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망가뜨린 검은 음모자 있는가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7.0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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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근 측근의 ‘배후설 증언’과 청와대 시각 분석
한보그룹 정태수 총회장은 왜 마지막 순간까지‘한보를 흔드는 배후’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이런 판단은 옳은 것이었을까. 이는 한보가 무너지기 직전 정씨가 보였던 미심쩍은 행동뿐만 아니라 검찰 수사 과정에서 보일 수도 있는 예기치 않은 그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

실제로 정씨는 붕괴 직전 자기가 가진 주식을 채권 은행들에 넘기기를 거부했다. 부도 처리된 직후인 1월25일에는 SBS 인터뷰에서 ‘한보를 흔드는 배후가 있으며, 한보철강이 다른 기업에 넘어갈 때 그 배후가 드러날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또 그와 가까웠던 인사들에 따르면, 마지막 순간 그는 일부 정치권 인사와 접촉하려 시도했으며, 이 노력이 좌절되자 정치인들에 대한 불만을 서슴없이 털어놓았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한보, 현대·삼성·LG 의심

정씨가, 정부가 의도적으로 한보를 부도내려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 것은 1월18일‘은행 관리 후 제3자 인수’라는 정부 방침이 한 언론에 기사화하면서였다. 부도 이후에도 정보근 회장과 접촉했던 한 인사는 “유원그룹과 우성그룹처럼 회사가 무너지고 나서 제3자 인수를 추진하는 게 상식인데, 이건 앞뒤가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라고 주장했다. 정부가 한보를 다른 기업에 넘긴다는 방침을 이미 정하고 이를 언론에 흘렸다고 정씨가 판단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은행이 부도 처리하기 시작한 1월23일 오후 갑자기 생각을 바꾸어 주식을 넘기려고 한 정씨 일가는 그때까지만 해도 약간의 희망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청와대 고위 관계자에게 한보 처리 방향을 간접 확인했는데, 당시 이 관계자는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국제처럼 공중 분해한다’는 확고 부동한 입장을 밝혔다(이 표현은 이튿날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정씨 일가가 배후설을 더욱 굳게 믿게 된 계기였다. 발설자가 그동안 한보그룹이 배후라고 지목했던 청와대 내의 경복고 출신 수석 비서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정씨는 줄곧 청와대 내의 이 인맥이 역시 경복고 출신인 정몽구씨가 회장으로 있는 현대그룹에 한보를 넘기려 한다는 피해 의식에 시달려 왔다.그는 지난해 하반기 한보 자금악화설을 퍼뜨린 장본인이 현대며, 현대의 제철소 진입 문제가 보류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부도 직전까지 정보근 회장과 자주 접촉했던 또 다른 관계자는, 지금은 다들 한보를 인수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곧 상황이 바뀔 것이라며, 한보로서는 배후를 의심할 만한 정황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보근 회장의 이런 생각이 옳았던 것이냐에 대해서는 그의 주변에서조차 의견이 엇갈린다. 부도 직후 정회장을 만났던 앞서의 측근은 “지난해부터 어디서 들었는지 정회장은 계속해서 잘못된 정보를 받아들였고, 그래서 잘못 대응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현대는 한보 부도 직후 인수할 뜻이 없다고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이는 현대그룹이 제철소 건립과 관련해 고로 방식을 고집하면서 정부와 마찰을 빚었던 데서도 확인된다. 지난해 현대그룹이 고로 제철소 건립을 주장하기 위해 작성·배포한 <일관제철소 건설의 타당성>이라는 60쪽 분량 자료에는, 한보가 채택한 전기로와 용융환원법(COREX법)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상세하게 나와 있다. 한마디로 현재 상황에서는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13쪽 상자 기사 참조). 물론 금융 및 세제 지원이 있을 경우 인수하는 상황을 가정할 수도 있으나, 국내외 여론을 의식한다면 이 또한 쉽지 않은 실정이다.

검찰 수사가 개시된 이후 정씨는 삼성과 LG 그룹이 배후였을 가능성 역시 염두에 두었던 듯하다. 삼성의 경우 오래 전부터 제철업 진출에 관심을 가져온 데다가, 한 외국 증권사가 보고서를 통해 이 회사가 한보철강을 인수할 유력한 업체라고 거론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삼성그룹측은, 한보철강과 관련해 각종 정보를 종합해본 적은 있으나, 이는 이 회사를 다른 재벌 누가 가져가든 재벌의 판도 자체가 바뀐다는 차원에서 한 것이지 인수할 의사는 결코 없다는 점을 분명히하고 있다.

LG그룹에 관한 오해는 지난 1월28일 LG그룹 회장비서실 관계자들이 청와대를 방문한 일에서 말미암았다. 이에 관한 청와대 경제 수석실 관계자의 말은 좀더 구체적이다.“지난해 임원 인사(人事) 후 인사를 못했다며 그 쪽(LG)에서 방문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묘한 시기여서 오해라도 있으면 안되겠기에 1분도 채 안돼 돌려보냈다.”

정씨가 마지막까지 주식을 넘길 수 없다고 버텼던 것은 자신이 51% 이하 지분을 소유한 회사는 자기 회사로 치지도 않는 특유의 소유욕 때문이었다. 정보근 회장은 이와 생각이 약간 달랐는데, 부도 직후 나온 그의‘무소유 경영’방침이 좋은 예였다. 이는 경영권은 빼앗겨도 재산권은 포기 못한다는 아버지의 생각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정씨는 아들의 발언에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마지막 순간 정씨의 고집은 한보 사태를 지극히 정치적인 사안으로 이해한 데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그는 이번 일을 정치권 실세들 간의 힘겨루기 산물로 보았는데, 경복고 출신 청와대 수석을 중심으로 한 관료와 은행권이 부도를 주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한보에 비교적 우호적이던 일부 정치인들이 수세에 몰렸다는 시각이다. 수서나 비자금 사건 때처럼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 수 있다고 보았다는 얘기다.

부도를 전후해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에 따르면, 부도 직후 정씨가 평소 친분이 있던 정치인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평소 대통령의 뜻까지 거론하며 걱정 말라던 이들은 막상 상황이 다급하자 발을 뺐는데, 정씨가 느끼는 배신감의 진원지 역시 이것이다. 정씨가 정치권에 대해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언론에 자신의 목을 조른 청와대 내 일부 인사들이 로비 대상자로 지목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도 이해를 못하고 있다. <시사저널>과 접촉했던 정보근 회장의 한 측근은 그 이유를 오히려 되묻기도 했다.

이런 피해 의식 때문에 정씨는 오판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이 여신 한도액을 넘겨 가면서까지 돈을 빌려 줬으나, 희망이 없다고 판단해 부도 처리했다. 한보철강이 막대한 돈을 끌어들인 과정에 대해서는 의혹이 있지만, 부도 처리 과정에야 무슨 의혹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한 청와대 관계자의 말이다. 한보를 살리느냐 하는 문제는 당진제철소가 완전 가동된 뒤 회생할 가능성이 있느냐는 경제적 판단이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는 설명이다.“한보는 청와대 뜻을 왜곡·악용했다”

이같은 판단을 주도한 것은 애당초 설비 자금을 대출해준 산업은행. 이 은행은 97년 한보철강의 매출액이 1조5천억원 가량이 되겠지만, 드러난 금융 비용만 6천억원이 되어 도저히 회생하기 불가능하다고 보았다(산은은 이런 내용을 담은 보고서의 존재를 부인했다). 산은에 대한 정씨의 앙심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는 SBS와 가진 인터뷰에서 산은이 약속한 3천억원을 지원해 주지 않아 일을 그르쳤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보를 살리려는 청와대의 의지라고 금융권이 받아들였다는 지난해 연말 이후 두 차례 추가 지원에 대해서도 청와대와 한보의 시각은 엇갈린다. 청와대는 한보그룹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단 지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기는 했으나, 정씨가 이를 악용해 여러 은행에 청와대가 한보를 도와주기로 했다는 식으로 진의를 왜곡했다고 주장한다(12쪽 상자 기사 참조). 한 은행에 가서는 다른 은행이 얼마를 지원하기로 했다고 얘기하고, 다른 데서는 거꾸로 얘기하곤 했다는 것이다.

청와대에서는 지난해 연말 이후 채권 은행들이 지원한 금액이 실제로는 정씨가 주장하는 5천4백억에 훨씬 못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정치권에 기대어 성장한 정씨는 부도라는 지극히 경제적인 사안까지 정치적으로 이해했고, 또 그렇게 풀려다 망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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