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과 싸우는 투자의 승부사들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1999.0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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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시장의 연금술사’ 펀드 매니저 24시
드림팀. 투자신탁 업계 최고의 연륜과 수탁고를 자랑하는 한국투자신탁 사람들은 98년 말까지도 박종규씨(42)와 김영일씨(36)를 묶어 이렇게 불렀다. 박씨는 운용2팀장이었고 김씨는 팀원이었다. 이들은 97∼98년 팀 성적 1위를 기록하는 등 한국투신의 간판 펀드 매니저로 활약했다.

이제 드림팀은 해체되었다. 박씨는 LG투신운용으로, 김씨는 미래에셋자산운용으로 각각 말을 갈아 탔다. 특히 억대 연봉을 받고 스카우트된 김씨 사례는 앞으로 펀드 매니저의 몸값을 올릴 기폭제가 될 전망이다.

뮤추얼 펀드 열풍 불어 몸값 급등

한국투신이 이들을 빼앗긴 데는 뮤추얼 펀드(증권투자회사, 일명 회사형 투자신탁) 열풍이 큰몫을 했다. 지난해 12월14일 미래에셋자산운용이 ‘박현주 펀드 1호’라는 일반인 대상 뮤추얼 펀드(1호는 기업 구조조정 기금)를 최초로 선보이면서 뮤추얼 펀드는 투자신탁 업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뮤추얼 펀드가 겨우 한달 만에 시중에서 ‘빨아들인’ 돈은 5천억원에 가깝다. 투신 운용사들이 2월까지 다투어 뮤추얼 펀드를 설정하고 있어 매각 목표량이 채워진다면 2조원 정도가 뮤추얼 펀드에 들어갈 수도 있다.

1월 중순 이후 600선이 무너지는 등 주식 시장이 큰 폭으로 조정되고 있어 열풍이 다소 가라앉았지만, 뮤추얼 펀드는 꾸준히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럴까. 몇 가지 요인이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한 자릿수 저금리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이다. 은행 등에서 대거 이탈한 시중의 돈이 주식 시장을 기웃거리고 있는 상황에서 뮤추얼 펀드라는 지금껏 보지 못한 간접 투자 상품이 때맞추어 출현했던 것이다. 간접 투자 열풍을 일으킨 뮤추얼 펀드는 펀드의 실명화로도 이어졌다. 이런 조짐은 달리 말해 펀드 매니저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흔히 자본 시장의 전사, 혹은 간접 투자 시대의 첨병으로 불리는 펀드 매니저(운용역)는 어떤 사람인가. 말 그대로 고객(계약자 또는 주주)이 맡긴 돈(펀드)을 주식·채권·파생 상품 등에 굴려 투자 수익을 되돌려주는 임무를 맡은 직업인이다. 주식·채권을 사고 싶지만, 아무래도 직접 투자가 부담스러운 투자자들이 전문가인 이들에게 자금 운용을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성실한 관리자 의무라는 이른바 ‘선관 의무’가 주어진다.

금융기관을 비롯해 큰 돈을 굴리는 기관에는 대개 펀드 매니저가 있다. 물론 펀드 매니저가 대거 포진하고 있는 곳은 투자신탁사와 투신운용 회사들이다. 이 곳에서 펀드 매니저는 영업을 하는 브로커, 투자 대상 기업과 장세를 분석하는 애널리스트와 함께 3대 축을 이룬다. 간접 투자 상품에 돈이 많이 몰릴수록 자본 시장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에는 펀드 매니저가 줄잡아 4백명 있다. 하지만 안정적으로 괜찮은 수익률을 기록해 유명세를 타는 펀드 매니저는 10%도 안된다.

박종규. LG투신운용의 주식운용팀장이다. 98년은 박씨의 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신한국80-3’이라는 펀드로 98년 최고의 펀드 매니저라는 영예를 안았다. 박씨는 지난해 주식형 수익 증권(추가형) 상위 15개 펀드에 6개를 올려놓아 기염을 토했다. 펀드 매니저 가운데는 채권과 파생 상품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이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펀드 매니저의 꽃은 주식 운용역들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널뛰기를 하는 위험 천만한 물건인 주식을 다루기 때문이다.

김영수(37). 대전에 있는 중앙투자신탁의 간판 펀드 매니저다. 지난해 샛별 1호라는 주식형 펀드(수익률 59.72%)를 운용한 그는 아슬아슬하게 1위 자리를 빼앗겼지만, 업계가 주목하는 스타로 떠올랐다.

투자 솜씨가 과감하다고 해서 ‘장대포’라는 별명을 얻은 국민투신운용의 장인환(40) 운영역도 빼놓을 수 없다. 장씨는 국민미래 3호 펀드(수익률 53.44%)로 정상급 펀드 매니저임을 재확인시켰다. 흔히 주식 편입 비율이 높은 펀드를 굴리는 펀드 매니저들의 성적은 종합주가지수 등락률에 비교된다. 지난해 종합주가지수는 45.91%나 올랐다. 그러나 이런 호기를 만나고도 주식 편입 비율이 70% 이상인 94개 펀드 가운데 지수 상승률 이상 수익을 낸 펀드는 10개에 그쳤다. 국민투신운용의 콜롬버스 주식 2호(마이너스 77.24%) 같은 펀드는 수익은커녕 원금마저 까먹었다. ‘인덱스 비트(주가 지수 이상의 성적)’는 모든 펀드 매니저의 영원한 숙제인 셈이다.

펀드 매니저들은 수익률에 울고 웃는다. 수익률에 대한 압박감은 98년 말 이후 더욱 심해졌다. 주식형 수익 증권을 파는 투자신탁사 3곳과 뮤추얼 펀드를 파는 투신운용사 간에 거대한 전선이 형성되면서 양측의 펀드 매니저들은 피를 말리는 수익률 경쟁을 벌이고 있다.

우선 수성에 나선 거대 조직의 세 투신사. 이들은 김석규 펀드·장동헌 펀드(한국투신), 손병오 펀드(대한투신), 장인환 펀드(국민투신운용)라는 간판 주자를 내세운 실명 펀드로 맞불을 놓았다. 이 펀드들은 엄연히 수익 증권이지만,‘뮤추얼 펀드형’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특히 장동헌 펀드는 ‘뮤추얼 펀드와의 수익률 게임을 선언한다’라는 자극적인 광고 문구를 내걸었다.

뮤추얼 펀드 운용 회사들은 박현주 펀드말고는 실명 펀드를 내놓지 않았지만 다이나믹(삼성투신운용), 트윈스챌린지(LG투신운용), 에머랄드(삼성생명투신운용), 장보고(동원투신운용) 등의 이름으로 싸움을 걸었다. 금융감독위원회으로부터 제재를 받고 발매 시점에 내놓았던 ‘목표 수익률 30%’라는 선전 문구를 거두어들였지만, 이들이 성과 보수를 내걸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가령 박현주 5호 펀드는 연간 수익률이 15%를 넘을 때 초과 수익의 20%를 성과 보수로 받을 예정이며 장보고 펀드는 수익률이 15%를 밑돌면 운용 보수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회사들이 이런 전략을 쓰지만 정작 운용 책임을 맡은 펀드 매니저들은 보수적인 속내를 내비친다. 2세대 펀드 매니저 사이에서 ‘대부’로 불리는 7년 경력의 베테랑 운용역 김석규 운용3팀장(39)은 “욕심이 크면 깨질 위험도 커진다”라고 잘라 말한다. 지난해 12월 이후 강세장에서 공격적으로 운용해 스폿 펀드(목표 수익률을 달성하면 그 즉시 결산하는 펀드) 10여 개를 조기 상환한 장동헌 운용1팀장(37)조차도 “펀드 매니저가 롱런하기 위해서는 수익률에 대한 욕심이 지나쳐서는 안된다”라고 말한다. 김영일 미래에셋 수석운용팀장은 아예 “열심히 할 뿐 다른 회사와 경쟁하지 않겠다”라고 못박는다.

잘 나가는 펀드 매니저들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펀드 매니저들이 수익률에 집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수익률에 지나치게 연연할 경우 우선 널뛰기하는 시황에 따라 일희 일비하게 된다. 하루에도 몇번씩 천당과 지옥을 왔다갔다할 수밖에 없다. 어떤 주식이 오르면 사고 싶고 보유 주식이 떨어지면 팔고 싶은 것은 전문가인 이들조차도 거부하기 힘든 절대적 유혹이다. 갖고 있는 주식이 상당히 오른 뒤에도 더 오르기를 기대하거나, 이미 상당히 떨어졌는데도 잃어버린 돈에 미련이 남아 팔지 못하는 것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심리다. 김영일 팀장은, 이 심리를 거슬러 반대 행동을 할 수 있는 노련한 펀드 매니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주가가 가파르게 오르는 종목에 이른바 ‘몰빵’(한 종목에 집중 투자)이라는 베팅을 한다면? 승률은 반이다. 운이 좋으면 시쳇말로 ‘대박’이 터진다. 반면 잘못되면 엄청나게 손해볼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도박이다. 대한투신이 간판 주자로 내세우는 5년 운용 경력의 손병오 차장은 “자기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고 시장을 뒤따라가다 보면 도리어 펀드 수익률이 엉망이 되기 일쑤이다”라고 말한다.

잘 나가는 펀드 매니저일수록 ‘꾸준히 괜찮은 수익률’을 목표로 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국민투신운용이 유망주로 키우고 있는 안영회씨(34)와, 저평가된 기업 발굴에 강점이 있다고 해서 ‘스나이퍼(저격수) 리’라는 별명을 얻은 대한투신의 이승호씨(35)는 각각 업계 5등 수준의 성적을 장기간 내거나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반짝 스타로 끝난 선배들을 많이 보았던 탓이다.냉정성·과단성·자기 통제 필수

스타 반열에 오른 펀드 매니저들이 한결같이 기본에 충실한 투자를 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다. 경력 7년인 삼성생명투신운용 우경정 주식운용팀장(39)은 “기업 내재 가치에 의거해 정석 투자를 하고 기업체를 방문하며 유망 종목을 발굴해 장기 투자를 하겠다”라고 강조한다.

결국 박종규 팀장의 주장처럼 운용 능력은 펀드 매니저와 운용 회사가 위험을 얼마나 줄이느냐에 달렸다. 사실 운용 회사마다 정도 차는 있지만, 높은 수익률을 노려 큰 위험을 감당하려는 펀드 매니저들은 얼마 못가 제동이 걸린다. ‘어항 속의 금붕어’라는 비유가 있을 정도로 펀드 매니저를 감시하는 장치가 많은 것이다.

유능한 펀드 매니저에게는 어떤 자질이 요구될까. 펀드 매니저 스스로 말하는 자질은 이렇다. 우선 고객 돈을 관리한다는 점에서 도덕성과 성실성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기본은 또 있다. 경제 지식이 많고 기업 분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 시장이 개방되었으므로 외국 시장을 훤히 들여다볼 능력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파생 상품 같은 첨단 기법으로 무장한 외국사 펀드 매니저들과 맞설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기질이나 성향도 성패를 가르는 요인이다. 냉정해야 장세를 신중하게 볼 수 있다. 운용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냉정하고 침착한 인상을 풍긴다. 과단성과 고집도 필요하다. 판단이 섰는데도 행동에 옮기지 못하거나 원칙을 견지하지 못하고 남의 말에 휘둘리면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없다. 유혹을 이겨내는 자기 통제 능력도 필수다.

물론 이런 자질을 상당히 갖춘 펀드 매니저들도 잘될 때보다 잘 안될 때가 더 많다. 김석규 팀장은 94년 11월 주가가 상투를 치고 빠질 때 미련을 버리지 못해 팔지 못한 뼈아픈 경험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김영일 팀장도 95년 석유화학주에 혼이 난 경험이 있다. 이 주식이 곤두박질치고 나서야 한꺼번에 매도 주문을 냈고, 자연히 순조롭게 팔릴 턱이 없어 주가가 더 폭락해 경솔하다는 지적을 받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이후 자신이 여러 경로로 확인한 정보에 따라 종목을 고르며 종목이 너무 올랐다 싶으면 미련 없이 판다. 이런 원칙을 어기면 어김없이 수익률이 나빠지고, 자기 스스로 원칙을 어겼다는 이중의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다.

펀드 매니저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주범은 시장이다. 원망스럽게도 시장은 예상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어디로 튈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늘 살 것이냐 팔 것이냐를 결정해야 한다. 베테랑들도 매매 시점을 언제로 잡을지 적잖이 망설이며 속을 끓인다. 게임의 법칙은 간단하다. 주식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면 된다. 그러나 이 단순해 보이는 일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수익·성취감 큰 만큼 스트레스 막심

이런 업무 성격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연륜이 많은 펀드 매니저들은 운동과 휴식, 낙관적 사고로 스트레스를 이겨내지만, 신참 펀드 매니저일수록 대개 스트레스 때문에 쩔쩔맨다. 신참 중에는 그날 산 주식이 폭락하거나 보유 주식이 떨어져 원금을 까먹을 때 잠을 못자는 사람이 많다. 꿈속에 시황판이 어른거리는 것은 대부분 겪는 현상이다. 펀드 매니저들에게 위장병이나 두통이 많은 것은 이런 고되고 긴장된 생활이 부른 직업병이다. ‘마이다스의 손(孫)’이라는 별명을 가진 손병오 차장도 지난해 두통과 현기증으로 병원 신세를 졌다.

대부분의 투신사들이 펀드 매니저들을 다른 부서 직원과 달리 대접하는 것도 아니다. 최근에야 한국투신을 필두로 회사 수익에 기여도가 높은 펀드 매니저에게 기존 연봉의 3배 이상 받을 수 있는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등의 방침이 나오는 참이다. 뮤추얼 펀드로 우수 인력을 계속 빼앗기자 문단속 차원에서도 ‘당근 전략’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성큼 다가선 펀드 매니저 시대. 펀드 매니저들은 자신을 알아 주는 세상을 만나고 있다. 그러나 이 선물에 대한 자격 조건은 혹독하다. 격심한 경쟁이다. 그동안은 성적이 신통치 않아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지만 이제는 어림도 없다. 누가 살아 남을 것인가. 일단 올해 말 99년 성적표가 나오면서 승자와 패자가 가려질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스타 탄생은 3∼5년 동안 꾸준히 좋은 수익률을 낸 펀드 매니저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때 가서야 한국의 펀드 매니저들이 발뒤꿈치라도 밟아 보고 싶다는 미국의 신화적인 펀드 매니저 피터 린치나 워렌 버핏이 한국에서 탄생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쳐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명예를 거머쥘 뿐더러 수억대 연봉을 받아 미국 월가의 스타 펀드 매니저처럼 청년 거부로 떠오를 수도 있다.

피 말리는 돈전쟁에 펀드 매니저들은 이미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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