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수학자의 사회’ 한국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9.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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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투자 우선 순위에서 뒷전… 적극 지원·우대하는 선진국과 대조적
‘세계 최고의 연구소들은 전산·정보 통신 분야는 물론 연구 분야에 관계없이 상당수 수학 박사들을 반드시 채용한다. 예를 들어 세계 최고의 통신 회사인 루슨트 테크놀러지는 연구원 중 20%가 수학자이다…. 수학에 투자되는 정부의 예산은 다른 인접 분야의 100분의 1도 안되는데, 심지어는 수학 분야의 존폐론·무용론까지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대한수학회장 김성기·한국정보과학회장 이경환, 그리고 서울대 수학과 교수 등 국내 수학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은 지난 5월19일 연명으로‘건의문’을 작성해 청와대에 전달했다. 이 건의문은 교육부가 추진하는 2천억원짜리 대규모 프로젝트 ‘두뇌 한국 21’에 관련된 것이었다. 건의문의 핵심 골자는 최근 교육부가 이 계획에 따라 육성키로 선정한 대상에 ‘정작 중요한’ 수학·환경과학 분야가 빠졌다며 이를 재고해 달라는 내용이다.

평소 큰소리 한번 내는 법 없이 묵묵히 연구에만 전념하던 수학계가 최근 이례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IMF 이후 기초 학문이 고사 위기를 맞고, 정부마저 수학을 투자(또는 지원) 우선 순위에서 제쳐두는 일이 발생하면서 수학계에 위기감이 고조된 것이다. 이들은 “수학은 건축물에 비유하자면 철근과 같은 것이다. 철근이 부족하면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지 않느냐”라며 걱정하고 있다.

“21세기는 수학이 본격 활약하는 무대”

미국 등 가까운 선진국의 움직임과 비교해 보면 국내 수학계의 이같은 위기감은 설득력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은 86년 레이건 대통령 시절 담화를 발표해 아예 ‘수학의 주(週)’를 제정·선포했다. 수학의 주는 올해 ‘수학의 달’로 확대 지정되었다. 이유는 단 하나. ‘수학은 의학·컴퓨터·우주 공학·무역·경제·국방 등 사회의 제반 분야에 필수 불가결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수학에 대한 미국 정부의 이같은 태도는 클린턴 행정부에도 이어져 클린턴 대통령은 97년 연두 교서를 통해 수학 교육에 대한 지원을 직접 약속하기도 했다.

수학 중시 풍토는 교육 과정에서 수학 과목을 단연 으뜸으로 치는 프랑스도 뒤지지 않는다. 최근 문화 비평가로 변신한 홍세화씨에 따르면, 프랑스에서는 이과 계통의 경우 수학의 배점이 영어의 3배에 이른다. 문과 계통에서도 수학 중시 경향은 마찬가지여서 그랑제콜(수재학교)에 입학하려면 우선 수학 실력이 뛰어나야 한다.

주요 선진국은 물론 국제 사회 전체로 볼 때에도 수학의 중요성은 점점 더 강조되고 있다. 유네스코(UNESCO)는 오는 2000년을 ‘세계 수학의 해’로 선포하고, 이를 위해 국제수학연맹이 주도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국내 수학계는 외화 내빈 상태에서 갈수록 과학 분야에서 설 땅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89년부터 유치 노력을 기울여온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가 오는 2000년 ‘세계 수학의 해’와 때를 맞추어 한국에서 열리기로 결정된 것은 ‘겉만 화려한’ 일면이다. 반면 ‘두뇌 한국 21’ 등 일련의 국책 사업에서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현상은 ‘수학의 약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징후이다.

수학자들은 수학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부가 가치를 뽑을 수 있는 지식 산업의 첨병’이라고 자부한다. 또 수학자들은 ‘21세기야말로 수학이 본격 활약할 무대’라고 장담한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20세기를 주도해온 중후장대형 산업은 21세기에 접어들면 정보·통신 등 이른바 ‘하이테크 산업’에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데 대체로 일치한다.

그런데도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투자다운 투자가 없을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에 한국의 수학자들은 고뇌하고 있다. 한 수학자는 “세상은 흥망성쇠가 반복되기 마련이므로 망할 수도 있다. 또 수학이 뒤떨어진다고 해서 당장 망하는 것도 아니다. 진짜 문제는 20년 혹은 30년 뒤 망했을 때가 문제다. 과연 그 때가 되면 재기할 수 있을 것인가. 정책 결정자들은 바로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보다 먼 장래를 내다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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