라는 것은 지나가는 여인에게 치마 속을 보여 달라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 후보의 주장대로라면 결국 자기는 치마 속을 보여준 셈이다.

그는 모금한 5억원을 올 들어 두달간 의정 보고대회를 여는 데 썼다. 통반 단위로 한번에 20명 안팎씩 모아 1백50여 차례 보고대회를 가진 것이다. 한번에 4백만원꼴로 드는 이 행사를 하루 평균 세 차례씩 열다 보니 5억원이 전부 들어갔다. 공천을 받은 후에는 실탄을 본격적으로 투입해야 했다. 각종 사랑방좌담회·여론조사·지구당개편대회에 든 비용만도 추가로 5억여원이었다. 그는 이 돈을 중앙당 지원금과 지역 상공인이 모아준 것으로 충당했다고만 설명할 뿐, 본격 선거전에 쓰려고 비축한 돈의 규모는 밝히지 않았다. 다만 여론조사에서 당선이 유력한 것으로 나오는 후보는 지역 상공인들이 자발적으로 기업체당 2천만∼3천만원씩 모아주는 것이 대도시 지역구의 관행이라고만 밝혔다.5억원 요구받은 단체장, 밤잠 설쳐

지역주의 선거가 고착화한 정치 현실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텃밭 지역에 출전하는 후보는 상대적으로 돈을 덜 쓰는 것도 사실이다. 공천장 자체가 당선을 사실상 보장하는 데다 해당 시·군·구 의원과 단체장을 총선 시기에 조직력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텃밭이라 해도 무소속의 도전이 거센 접전 지역은 역시 막대한 돈을 뿌리게 된다. 이와 관련해 호남 지역의 한 군수는 요즘 밤잠을 설치고 있다. 중앙당 공천을 받은 후보가 무소속 후보의 약진으로 고전하자 자금 동원까지 요구한 것. 그에게 할당된 선거 자금은 5억원. 이 단체장은 다음 지자체 선거 때 재공천받으려면 이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지만 재력가가 아니어서 돈 마련에 애를 태우고 있는 것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신인은 돈 쓰는 선거에서 더욱 쫓긴다. 공천장을 쥐고 지역구에 가보면 이미 재선 이상에 도전하는 상대 당 후보가 돈으로 표밭을 일궈 저만치 앞서가는 현실이 한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정치 개혁을 내걸고 뛰어든 신인들이 돈선거 격랑을 헤쳐나오지 못하고 휩쓸리는 현실에 대해 서울에 출전한 한 민주당 386세대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현행 선거법은 정치 신인에게 공정한 룰이 아니다. 현역에게는 유권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신인들에게는 법정 선거운동 전까지 발을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출마자 처지에서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초조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신인들도 은밀한 방법으로 사랑방좌담회를 열게 된다.”

그가 말하는 사랑방좌담회는 엄연히 불법이다. 그러나 현역 의원들은 선거법에 허용된 통상적인 지구당 활동을 빙자해 이른바 사랑방좌담회를 갖는 것이 관행이다. 이 자리는 바로 유권자에게 돈이 뿌려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의정 보고대회와 병행해 이루어지는 이런 좌담회 비용만도 후보에 따라 수억원이 든다. 손발이 묶여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신인 후보들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은 그 방법에 손을 대게 된다는 것이다.

신인들이 가장 많은 돈을 쓰는 것은 지구당 개편대회가 열릴 때이다. 새로 공천받았기 때문에 기존 의원이 움직이던 지역구 조잭책들을 끌어들이려면 막대한 자금을 뿌려야 한다. 인지도가 낮아 극적인 세 과시를 절실히 원하는 신인들의 다급한 심리를 잘 아는 지역구 조직책들은 지구당 개편대회가 열리는 한나절 동안 청중을 동원하는 데 평균 5천만원 이상 요구한다. 지역구 별로 대개 2천~3천 청중이 동원되고 있는데 한 사람당 1만5천원꼴로 일당이 지급된다. 여기에 별도로 행사 진행비만도 3천여만원이 소요되므로 개편대회 한번을 치르는 데 1억원은 족히 드는 셈이다.

조직책들을 일상적으로 부리는 데 지출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조직책은 동별로 동협의회장·부녀협의회장·청년협의회장 등 3명씩 하부 조직을 두고 있다. 한 사람의 일당은 대개 3일에 50만원꼴이다. 이 비용은 전국 어디서나 거의 ‘공시 가격’이다. 이들이 당원과 유권자를 만나 식사 접대 등으로 지출하는 비용은 별도로 후보가 내주어야 한다.

이밖에 여당 후보는 지역구 관내에 있는 각종 이익단체와 직능단체들에도 돈을 지급하고 있다. 서울의 한 여당 후보는 관내 택시연합회에서 천명을 동원할 수 있다고 하여 천만원을 주었고, 다른 직능단체들에도 비슷하게 돈을 전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그는 “선거 때마다 직능단체와 이익단체에 돈을 건넨 것은 과거 여당이 만들어낸 관행이지만 정권이 교체되었어도 이들을 동원하려면 돈을 안 줄 수가 없다”라고 실토했다.

이같은 돈선거판에서 각 후보들은 선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내고 있다. 여야 후보들의 자금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중앙당 지원금과 후원회 조직을 통한 모금, 그리고 지역내 기업들로부터 끌어들이는 자금이다.

중앙당 지원금의 경우 여당이 단연 유리하다. 지정기탁제는 폐지되었지만 지난해 말까지 집권당이 개최한 중앙당 후원회에는 적지 않은 자금이 몰렸다. 민주당에서는 이 비용으로 통상적인 당 운영비를 충당하기도 빠듯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번 선거 기간에 중앙당 지원금을 약 6백억원 내려보낼 계획인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에는 선관위 국고 보조금과 당비 등도 포함되어 있다. 민주당은 지금까지 후보를 낸 2백26개 지구당에 일괄적으로 1억1천만원을 내려보냈다고 한다. 후보 등록 기간에는 별도로 2천만원을 추가로 내려보낼 계획이다. 나머지는 전국의 각 후보를 당선 가능성에 따라 ABC 3등급으로 분류한 뒤 수천만원부터 수억원까지 차등 지급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밖에 당내 실력자와 중진 들이 수도권에 출전한 돈 없는 신인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있고, 기업인들도 연결해 주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나라당은 선거 자금 이야기만 나오면 빈털터리라고 하소연한다. 당이 공식으로 밝히는 선거 자금은 경상비 및 국고 보조금 1백20억원 가량의 나랏돈이 전부이다. 그러나 공천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실탄을 확보했다는 것이 당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그러나 이 돈으로는 전 지역구에 3천만원 정도밖에 지원할 수 없다며 돈가뭄을 호소한다. 그러나 한나라당도 수도권과 영남권 등에서 접전 지역에는 여당에 못지 않는 특별 지원금을 보낼 것이라고 한다. 여당의 제1당 욕심, 돈선거 부추겨

자민련 역시 후보자들에게 일괄적으로 2천만원 이상은 지원이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민국당은 창당 초 선거 자금 100억원을 모금할 계획이었지만 여의치 않아 애태우고 있다. 다만 보수파 중진들이 포진한 야 3당에는 재력가가 많고, 이들의 선거 자금 동원 노하우도 뛰어나 어떤 식으로든 실탄은 마련하리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런 실정에서 돈선거를 둘러싼 공방은 집권 민주당을 상대로 야 3당이 물고늘어지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자금 동원력 면에서나 실제 현장에서 벌어지는 돈 쓰는 선거 행태를 보더라도 이런 공방은 충분한 일리가 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부정선거감시단의 한 간부는 “신년 초부터 김대통령이 선거법 준수와 돈 안쓰는 공명 선거를 강조하는 대신 오직 집권당의 안정 의석만 강조하다 보니 밑으로 내려갈수록 다수 당을 만들기 위해 무리수라도 동원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갖게 되었다. 돈선거가 판을 치게 된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회창 총재는 이런 판단 아래 최근 공명 선거를 명분으로 김대통령에게 여야 영수회담을 제의하는 등 여권의 돈선거를 선거 전략으로 집중 부각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측은 곤혹스러워하면서도 김대통령이 최근 들어 공명 선거를 부쩍 독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한나라당이 과거 자신들이 집권하던 때를 기준으로 민주당 후보들을 터무니없이 매도하고 있다며 흑색 선전을 중지하라고 맞서고 있다. 돈선거 공방에서 수세에 설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과거 정권에 비하면 훨씬 덜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여야 모두가 공언해 왔듯이 유권자들에게 누가 더 정치 개혁에 걸맞는 정당인가를 놓고 겨루는 장이기도 하다. 그런 잣대는 선거전에서 각당이 내거는 이슈와 내세운 인물만이 아니라 후보들이 선거 과정에서 보여주는 실천적인 모습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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