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거유 박효수옹 유림장
  • 부산/박병출 (pbc@sisapress.com)
  • 승인 1997.01.3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태산보다 높은 이름 바다보다 깊은 학문, 어화 어화 어화 넘차 어화, 티끌같이 두고 가네 북망산천 넘어가네, 어화 어화 어화 넘차 어화….’

선소리꾼의 구성진 북망가가 몇번이나 되풀이되도록 대거(大車·상여)는 주춤주춤 제자리걸음만 했다. 명정(銘旌)잡이를 이끌고 동구를 벗어난 방상시(方相氏·잡귀를 쫓는 도깨비탈)가 고삿골(高師谷) 쪽으로 꺾어든 지 한참이 지나서야, 만장(輓章) 행렬의 꼬리가 상가를 빠져나갔다. 이윽고 가마복(加麻服·두건 위에 삼끈을 두른 차림)을 한 유생(儒生) 백여 명이 공포(功布·상여에 연결한 삼베끈)를 부여잡은 채 상여를 뒤따른다. 그제서야 상두꾼들의 다리에 힘이 실리고, 선소리꾼의 가락도 한 음 높아진다. 다시 유생·상제·친지 등 수백 명이 상여 뒤를 따른다.

지난 1월14일 경북 청도군 신촌리에서 영남의 거유(巨儒) 인암(忍菴) 박효수(朴孝秀) 선생(91) 장례식이 유월장(踰月葬)으로 치러졌다. 유월장은 초상난 달의 그믐을 넘겨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인암 선생은 지난 12월31일(음력 11월21일) 타계해 15일 만에 출상했다.

일생을 성리학 연구와 후학을 기르는 데 바친 큰 선비의 마지막 가는 길답게, 상가는 보름 내내 문상객으로 붐볐다. 상복 차림으로 유족과 함께 상여를 따른 제자만도 2백여 명, 천여 조문객이 그 뒤를 이었다. 2백개 가까운 만장이 바람에 나부끼면서, 장례 행렬은 마치 거대한 용처럼 꿈틀거렸다.

효성과 검소한 행실 널리 알려져

이번 장례식은 사라져 가는 유교의 전통 의식을 볼 모처럼의 기회인 데다, 전국 규모 유림장(儒林葬)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관심을 모았다. 유월장부터가 복잡한 절차에 막대한 비용과 상제들의 고통이 뒤따른다. 타계한 날짜에 따라서는, 장례 기간이 꼬박 한 달이 될 수도 있다. 제자들이 봉행하는 문인장(門人葬)이나 가족장과 달리, 유림이 장례 절차를 결정해 주관하는 유림장은 기준이 엄격해 예가 더 드물다. 근년에 와서는, 79년 1월 경남 산청에서 중재(重齋) 김 황 선생(성리학자), 88년 1월 경남 합천에서 추연(秋淵) 권용현 선생(성리학자), 93년 3월 경남 창녕에서 회정(晦亭) 이종민 선생(성리학자), 94년 2월 경남 진주에서 농산(濃山) 이병렬 선생(서예가)의 유월장이 유림장으로 치러졌을 뿐이다. 추연 선생 이후 매번 ‘이 시대 마지막’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을 정도로, 영남 일원에서 겨우 맥을 잇고 있다.

그나마 최근의 두 차례는 지역 유림이 주관한 ‘향유장(鄕儒葬)’이어서, 전국 규모의 유림장(국유장)과 구별된다. 국유장을 위해서는 신문 공고 등을 통해 전국에 유림회의 개좌(開座)를 알리고, 그 자리에서 유림장 여부와 고인에게 합당한 예우를 결정한다.

이번 경우는, 평소 번거로움을 멀리한 고인의 뜻을 받들어 따로 공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례 전날 열린 유림회의에는 안동·상주 등 경북 지역은 물론 부산·경남과 대구·대전·강원 등지에서 백여 유림이 참석해, 격식에서는 향유장에, 내용에서는 국유장에 가까웠다.인암 선생은 기호학파의 태두 우암(尤庵) 송시열 선생의 6대손인 문간공(文簡公) 송치규 선생으로부터 고산(鼓山) 임헌회­간재(艮齋) 전 우­덕천(悳泉) 성기운으로 내려온 기호학파의 학통을 물려받았다. 우암의 9대손인 한말 거유 문충공(文忠公) 송병선의 학맥을 이은 추연 권용현과 같은 뿌리이다. 그러나 영남 지방의 기호학파는 근래 들어 종조(宗祖) 격인 율곡(栗谷) 이 이, 귀봉(龜峰) 송익필, 우계(牛溪) 성 혼 3인 중 율곡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따르고 퇴계(退溪) 이 황을 배척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연원(淵源)학파라고 자칭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생전에 2백여 제자를 양성한 인암 선생은, ‘효(孝)’와 ‘화(和)’를 학훈으로 삼았다. 30여 년 전 부친상 때는 석 달이 넘도록 머리를 감지 않고 죽으로 연명해, 유림 대표들이 모여 밥을 들도록 권유할 정도였다. 이름에 들어 있는 ‘효(孝)’자를, 그 도리를 다 실천하지 못했다 하여 ‘효도 효’가 아닌 ‘이을 효’의 뜻으로만 썼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그의 명망이 더욱 널리 알려진 것은, 높은 학문과 함께 검약을 실천하며 구휼에 힘썼다는 점에서이다. 청빈한 선비 가문으로 대를 이었으나, 선생은 의약서도 두루 깨우쳐 한약방을 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약값을 받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돈이 들어오면 ‘사람이 사는 데는 하루 세 줌의 쌀만 있으면 된다’하여 유림의 큰 일이나 어려운 친지들에게 내놓았다.

장례식 역시 규모는 컸지만 검소하게 치러졌다. 각처 유림에서 들어온 만시(輓詩)만 해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붉은 색이나 청색 만장 대신 흰색 한지에 썼다. 부친의 3년상 후에도 죄인이라고 자처하며 평생 흰옷으로 지낸 선생의 뜻과 검약 정신을 따른 것이다. 조문객이 미리 만들어 온 경우 역시 대개는 옅은 바탕색을 사용한 것들이었다. 상여도 삼색 지화(紙花) 대신 흰꽃을 주로 썼다.

보도진은 ‘그림’이 기대에 못미쳐 실망하는 모습들이었다. 상가에는 발인하기 4~5일 전부터 취재진이 몰렸다. 장례식 전날에는 취재 기자만 백명을 넘어섰다. 거기에 전국의 사진가와 아마추어 동호인까지 가세해, ‘전국의 카메라가 청도에 다 모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장의 절차 논의하는 유림회의 공개

이런 북새통이 벌어진 것은, 이번 유월장이야말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으로 풀이된다. 유월장은 중국의 한(漢)·당(唐) 시대에 대부(大夫)는 3월장, 사(士·하급 관리)는 유월장을 치르도록 한 데서 유래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엽에 들어와 조선 중기에는 선비들도 3월장을 행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유림의 전통은 5일장과 3일장을 강요한 일제 치하에서도 명맥이 끊이지 않았다. 80대 이상 원로 한학자들이 10여 명이나 생존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아직도 유월장이 몇 차례 더 행해질 것으로 보인다.

거의 10년 만에 전국 규모 유림장이 치러지면서, 장의 절차와 고인에 대한 예우를 결정하는 유림회의도 공개로 진행되어 눈길을 모았다. 1월13일 오후 인암 선생이 생전에 제자들을 가르치던 척첨당에서 열린 유림회의는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결정된 사항은 장례식을 유림장으로 행하고 고인을 ‘선생(先生)으로 추재(推載)’한다는 것과, 장의를 ‘인암 선생 박공(朴公) 양례식(襄禮式)’으로 명한다는 세 가지. 벼슬하지 않은 선비는, 사후에 처사(處士)나 학생(學生)이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인암의 학문을 높이 평가해 처사가 아니라 선생으로 예우하기로 한 것이다.

유월장이 번거롭기만 할 뿐이라는 지적에 대해 한학자 안동우씨(71·대구 달서구 월성동)는 “유월장은 숨을 거둔 부모나 스승을 금방 매장하지 않고 소생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후손의 도리와 효심을 뜻하는 것이다. 범절은 간소화하더라도 그 정신이 퇴색해서는 안된다”라고 강조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