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 재집권 유력 DJP 땐 야당 승리”
  • 도쿄·崔 進 기자 ()
  • 승인 1996.1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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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치인이 보는 한국 대권 전망/내각제 추진에는 부정적
일본 정가에 ‘하라게이(腹藝)’라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누가 속으로 온갖 복잡한 계산을 하면서도 겉으로 전혀 다른 얘기를 하는 듯 싶으면 “하라게이 수루나” 즉 허튼 술수 쓰지 말라고 한다. ‘뱃속의 예술’로 직역되는 이 하라게이라는 말은, 일본인 특히 일본 정치인의 속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한 일본 언론인은 “외국인들이 하라게이적 속성을 경계하고 부정적으로 보는데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본인의 특징이다”라고 한다.

확실히 일본인은 한국 정치를 바라볼 때도 하라게이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요컨대 직접적이고 정면으로 대하지 않고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접근한다. 예를 들면, 그들은 한국 정치인을 만나 한국의 대권 문제를 물어보거나 자신들의 시각을 피력할 때 절대로 단정적으로 얘기하거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지난 10월말 김종필 총재와 함께 하시모토 총리·미야자와 전 총리·다나카 전 총리 등 지한파 실력자들을 두루 만났던 정석모 의원은 “일본 사람은 대권과 같은 민감한 사안은 절대 정면으로 건드리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여러 비공식 채널을 통해 사태를 충분히 파악한 뒤 넌지시 물어보고, 웬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는 자기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 정치인들이 한국의 대권 정국을 어떻게 보는지를 알려면 그 일본인의 말보다는 주변 정황을 면밀히 살펴야 하고, 끈기 있게 대화를 끌어가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10월29일 김종필 총재가 머무르고 있는 오쿠라호텔 9층. 아침 일찍부터 복도를 부지런히 오가는 김총재 비서진과 자민련 의원들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차 있었다. 이번 일본 방문의 하이 라이트인 하시모토 총리와의 면담이 과연 성사될지 막판까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총선 직후의 하시모토는 연립 정부를 구성하랴, 때마침 일본을 방문한 독일 콜 총리를 접견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우여곡절 끝에 면담은 성사되었다. 그 바쁜 와중에 하시모토 총리가 JP를 만난 것을 두고 현지 특파원과 자민련 관계자들은 일본이 한국의 정치, 특히 대권에 관심이 많다는 증거의 한 자락이 아니겠느냐고 분석하기도 했다. 김종필 총재는 10월31일 귀국하기 직전 오쿠라호텔 숙소에서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한국의 대권에 대해 일본 정계 실세들이 관심이 많은가’라는 질문에 “왜 인접국에 대한 관심이 없겠는가. 당장 자기네 정치 상황이 급해서 관심이 적을지 모르지만 정국이 안정되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일본이 한국의 대권을 보는 주요 분석 창구는 이른바 ‘코리안 워처’라고 불리는 현지 한국 문제 전문가 그룹과 주일 한국 특파원 그리고 주한 일본대사관과 주한 일본 특파원이다. 흔히 한반도 문제를 연구했거나 한국에서 유학한 지식인·언론인·정치학자 들로 통칭되는 ‘코리안 워처’는 한국 신문·잡지 등을 통해 정치 상황을 분석·전망하고 현지 언론에 기고하기도 한다.

이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일본 정치인들은 대체로 다음 대선에서 여당이 재집권할 가능성이 높지만, 김대중·김종필 씨가 연대할 경우 야당이 이길 확률이 높다고 전망하는 분위기다.

DJ·JP·DR에 대한 일본의 평점은?

정치 결사체인 통일민주연맹 마사유키 토다 대표(55)는 한국의 여야 정치인과 교분이 두터운 사람이다. 60년대 일본 학생운동권의 총본산인 전학련 주요 멤버였던 그는 국회수첩에서 여야 의원 20명을 친구라고 짚을 정도로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아는 지한파다. 그는 97년 대선 때까지 많은 변수가 도사리고 있어서 벌써부터 특정인을 차기 대통령감으로 예상하는 것은 매우 성급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누가 한국의 대통령이 되든지 일본이 과거처럼 한국에 영향력을 많이 행사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분석한다.

비교적 한국 사정에 밝은 와타나베 오이치 전 중의원은 현재 한국의 여당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복잡하지만 결국 김영삼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대권 후보가) 최종 정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또 다른 지한파 정치인은 국내 여러 정치인에 대해 평가를 내렸다. 그는 김대중 총재는 능력과 전략적인 발상이 뛰어나지만 참모들이 국가 전략적 측면에서 문제가 있으며, 김종필 총재는 과거 한·일 관계를 여는 데 기여했지만 오늘날 많은 일본 정치인이 그에게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는 오늘날 JP를 통해 한국 정계와 선을 대려는 일본 정치인은 구 정치인을 빼고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덕룡 장관은 김대통령의 참모 가운데 정책적인 면에서 비교적 우수하지만 보스인 대통령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으며, 민주당 이부영 의원은 재야 시절 민주화운동 경력은 높이 평가되지만 국가 경영 능력은 없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한국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도쿄 구의원 하나와 도모후치는 한국의 대권 구도가 내년 봄이면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고 전망하고, 특히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구속이 역사 정립과 97년 대선을 동시에 노린 양수 겸장 카드라고 분석했다.

일본 정계에도 역시 3김씨의 뿌리는 깊다. 한국 정치를 거론할 때마다 일본 정치인이나 지식인의 입에서 어김없이 나오는 이름이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었다. 특히 오랜 세월 국내외에서 민주화 투쟁을 해왔고 일본인에게 비교적 낯익은 김대중 총재가 과연 정권을 잡을 수 있을지가 이들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 3김씨 외에는 6공 때부터 국무총리와 통일 부총리를 지낸 행정부 출신 이홍구 대표가 다른 주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명도가 높았다. 지난해 김대통령이 <니혼 게이자이 신문> 인터뷰를 통해 언급한 ‘깜짝 놀랄 만한 40대 주자’로 알려진 이인제 경기지사는 당시 일본 언론인들 사이에서 도대체 누구냐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지금은 관심권에서 멀어진 상태다. 한편 자민당 등 보수파 일각에서는 지일파로 통하는 김종필 총재나 김윤환 고문이 대권을 잡기를 은근히 바라는 의원들이 있는가 하면, 민주당과 같은 신생 정당이나 개혁 그룹은 한국에도 강한 세대 교체 바람이 불기를 기대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의 대권 구도를 파악하는 최고의 안테나는 단연 주한 일본대사관이다. 요즘 일본대사관은 한국의 정치 흐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국내 정치 특히 대권 정국의 흐름과 주자들의 동태를 본국에 수시로 보고한다고 알려졌다. 지난 4·11 총선 때 일이다. 주한 일본대사관은 한국의 총선을 다소 느긋한 태도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총리 관저에서 총선 전망을 빨리 보내라는 독촉이 내려와 대사관에 비상이 걸린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통인 한 일본 언론인은 “일본은 한국의 대권에 대해 전혀 소리나지 않게 그러나 매우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일본대사관이 보낸 한국 정세 보고서는 외무성을 통해 총리 관저로 올라간다.

“한국 정치인은 자기 주장 너무 강해 탈”

일본 정가에서는 한국내 일부 정당이 내각제를 추진하려는 데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한 야당 정치인은 “일본은 총리가 수시로 바뀌는 등 정치가 아무리 불안해도 천황제가 있어 중심을 잡아준다. 그러나 남북 대치 상황에서 탄탄한 중심축이 필요한 한국에서 내각제는 아직 시기 상조다. 내각제가 정치의 왕도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라고 말했다.

이시이 교수(와세다 대학·영문학)는 김대중 총재가 일본에서 대정부 투쟁을 할 때 학생들과 함께 김대중 구명운동에 앞장서고 94년 고려대에서 10개월간 교환 교수로 지냈던 지한파 지식인이다. 나카소네 전 총리가 방위청 장관을 지낼 때 통역 겸 보좌역을 맡기도 했던 그는, 한국 정치인은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고 상대방과 쉽게 대립하는 점에서 프랑스 정치인과 닮은 대목이 많다고 꼬집었다. 그는 텔레비전과 신문을 통해 한국 정치 돌아가는 것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지만 워낙 복잡해서 내막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국내 언론과 정치인들이 대권 문제를 놓고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는 상황이고 보면, 일본 정치인들이 이웃 나라 대권 구도의 가닥을 못잡을 만도 하다. 하지만 뱃속의 예술에 능한 일본이 본심을 숨기고 한국의 대권 구도를 파악하기 위해 촉수를 곤두세우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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