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휩쓰는 ‘합성 신드롬’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4.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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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합성 신드롬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동호회원 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합성 사진을 선거에 활용하려는 정치권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덩달아 사진 합성을 대행하거나 프로그램을 파는 업체도 호황이다.
‘얼굴 질감을 살리시오. 입술 왼쪽이 부자연스럽소.’ ‘형이상학적 작품세계가 엿보이오.’ ‘피부 색깔이 너무 어둡소. 라이트 이펙트 약간 했으면 좋겠소.’ 미술 비평가들이 품평회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사진합성 동호회 살롱옵스(salonops.cyworld.com)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들이다. 초보 네티즌이 만들어 발표한 사진 합성 작품에 대해 고수들이 한마디씩 조언하고 있는 것이다.

살롱옵스는 사진 합성을 배우고 취미로 즐기는 네티즌들의 모임이다. 지난 1월14일 설립한 이 모임은 두 달 만에 회원 수가 4천5백명이 넘는 큰 동아리로 발전했다. 사진 합성이 뚜렷한 문화 코드로 자리 잡았다는 증거다.

요즘 사진 합성은 전문가들이 스튜디오에서 벌이는 특별한 기술이 아니다. 시쳇말로 ‘개나 소나’ 다 하는 국민적 취미다. 살롱옵스 동호회 대표 이정완씨(26)는 “디지털 카메라·핸드폰 카메라가 흔해지면서 사진 이미지를 가지고 즐기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

고려대 의상학과에 재학중인 고요한씨(22)는 1주일에 2~3편씩 사진 합성 작품을 만드는 마니아다. 고씨는 지난 1월27일부터 1월31일까지 열린 제1회 살롱옵스 아마추어 사진 합성대회에서 고이즈미 일본 총리 얼굴을 영화 속 괴물의 몸과 결합해 대상을 받았다. 상금으로 ‘도토리’(사이버 머니) 30개를 받았다.

고씨는 널리 알려져 있는 영화 포스터의 주인공 얼굴을 자기 얼굴로 바꿔치기하는 작품을 만든다. 고씨 손에서 영화 <품행제로> 포스터는 고씨가 멋진 자세로 폼을 잡는 <학점제로> 포스터로 바뀐다. 얼굴 바꾸는 것보다 글자를 자연스럽게 바꾸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한다. 그는 “간단한 합성은 10분 만에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동호회 회원들에게 보여줄 만한 작품은 4시간 넘게 작업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사진 합성 애호가들이 주로 활동하는 놀이터는 디시인사이드(dcinside.com). 이 사이트에는 합성 작품을 올리고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게시판)가 4개나 있다(필수요소· 그림·시사·합성). 디시인사이드 김유식 대표는 “원래는 합성 게시판이 하나였는데 게시물이 넘쳐나서 쪼갰다. 그래도 필수요소 합성 갤러리에는 하루 100편 이상 사진이 올라온다. 그 중 90% 이상은 우리 스태프들이 지운다”라고 말했다. 출품된 사진 아래에는 수십 명이 리플(한줄 감상문)을 단다. 조회 수는 평균 7천회가 넘는다.

사진 합성은 취미에 그치지 않고 실용적인 용도로도 쓰인다. 직장인 이정화씨(28)는 “댄스 동호회 공연을 하는데 평범한 포스터보다 사진 합성 포스터를 쓰니까 반응이 좋았다.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고 행사 날짜를 다 기억해줬다”라고 말했다.
요즘 합성은 사회·정치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얼마 전 독도 우표 발행을 놓고 한·일 간에 논란이 일었을 때 일본 고이즈미 총리가 ‘필수요소’(합성 작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얼굴 재료)로 떠올랐다. 자극적인 표현 때문에 일본 네티즌들이 분개할 정도였다. 합성 동호회 살롱옵스가 결성된 계기도 바로 이 독도 사건이었다. 디시인사이드 김유식 대표는 “ 지난해 11월에 시사합성 게시판을 따로 분리했다. 네티즌들이 정치에 관심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반응이 뜨거웠다”라고 말했다.

총선을 앞두고 각 정치 조직은 사진 합성을 선전 ·홍보 무기로 내세우고 있다. 한나라당을 비판하는 진보 성향의 네티즌들은 라이브이즈닷컴(liveis. com)이라는 정치 패러디 전문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 모임 회원인 신규용씨(아이디 첫비)는 무협 영화 장면에 정치인들과 검찰의 얼굴을 합성해 <대선자객>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대선자객>은 부패한 한나라당 의원들을 강금실 법무부장관과 검찰이 통쾌하게 무찌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선자객>은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다.

한나라당도 질세라 반격을 시작했다. 한나라당 사이버팀은 노무현 대통령을 서부의 악당으로 묘사한 <노란돼지> 시리즈를 내놓았다. 여기서 노대통령은 돼지와 합성되는 등 심하게 망가진다. 현재 3편까지 제작된 노란돼지는 노무현·정동영·유시민 등이 부패한 보안관과 보좌관으로 등장한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사진 합성을 하나의 예술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네티즌 이성호씨(ID pocorall)는 기호학· 예술사학의 관점에서 합성 유행을 설명한다. “디씨 합갤(합성갤러리)이 가진 활발한 기호 생산력은 한 시대가 공간과 언어에 구애되지 않고 다양한 코드를 생산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살롱옵스의 창립 멤버인 쓰렉씨(아이디명, 26)는 화가 장승업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취화선>의 대사를 인용해 “쉬어갈곳 없는 민초들에게 기대어 쉴 수 있는 곳을 제공해주는 것이 합성쟁이의 사명 아니겠소”라며 자신의 사진 합성 철학을 말했다. 장승업은 사진 합성 작가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요소 중의 하나다. “아마 장승업이 21세기에 태어났으면 합성 작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서울예술대학 사진학과 황선구 교수는 “비단 사진 뿐만이 아니라 음악·문학 장르에서도 짜깁기와 합성 기법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사진 합성을 현대 문화의 한 조류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합성 작가들에 따르면 사진 합성계에도 나름의 계보가 있다고 한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활동했던 작가들은 이른바 합성 1세대로 불린다. 무쇠팔뚝, 오골계, 열메, 홀로자, 닐스 등이 대표적 작가들이다. 이들은 디시인사이드의 명예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득의 길’ 게시판에 이름이 올라 있다. 그러나 요즘은 활동이 다소 뜸하다. 쓰렉·오따콩 씨 등은 2세대에 속한다. 살롱옵스를 통해 활동하며 합성을 사회운동의 하나로 인식하고 대외적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것이 특징이다. 살롱옵스 창립자 쓰렉씨는 “이미지로 세상을 바꾸자는 것이 창립 모토다”라고 말했다. 합성 작가들은 대부분 실명 공개를 거부한다.

합성 사진 열풍 속에 합성 산업도 뜨고 있다. 사진 합성 프로그램인 ‘포토샵’이 대표적이다. 포토샵은 미국 소프트웨어 회사 어도비(adobe) 사의 제품 이름이지만 ‘사진 합성 프로그램’을 뜻하는 일반 명사로도 쓰인다. 어도비 코리아의 최정미 차장은 “과거 포토샵 프로그램은 주로 출판사·디자이너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최근 디지털 카메라가 유행하면서 사진 합성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출시된 최신 버전은 디지털 카메라 고급 사용자를 겨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취재 중에 만난 합성 작가들은 모두 불법 복사품 포토샵을 쓰고 있었다. 포토샵 정품 가격은 100만원대다. 어도비 코리아측은 “10만원대 보급용 버전도 만들었지만 불법 복제를 근절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의 포토샵 불법 복제율은 중국·베트남에 이어 세계 3위다”라고 말했다.

사진 합성을 대행해 주거나 합성 전문 프로그램을 파는 회사도 있다. 한 벤처 기업은 ‘매직스테이션’이라는 온라인 사진 합성 프로그램(솔루션)을 만들어 상용화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개인 PC가 아니라 기업 홈페이지 구축에 쓰이는 것으로, 네티즌들은 온라인 상에서 사진 합성 이벤트를 즐길 수 있다. 이 회사 배지수 사장은 “네이트·KTF·카스맥주 등에 납품하고 있다. 지난달 한 대기업에 1천5백만 원을 받고 팔았다”라고 말했다.
빛이 강하면 그늘도 깊은 법. 합성 사진 열풍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다. 이른바 ‘필수요소’로 등극한 사람은 자신의 얼굴이 매일같이 희화화하는 수모를 감내해야 한다. 가수 문희준의 소속사는 합성 사진·그림·동영상으로 문씨를 조롱해온 네티즌들을 고소했다. 김 아무개씨(23)는 지난해 여름 디시인사이드에 초상권이 침해되고 있다며 항의했다. 자신의 우스꽝스런 얼굴 사진이 합성 마니아들 사이에서 ‘광녀’라는 이름으로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티즌들은 출처와 상관없이 재미있는 모습이면 거침없이 사진 합성의 재료로 쓰기 때문에 명예 훼손 논란을 빚는다.

합성 기술 발전은 급기야 사진이 갖고 있던 진실성을 무너뜨렸다. 서울예대 사진학과 황선구 교수는 “예전에는 그래도 자세히 살피면 합성 여부를 구별할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기술이 너무 발전해 완전히 가려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진이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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