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혼에 점령된 ‘불구 신도시’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7.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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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유통 매장 늘어 ‘소비 마을’로 전락… 자족 능력·문화 공간 태부족
대낮의 신도시는 여성 천국이다. 길 가는 사람 열 가운데 여덟은 여성이다. 외지 사람이라면 전설 속의 여인 왕국 아마존을 떠올리게 될 만큼 낯선 풍경이다.

오후 2시. 일산 뉴코아 백화점. 자유로에서 일산 신도시로 접어드는 초입에 있는 이 백화점에는 자가용이나 셔틀 버스를 탄 ‘아마조네스’들이 속속 입장하고 있었다.

한밤의 신도시는 또 다른 낯선 풍경이다. 신도시의 밤거리에서 돋보이는 건물은 단연 창고형 할인 매장이다. ‘에브리데이 로 프라이스(everyday low price)’ 정책을 구현하는 이들 매장은 은은한 조명 속에서 매머드 빌딩의 위용을 자랑한다.

백화점 또는 창고형 할인 매장. 이는 신도시의 현주소를 나타내는 키 워드이다. 수도권 5대 신도시(분당·산본·일산·중동·평촌) 주민을 상대로 한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들이 그 실마리를 던져 주었다. 신도시가 서울의 위성 도시로 전락하고 있다는 잇단 비판 속에서도 신도시 주민들의 주거 만족도는 점차 높아가고 있다. 지난 2월4일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이 5대 신도시 20세 이상 주민 천 명을 상대로 벌인 공동 여론조사에서 조사 대상자의 67.4%는 신도시가 서울보다 살기 좋다고 응답했다.

재미있는 것은 서울보다 신도시가 살기 좋은 이유로 ‘쇼핑 시설이 편리하고 좋다’를 꼽은 응답자가 5.5%에 달했다는 사실이다. ‘공기가 좋고 공해가 적다’(54.0%) ‘교통이 편리하다’(21.2%) ‘공원·녹지 등 휴식 공간이 많다’(5.7%)에 이어 편리한 쇼핑 시설을 서울보다 살기 좋은 네 번째 이유로 꼽은 것이다.

3년 전만 해도 쇼핑 시설은 신도시 주민들의 대표적인 불만 대상이었다. 94년 8월 한국토지개발공사가 신도시 주민 3천10 가구를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이를 반증한다. 당시 신도시 주민들은 가장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시설로 교통·의료 시설에 이어 유통·판매 시설(20.2%)을 꼽았다.

상황은 지난해부터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94년 12월 평촌에 뉴코아 백화점이 들어선 것이 신호탄이었다. 그후 겨우 2년 남짓에 백화점·창고형 매장 같은 대형 유통 시설이 16개소로 늘어났다(56쪽 표 참조). 뿐만 아니다. 올해와 내년 사이 13개 매장이 문을 열 예정이다. 30여 개 대형 유통 시설이 신도시 지역 주민 백만여 명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 것이다.서울에서도 쇼핑객 몰려와

대형 유통 시설은 도시의 모습 또한 빠르게 바꿔놓고 있다. 서울 마포구에 사는 ㄱ씨(31)는 얼마전 일산의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저녁거리를 사러 가자는 ㄱ씨의 제안에 친구가 자동차 열쇠를 들고 따라 나섰기 때문이다. 그날의 저녁 메뉴는 매운탕. 생선은 냉장고에 이미 준비되어 있어 쑥갓·두부 같은 간단한 재료만 사오면 되는 상황이었다. ‘쑥갓 사러 가는데 웬 자동차?’ ㄱ씨의 의문은 곧 풀렸다. 인근에 창고형 할인 매장이 생기자 아파트 상가내 슈퍼마켓이 아예 야채를 갖다 놓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경기개발연구원은 최근 발표한 연구 보고서에서 신도시 지역 구매·유통 시설의 대형화·복합화가 주변 재래 상권과 중소 상점들의 침체 및 근린 상가의 공동화 현상을 낳고 있다고 분석했다(<신도시 기능 정상화를 위한 과제와 전망>, 96년 10월). 이들 중소 상가는 대형 유통 업체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다양한 물품을 한 장소에서 살 수 있는 시너지(공동 상승) 효과의 이점을 최대한 구현하는 대규모 유통 업체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변화의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대형 유통 시설 그 자체는 신도시 주민들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앞서 지적한 대로 이들 시설은 주민들의 주거 만족도를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1∼2년 전만 해도 생필품을 사기 위해 서울로 나가야 했던 주민들을 신도시 안에 묶어 둠으로써 서울과 신도시 사이 교통량을 줄이는 효과도 낳고 있다. 경기개발연구원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신도시 주민의 82.7%가 생활 용품을 신도시 안에서 구입한다. 심지어 신도시 주민들이 가장 큰 불만으로 생각하는 대중 교통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대형 유통 업체가 한몫을 하고 있다. 신도시 안에서는 시내 버스보다 이들 업체가 운영하는 버스가 더 많이 눈에 띈다. 일산 뉴코아 백화점의 경우 노선 별로 셔틀 버스 12대를 운행하고 있다. 무료인데다 아파트 바로 앞에서 타고 내릴 수 있으므로 주민 대부분이 백화점에 가지 않을 때도 셔틀 버스를 즐겨 이용한다는 것이 지역 주민 양인자씨(26)의 말이다.

일부에서는 이들 업체가 신도시를 유통 도시로 성장시키는 거점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나오고 있다. 최근 들어 외지 고객의 비율이 늘면서 그같은 기대는 더 높아지고 있다. 신도시에서 서울로 쇼핑을 나가던 과거와 달리 서울에서 신도시를 찾는 ‘역류 현상’이 생겨나고 있는 까닭이다.

일산의 창고형 할인 매장 ‘까르푸’에서 만난 한 30대 주부는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서 왔다고 했다. 자유로를 타고 막히지만 않으면 2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데다, 서울의 창고형 매장보다 주차장이나 쇼핑 공간이 훨씬 넓어 이곳을 애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천 대를 동시 수용할 수 있다는 이 업체 주차장에는 10대에 1대꼴로 서울 번호판을 단 차량이 눈에 띈다. 유통 업체 관계자들은 하루 평균 구매 고객의 10∼15%가 신도시 외부 지역에서 왔을 것으로 추산한다.공공기관 시설 유치도 미비

그러나 이같은 기대에 대해 조명래 교수(단국대·지역개발)는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단기적으로는 이들 업체가 지방자치단체의 세수를 늘리고 인근 부동산 가격을 올리는 데 기여할지 몰라도, 그 자체로 건전한 지역 생산 기반을 가져오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곧 인력 절감 방식으로 운영하는 업태인 만큼 고용 효과가 미미할 뿐더러, 납품 회사들도 신도시 안에 있지 않으므로 자본 순환이라는 측면에서도 부수적인 생산 유발 효과는 없으리라는 것이 조교수의 진단이다.

이같은 한계는 신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과 직결된다. 그 첫 번째는, 생산과 소비 기능 사이의 불일치이다. 신도시에는 일자리가 없다. 일산에 이사온 지 3년째라는 일산문화센터 직원 정동선씨(26)는 “재작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일산 안에서 직장을 구하려 했더니 학원 강사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경기개발연구원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90∼95년에 5대 신도시 인구는 76%가 증가한 반면 고용자 수는 30%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족 기능이 없는 것이다. 원래 5대 신도시가 제조업체에 기반을 둔 산업 도시로 설계된 것은 아니었다. 대신 신도시는 수도권 공공기관을 적극 유치함으로써 자족 기반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상당수 시설은 유치가 아예 취소되거나 계획만 잡아놓고 사업 추진을 미룬 상태이다. 분당의 경우 원래 유치하려던 공공기관 16개 가운데 여섯 기관이 이전을 포기했다. 즉 일자리는 점점 줄어드는데 대형 유통 매장은 고객으로 넘쳐나는 형국이다.

두 번째 파행성은 소비 기능 사이의 불일치에서 드러난다. 일산에 사는 허영심씨(39)는 “주말이 되면 쇼핑을 가거나 외식을 하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다”라고 말했다. 소비 욕구는 구매뿐 아니라 문화 서비스에 대한 욕구를 포함한다. 그러나 5대 신도시를 통틀어 극장 하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대형 유통 업체와 외식 업소가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산 신도시와 외곽 지역을 포함하는 경기도 고양시의 경우 96년 말 일반 음식점은 4천5백23개소. 1년 전 같은 기간(2천3백82개소)에 비해 배 가까이 늘었다. 문화계 인사들이 신도시의 문화 정체성 확립에 나서고 있는 것은 이같은 현실 앞에 절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이같은 신도시의 파행성은 부족한 도시 설계 경험이 낳은 필연적 결과라고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기호 교수(도시설계)는 지적했다. 처음부터 결과 뻔했던 2백만 호 건설

신도시 건설 계획 자체가 가진 근본적인 결함에서 이 모든 문제는 출발한다. 오늘날의 신도시를 탄생시킨 주택 2백만 호 건설 계획은 집값 폭등에 따른 민심 이반을 우려한 6공 정권의 정치적 이해와 건설 자본의 요구가 맞아떨어져 시작된 것이었다. 정치 논리에서 출발하고 밀어붙인 이 계획에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주택 정책이 끼여들 여지는 애당초 없었다. 계획이 수립된 89년 당시 한국이 축적하고 있던 대단위 주거 단지 설계 경험이란 지극히 미미했다. 60년대 마포아파트, 70년대 반포·잠실 단지, 80년대 목동·상계동 신시가지를 설계한 경험 정도가 고작이었다. 더구나 신도시 설계 노하우란 아예 없다시피 했다. 몇 만 세대가 살 ‘주거 단지’를 설계하던 노하우로 몇 십만 세대가 살 ‘신도시’를 설계했다면 처음부터 결과는 뻔했다.

이에 따른 오류는 토지 이용 계획에서부터 드러났다. 처음부터 상업 용지가 주거 용지에 비해 과다하게 책정되었다. 외국 신도시는 인접 도시와의 연계 기능과 전체 용지 면적 등을 따져 탄력적으로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에 반해 한국의 5대 신도시는 주택 용지 34.4%, 상업·업무 용지 7.7%, 공공 업무 용지 57.9%에 거의 근접한 비율로 토지 이용 계획이 획일적이었다고, 앞서의 경기개발연구원 보고서는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는 제도적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 정부의 재정 투자가 한푼도 없는 상태에서 오직 선분양을 해서 개발 자금을 확보해야 했던 한국토지개발공사는 상업 용지를 더 많이 책정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고자 했다. 상업 용지는 아파트 및 공공시설 용지에 비해 최대 10~12배 높은 값으로 분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침대 도시’에서 소비 도시로

그러다 보니 상업·업무 용지가 남아도는 사태가 빚어졌다. 96년 10월 현재 5대 신도시 상업·업무 용지 분양률은 전체 면적의 절반 정도인 50.4%에 머물렀다. 분양 업무를 맡은 한국토지개발공사에는 비상이 걸렸다. 대형 유통 시설에 부지를 매각하는 것은 뾰족한 분양책을 찾기 위해 고심하던 한국토지개발공사가 내놓은 궁여지책이었다. 여기에 신도시 소비 시장의 성숙을 노리던 유통 업체들의 이해 관계, 시장 개방에 따른 외국 유통 업체의 국내 진출 따위 정세가 맞아떨어졌다.

주택 2백만 호 동시 건설이라는 사상 유례 없는 ‘도박’의 부작용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다양한 양상으로 신도시를 압박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속속 생겨나는 대형 유통 매장은 ‘절름발이 신도시’를 상징하는 거대 구조물이다. ‘자족 기능을 갖춘 전원 도시’라는 애초의 취지가 무색하게 수도권 신도시들은 ‘침대 도시’(bed town)에서 ‘소비 도시’로, 다시 그 파행의 단계를 옮겨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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