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군·전투경찰로 맞섰던 회사 동료의 사연
  • 광주·羅權一 주재기자 ()
  • 승인 2000.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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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과 전투경찰로 맞섰던 회사 동료의 기구한 인연
세월은 가끔씩 기막힌 우연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5.18뒤에 흐른 20년 역시 마찬가지아다.
광주은행 청원경찰로 일하는 김햑득씨(38)와 올해 초 은행을 퇴직한 김기용씨(42)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광주시 계림동 광주은행 서방출장서에서 함께 근무한 동료 직원이었다. 김기용씨는 과장으로, 김향득씨는 주임으로 날마다 한솥밥을 먹으며 지냈찌만, 서로 살아온 내력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광주 출신신 두 사람에게 특히 1980년 5ㆍ18당시 경험은 드러내놓고 말하기 힘든, 고통뿐인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살기위해 도망쳤다"

김향득씨는 5·18 항쟁 때 시민군으로 활동하다 구속된 전력 때문에 청경이라는 직업을 갖기 전까지 무려 스물두 번이나 입사 시험에서 미끄러지는 쓰라린 고초를 겪었다. 반면 당시 의무전투경찰로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와 맞섰던 김기용씨는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된 뒤로 혼자 가슴앓이를 해왔다.

올해 초 우연히 1980년 얘기를 꺼낸 두 사람은, 한쪽은 마지막까지 총을 들었던 시민군, 다른 한쪽은 시위대 진압 임무를 수행하던 전투경찰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시위대가 도청을 접수한 1980년 5월21일, 김향득씨는 ‘개선장군’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김기용씨는 ‘시위대에 잡히면 죽는다’는 절박감에서 방석복과 방석모를 내던지고 도망쳤다.

1980년 광주 대동고에 다니는 열여덟 살 학생이었던 김향득씨는 5·18 이전부터 고등학교 독서회를 이끌었던 ‘의식화 학생’이었다. 항쟁 직전에 열린 도청앞 민주화 성회와 횃불시위 때는 동료 고등학생들과 함께 앞장섰다. 항쟁 기간에 YWCA를 무대로 하여 <투사회보>를 배포한 김씨는 5월27일 계엄군이 도청에 진입할 때까지 YWCA에서 총을 들고 저항하다 붙잡혔다. 상무대 영창에 한 달 넘게 구금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김씨는 개머리판으로 구타당해 앞니 3개가 한꺼번에 부러졌고, 시멘트 바닥에 끌려 다니며 살점이 뜯기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목숨이 모진 것을 그때 알았다고 말하는 그는 지금도 그 날의 악몽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반면, 5·18 당시 스물둘의 나이로 전남대 경제학과를 휴학한 뒤 의무 전투경찰에 지원해 광주지역 제 1기동대원으로 복무하던 김기용씨의 경험담은 더 기막히다. 김씨에 따르면, 5·17과 5·18 직전의 민주화대성회와 횃불행진 때는 시위대에 끼어 있는 대학 친구·후배 들과 농담을 나눌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는데, 5·18 뒤부터 강경 진압 지시에 따라 시위대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불어난 시위 군중을 경찰력이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계엄군이 투입되었고, 그때부터 기동대원들은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과 살육을 마냥 지켜보는 ‘구경꾼’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김기용씨는 “계엄군은 도청 주변 건물로 들어가 젊은 사람이 눈에 띄면 무조건 야구 방망이 같은 긴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쳤다. 순식간에 같은 광주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비참하게 끌려가는 모습을 아무 힘없이 지켜봐야 했던 기동대원들의 심정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라고 울먹였다. 김씨는 계엄군이 퇴각한 21일 목숨을 걸고 도청 담을 넘어 광주시 주택가로 피신했고, 계엄군이 도청을 다시 장악한 27일 이후부터 기동대원으로 복귀했다. 김기용씨가 부대에 복귀할 즈음, 계엄군에 붙잡힌 김향득씨는 상무대 영창에서 무자비한 고문에 시달리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 해 5월, 상반된 처지에서 금남로 5·18 현장을 직접 경험한 두 사람은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만나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지금은 평범한 직장 동료의 인연을 넘어서는 절친한 선후배가 되었다.

20년 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얘기를 꺼낸 김기용씨는 “광주 시민이 연출한 5월 15·16일의 평화 시위와 20일에 벌어진 차량 시위의 장관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시 전투경찰 역시 시민군과 마음을 같이했던 사람들이자 5·18의 피해자들이었다”라고 말했다. 자신과 같은 처지였던 당시 전투경찰들도 이제 마음의 빚을 털어내야 한다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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