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공간에 수갑 채우는 권력의 횡포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6.1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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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통신 사용자 구속·통신망 폐쇄 잇달아…‘검열’ 반대 여론 들끓어
윤아무개씨(27)가 지난 10월30일 서울경찰청 보안수사대에 연행된 때는 입사 원서를 내고 막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 윤씨와 그의 가족은 가슴이 철렁했다. 윤씨가 대학 시절 ‘전력’을 2개나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89년 불온 서클 가입(국가보안법)과 91년 민자당사 점거 농성(특수공무집행방해)이 그것이었다. 올 여름 뒤늦게 ㅅ대 사학과를 졸업한 윤씨는 최근 들어 취업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윤씨의 혐의는 국가보안법 위반(반국가단체 고무·찬양)이었다. 그러나 수사관이나 윤씨 모두 이번 사건 조사에 애를 먹었다. 그가 ‘범죄’를 저지른 곳이 현실 아닌 가상 공간(사이버 스페이스)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9월19일 PC통신에 ‘그들이 무장 간첩일까?’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던 것이 화근이었다. 윤씨에 이어 통신인 5∼6명도 비슷한 혐의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 중 2명은 구속(윤씨 포함), 2명은 불구속 처리되고 나머지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들이 구속된 사건은 잠시 소강 상태이던 ‘통신 검열 철폐 운동’에 불을 붙였다. 지난 8월29일 한총련의 전용 정보통신망이 강제 폐쇄된 뒤 하이텔·천리안·나우누리 3대 PC통신망에서는 통신 검열 철폐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용 정보통신망(CUG;Closed User Group)이란 특정 기업·단체가 통신망 사업자와 계약을 맺고 소속 회원들만 사용할 수 있도록 개설한 통신 공간을 말한다. 이를테면 건물주와 계약을 맺고 방 하나를 세낸 셈이다. 한총련은 주식회사 나우콤이 운영하는 ‘나우누리’에 전용 정보통신망을 개설하고, ‘서총련’이라는 사용자번호(ID)로 이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총련 사태 이후 서울지법은 이들 사용자번호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하면서 전용 정보통신망을 폐쇄하라는 명령을 함께 내렸다.

이에 대한 통신인들의 반응은 민감했다. 한총련 학생들의 연세대 점거 농성이 진행되는 동안 PC통신 게시판에는 한총련에 대한 비판과 옹호성 발언이 팽팽히 맞붙었다. ‘한총련 불순분자는 게시판을 떠나라’는 비방 섞인 주문도 심심찮게 올라 왔다. 그러나 전용 정보통신망 강제 폐쇄를 대하는 시각은 대체로 일치했다. 한총련에 대한 평가 여부를 떠나 이는 통신의 자유, 나아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는 것이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심지어 일부 통신인은 ‘PC통신의 5·18’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했다. 이같은 통신인들의 반발을 의식한 듯 나우누리는 한총련 전용 정보통신망을 폐쇄하면서 ‘압수·수색 영장 형식을 통한 컴퓨터통신의 CUG 폐쇄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번 CUG 폐쇄 조처가 통신의 자유와 정보통신의 발전에 장애가 되는 선례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는 공고를 내보냈다.
21세기판 ‘억압 대 저항’ 전쟁

그런데 두 달 만에 또다시 ‘통신망에 대한 공권력 개입’ 시비가 인 것이다. 윤씨 구속 이후 통신망에는 ‘하얀 리본(▷◁)’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블루 리본’을 본뜬 이 표시는 통신 검열에 항의하는 뜻을 담고 있다.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시민 단체들은 인터넷 검열을 골자로 한 미국의 ‘통신품위법’에 반대하기 위해 블루 리본 운동을 벌여 왔다.

구속된 윤씨의 글 가운데 문제가 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1명이 자살한 부분에서 그들에게 무기라고는 권총 1정이 전부였다고 한다. (중략) 11명에 권총 1정이면 그들을 과연 무장 간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중략) 그들은 사병이 없이 전부 장교라고 한다. 최하가 소위라고 하는데 그들은 지금 자살용이라는 권총 이외에는 무기가 없는 것은 아닐까. 과연 그들이 무장 간첩으로 남파된 것일까? (중략) 만약 그들이 표류한 북한 군인이라면 우린 또 한번 정부에 속고 그들을 토끼 사냥으로 잡아 죽이는 것은 아닌지.’

경찰은 이 글을 ‘무장 간첩 사건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북한의 주장을 찬양·고무한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해 윤씨 가족은 ‘윤씨가 글을 올린 것은 무장 간첩 사건이 알려진 지 만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9월19일 오전 8시께)으로, 언론도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던 상황’이라며, 이는 윤씨의 전력을 중시한 표적 수사라고 주장했다. 특히 간첩 김동식씨 남파 사건 때도 윤씨가 조작 의혹을 제기하는 글을 PC통신에 올린 적이 있어 ‘괘씸죄’가 덧붙었으리라는 것이다.

문제는 잇단 통신인 구속·수사가 한국 통신 문화를 크게 위축시키고 있다는 주장이다. 지난 6월 22개 통신·시민 단체가 모여 결성한 ‘정보통신 검열 철폐를 위한 시민연대’(시민연대)는 이러한 주장을 가장 적극적으로 펴고 있다. 이들 단체는 특히 11월16일 한국 통신 사상 최초로 <정보통신 검열 백서>(<백서>)를 펴내 눈길을 끌었다. ‘잇달아 터지는 검열 사건을 모두 담으려면 끝이 없을 것 같아’ 일단 1집을 마무리하게 되었다는 시민연대 대표 김영식씨는, 해마다 <백서>를 정기 발간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무엇보다 통신 ‘검열’이 단순히 통신인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강조한다(사전에 조사·열람하는 것이 아니므로 ‘검열’ 대신 ‘심의’ 또는 ‘모니터링’이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국가나 통신망 사업자가 단순한 ‘사후 심의’가 아닌 ‘삭제’ 권한을 갖고 있고, 다른 나라에서도 ‘검열(censorship)’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므로 이 글에서는 ‘검열’이라고 표현한다). 때문에 시민연대에 통신 단체뿐 아니라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참여연대)·시민환경정보센터·지식인연대 등 일반 시민 단체 11개도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억압 대 저항의 ‘21세기판 역사’가 지금 막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이전에 표현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투쟁 주체가 언론·출판인이었다면 21세기의 주체는 일반 시민이고, 20세기 투쟁 장소가 활자·방송 매체였다면 21세기는 사이버 스페이스가 그 핵이 되리라는 것이다.

통신망 검열은 일반적으로 △국가에 의한 검열과 △통신망 사업자에 의한 검열 두 가지로 나뉜다. 다른 사람에 대한 비방, 음란·폭력물 게재, 상용 프로그램 불법 유통 따위를 규제하는 문제로 갈등을 빚는 것은 어느 나라 어느 사업자나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경우 이를 규제하겠다는 명목으로 제정한 통신품위법이 위헌 논쟁에 휘말려 세계적인 관심을 끌기도 했다(45쪽 상자 기사 참조). 그러나 통신망에 오른 정치 이슈를 가지고 국가 공권력이 개입하는 것은 ‘지극히 한국적인 특수 상황’이라는 것이 김주환씨(뉴 미디어 평론가)의 지적이다.

이번 무장 간첩 관련 글 외에 PC통신에 오른 이적 표현물이 문제가 된 예는 이전에도 있었다. <백서>가 통신 검열의 효시라고 지적하는 93년 천리안 ‘현대철학동호회’ 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동호회원이던 김형렬씨는 동호회 게시판에 사노맹 등 ‘반국가 단체’의 유인물을 올렸다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에는 같은 동호회의 김영선씨와 진상호씨가 각각 무정부주의 관련 글과 공산당 선언을 실었다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구속되었다. 또 다른 동호회인 ‘희망터’의 이창렬씨가 김일성 신년사를 게시판에 올린 혐의로 구속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이들은 △무정부주의 관련 글이나 공산당 선언·김일성 신년사 등이 모두 국립도서관이나 내외통신에서 구할 수 있는 내용이고 △철학 동호회의 특성상 다양한 관점과 사상을 접하는 것은 필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적 목적이 있다고 판단되고’(김영선 사건) ‘내외통신 등 기존 언론사가 보도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그중 일부를 특정한 목적으로 발췌하는 것은 국가보안법상 유죄가 될 수 있다’(이창렬 사건)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했다.
일관성·형평성 잃은 경찰

이번에 문제가 된 무장 간첩 관련 글들은 이처럼 ‘이적성 있는 문건’과 직접 관련이 있지는 않다. 윤씨 글에서 볼 수 있듯이 거개가 자기 추측을 토대로 사건 조작 여부를 의심하는 수준이다. 한쪽에서 경찰의 구속 처분이 지나치지 않느냐는 여론이 일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무장 간첩 관련 글로 조사를 받고 나온 김유식씨는 ‘신문 기사처럼 사실을 일일이 확인하고 써야 한다면 누가 함부로 통신망에 글을 올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왼쪽 인터뷰 기사 참조).

게다가 이번 경찰 조사는 일관성과 형평성을 결여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경찰 관계자도 시인하는 대로, 이번 수사는 언론이 먼저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9월24일 <ㅈ일보>가 ‘PC통신에 북한 무장 간첩 침투 사건을 우리 정부가 조작했다는 유언비어가 등장했다’고 보도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또 인력과 장비 사정상 통신망을 지속적으로 모니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언론이나 그밖의 단체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게시물은 법망을 그냥 빠져 나가고 있다는 얘기이다.

더 역설적인 것은, 윤씨 등이 구속된 뒤에도 ‘관련 글’이 버젓이 통신망을 떠다닌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구속된 지 열흘이 지난 11월14일 현재에도 통신망에서는 문제가 된 글을 쉽게 열람할 수 있었다. ‘관련 글 삭제는 통신망 사업자의 소관’이라는 것이 경찰측 설명이지만 ‘이적 표현물로부터 국민을 보호한다’는 애초의 취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시민연대 김영식씨는 기준이나 원칙 없는 수사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언로(言路) 위축이 아니겠느냐고 강변한다. ‘이 정도 수위로 발언하면 잡혀간다’는 것을 시범삼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자기 검열’ 효과를 노린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통신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농담이 있다. 살아 남으려면 7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공권력·정보통신위원회·통신망 사업자·동호회 운영자·여론 재판(다른 이용자들의 반발이 거세면 스스로 글을 삭제하기도 한다)의 6개 ‘검열 관문’을 통과하고도 모자라 마지막으로 통신 이용자 스스로 자기 검열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국내 통신망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지난 6월 인터넷에 ‘친북한 홈페이지’가 등장해 검찰·경찰·안기부에 비상이 걸린 적이 있다. 캐나다 대학생 데이비드 버게스가 만든 이 홈페이지에는 ‘가장 위대한 천재 김일성 동지’ ‘남한의 꼭두각시 반동분자’ 등 북한의 상투적인 선전 문구가 실려 있었다. 버게스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집어온 팜플렛에 들어 있는 문구들이었다. 이에 대해 공안당국은 정보통신윤리위원회를 통해 각 통신망 사업자에게 ‘북한 홈페이지로 가는 통로를 차단해 달라’는 협조 공문을 보냈다. 한 통신망 사업자 표현대로 ‘말이 협조이지 따를 수밖에 없는’ 공문에 의해 북한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통로는 모두 차단되었다.
“정부가 국민의 수준과 알 권리 무시”

당시 외신 보도는 한국 정부의 조처에 대한 외국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남한의 서울, 여기는 민주주의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으로 정보화 사회를 이야기하는 나라’라고 시작하는 <뉴욕 타임스> 7월10일자 서울발 기사는, 한국의 앞선 정보화와 북한 홈페이지 접속 차단 조처를 대비하면서 ‘이 일화는 남한이 독재와 민주주의의 갈림길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라고 썼다. 이 기사는 또 ‘남한의 꼭두각시 반동분자’ 같은 문구에 심각하게 반응하는 것은 북한 정부를 제외하면 남한 정부뿐이라며 ‘서방 외교관들은 때때로 남한이 예전에 (정보 전쟁에서) 이미 이긴 것도 모르고 계속 북한의 선전전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불평한다’라고 소개했다.

당시 참여연대 등은 북한 홈페이지 접속 차단 조처가 국민의 수준을 얕잡아보고, 알 권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한 정부측 입장은 <뉴욕 타임스> 해당 기사에 들어 있다. 인터뷰에 응한 한국 정부 고위 관계자는 “북한 정부의 선전에 대해 아무 조처도 하지 않는다면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들은 그 문건을 그대로 믿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김영식씨는 “그렇다면 통신인들을 구속하기에 앞서 정부가 먼저 통신망에 정보를 공개하라”고 요구한다.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정부가 공개적으로 대응한다면 유언비어나 이적성 글이 통신망에 떠도는 일도 훨씬 줄어들리라는 것이다. 토론을 통한 설득, 이것이 통신 공간의 커뮤니케이션 제1 원칙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발상 전환이 어려운 경직된 사회 분위기이다.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 심의에 대해 위헌 판결이 난 것이 불과 한 달 전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반 세기가 넘게 걸렸다. 무장 간첩 침투 사건 이래 다시 굳어져 가는 남북 관계 속에서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20세기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기 어려운 현실에서 21세기 표현의 자유 어쩌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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