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용후 핵연료 ‘외국 위탁 재처리’ 움직임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7.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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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미 국 ‘결사 반대’로 파문 예상
한반도에 또다시 ‘핵게임’이 시작되고 있다. 94년 10월 제네바 핵 합의에 이르기까지 수년간 계속되었던 한반도 핵게임의 2차전이 시작된 것이다. 1차 핵게임의 주인공은 ‘서울 불바다’ 어쩌고 하며 벼랑끝 전술을 시도했던 북한이다. 그러나 2차 핵게임에서는 주인공이 한국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서서히 재연되고 있는 한반도의 핵게임, 그 은밀한 징후들을 추적한다.

1차 핵게임 진원지가 북한 영변의 실험용 원자로였다면 2차 핵게임은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외국에 위탁해 보려는 한국 과학자들의 소망에서 촉발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최초로 드러난 것은 지난 2월17일이다. 이 날 원전 건설사의 산 증인이기도 한 한국전력 이종훈 사장은 “포화 상태에 이른 국내 사용후 핵연료를 외국에서 재처리해 들여오는 방안을 희망한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사장의 발언은 한 언론만이 짤막하게 보도했을 뿐 눈길을 끌지 못했다.

이사장 발언의 진의를 캐묻는 질문에 한국전력의 한 관계자는 “희망 사항을 말한 것일 뿐 구체적인 위탁 재처리 계획은 전혀 없다”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이러한 부인은 대만 핵쓰레기 북한 수출 문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대북 경수로 사업, 91년 12월 노태우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비핵화 선언 등을 감안해야 하는 정부 투자기관의 관계자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코제마사와 영국의 BNFL사 등 유수의 재처리 회사들은 한국의 위탁 재처리 가능성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추파를 던지고 있다(<시사저널> 제388호 ‘코제마’ 기사 참조).

한국이 위탁 재처리를 검토하게 된 배경은 국내 11개 원전에서 나오는 사용후 핵연료 보관 문제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이다. 고리 1호기의 경우 사용후 핵연료 저장조를 개조했는데도 포화 상태에 도달해, 사용후 핵연료를 고리 3호기의 저장조로 옮기고 있다. 중수로인 월성 1호기 역시 습식 저장조가 가득차 요즘에는 건식(乾式) 저장을 하고 있다. 99년쯤이면 국내 모든 원전의 저장조가 가득차게 되리라는 것이 한국전력의 전망이다.

따라서 99년 이후를 대비해 별도의 저장 시설을 따로 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를 위해 과기처는 안면도와 굴업도 등을 대상으로 저장조 건설을 검토했으나 지역 주민과 환경단체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이후 이 사업은 한전으로 이관되었으나, 대상 지역으로 거론되는 지역 주민의 계속된 거부로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대안으로 거론된 것이 바로 재처리이다.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하면 부피가 10분의 1 가까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핵연료를 얻는다는 장점이 있다. 때문에 국내 원자력 연구가들은 재처리 연구에 큰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재처리는 91년 12월 노태우 대통령이 ‘연구 목적의 재처리 시설을 포함해 어떠한 재처리 시설도 갖지 않겠다’고 한 한반도 비핵화 선언과 정면으로 배치한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핵게임 주도권 잡는 대통령의 리더십 절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비핵화 선언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이를 뒤엎는 새로운 선언을 발표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의 결사 반대에 부딪힐 것이 분명해 시도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지난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클린턴 후보와 공화당 돌 후보 모두 한반도 비핵화를 공약으로 내걸 만큼 미국의 의지는 매우 확고하다.

외국에 재처리를 위탁하겠다는 발상은 이런 사정 때문에 나온 것이다. 외국 위탁 재처리는 95년 일본이 시도한 바 있다. 지난 2월에는 독일 역시 프랑스에서 위탁 재처리한 핵연료를 들여간 적이 있어 한국도 외국에 위탁 재처리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위탁 재처리를 공론화하는 순간 남북한과 미국이 참여하는 2차 핵게임은 본격화할 전망이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일 나라는 미국이다. 한 소식통은 “70년대 미국으로부터 원자력 발전소를 제공받을 때 체결한 한·미 핵협정에 ‘미국 원자로를 공급받는 대신 한국은 핵확산 금지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는 조항이 있다. 미국은 위탁 재처리가 한·미 핵협정의 핵확산 금지 원칙에 위배된다며 반대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미국이 반대할 이유는 또 있다. 북한 영변의 핵시설에서 나온 사용후 핵연료를 대상으로 한 봉인 작업이 영향받을 수 있다는 논거를 들이대는 것이다.

좀더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할 것으로 보이는 쪽은 물론 북한이다. 이렇게 반대 의견이 많아질 경우 또 다른 문제가 파생할 수도 있다. 함남 신포에 건설될 예정인 경수로에서 나오는 방사성 폐기물과 사용후 핵연료는 누가 처리해야 하는가가 관심의 초점이 될 수 있다. 현재 이 문제는 전혀 타결되지 않은 채 숙제로 남아 있어, 북한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와 한국전력 간에 새로운 협상이 이루어져야 할 상황이다.

원자력 전문가들은 위탁 재처리를 주제로 한 2차 핵게임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국가 원수의 리더십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한 전문가는 북한이 ‘서울 불바다’ 운운하며 협박하고, 동해로 노동1호 미사일을 시험 발사한 것 같은 굳은 의지를 우리의 국가 지도자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원자력계 관계자들은 김영삼 대통령이 원자력 관련 행사에 거의 참석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미국과 북한이 제네바 핵 합의를 도출해 갈 때도 김대통령이 수수 방관까지는 아니었지만, 의견을 적극 개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주목하고 있다. 한 원자력 전문가는 “김대통령은 원자력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더구나 레임덕 현상이 극심해 올해에는 위탁 재처리 문제를 공론화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저장 시설이 곧 포화에 이르는 만큼 대선 예비 후보를 상대로 위탁 재처리 필요성을 알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일본의 핵 정책을 본받아야 한다”

또 다른 전문가는 2차 핵게임에서 북한과 미국이 공동 보조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며, 이러한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해 사전에 미국 조야를 상대로 한국의 원자력 정책이 매우 투명하게 진행되어 왔음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95년 일본이 프랑스에 위탁 재처리한 핵연료를 들여갈 때 반핵 단체들이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시위한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반핵운동이 거세지면 한국은 안팎으로 고립되어 위탁 재처리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온국민을 상대로 사전에 위탁 재처리가 꼭 필요한 것이고 또 안전하다는 점을 적극 홍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원자력 전문가들은 대부분 한국이 일본의 핵 정책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차대전 패전 국가이자 유일한 피폭 국가인 일본은 핵무기는 만들지도 보유하지도 사용하지도 않는다는 ‘비핵 3원칙’을 내걸고 투명한 핵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다. 그 결과 최첨단 원자로인 고속증식로를 포함해 모두 51기의 원전을 보유하게 되었다. 2차 대전 전승국만 보유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온 재처리 시설도 두 군데나 보유하게 되었다. 때문에 일본은 핵무기가 없음에도 국제 무대에서 핵무기를 가진 것과 같은 효과를 얻고 있다. 한국도 국제 무대에서 이러한 지위를 획득할 수 있을까. 그 첫 시험대는 위탁 재처리 성사 여부를 둘러싼 2차 핵게임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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