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익명석 속 이기심·권위주의 팽배
  • 宋 俊 기자 ()
  • 승인 1997.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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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심·조급증·권위주의 팽배… 도시가 제공하는 익명성의 ‘함정’에서 비롯
요즘의 한국 사회는 거대한 버라이어티 쇼를 방불케 한다. 주식 시장이 바닥세를 면치 못하고 환율이 천정 부지로 치솟아 나라 경제가 뿌리째 흔들리는 판에, 위기에 대처하는 정부의 손길은 불안하기만 하다. 한편에서는 차기 대권을 놓고 후보들의 상호 비방이 몇달째 불꽃을 튀기고 있으며, 느닷없이 보수 우파 지식인이 연루된 간첩 사건까지 터져나왔다. 미국의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 위크> 최근호는 ‘한국의 정당은 정책이 아니라 특정 인물에 의해 좌우되며, 공무원과 정치인이 뇌물을 받고 재벌과 야합한다. 정부의 압력으로 은행은 대기업에 부실 대출을 계속해 왔다’라고 밝혔다. 국가 차원의 ‘블랙 코미디’나 다름 없는 상황이다.
지난 11월7일과 11일 서울과 춘천에서 시의 적절한 학술 대회가 잇달아 열렸다. <한국 사회의 천박성과 그 극복>(국제한국학회 주최)과 <신뢰와 한국 사회:사회 질서의 미시-거시 연계>(한림대 사회조사연구소 주최)가 그것이다. 두 세미나는 각각 한국을 ‘천박성이 지배하는 사회’와 ‘신뢰 없는 사회’라고 규정했다. 이를 계기로 <시사저널>은 한국 사회의 실상과 왜곡된 내면을 심층 진단하고, 그 원인과 극복 가능성을 살펴보았다.<편집자>


사례 1. 11월21일 11시55분, 서울 서대문 네거리. 버스 기사와 개인 택시 기사가 격렬하게 말다툼하고 있었다. 서로가 난폭 운전을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험악한 표정을 짓고 고함과 삿대질로 탐색전을 치른 두 사람은 각기 자기 차를 거칠게 길가로 빼낸 뒤 본선에 돌입했다. “…그걸 운전이라고 배웠냐, 새파란 녀석이…” “나이 먹었으면 똑바로 하란 말이야” “뭐야, 이 자식이…” “이 자식? 확, 그냥”…. 말리는 사람에 떠밀려 버스로 돌아가던 20대 기사는 50대 택시 기사를 향해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저 새끼 면허증 없는, 순 가짜 아냐?”

두 차량 어디에도 충돌한 흔적은 없었다. 승객들은 험악한 사태를 지켜보며 10여 분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이렇게 풀고 가는 게 낫지. 안 그랬으면 분을 운전으로 풀 텐데….” 싸움을 바라보던 한 구경꾼의 혼잣말이었다.

사례 2. 지난 9월 서울에서 경기도로 이사한 중견 회사원 ㅂ씨는 차 번호판을 바꾸면서 겪은 불쾌한 경험을 잊지 못한다. 누군가가 번호판 교체 절차를 한 번만 설명해 주었어도 힘들 까닭이 없었건만, ㅂ씨는 회사를 빠지며 네 차례나 헛걸음을 해야 했다.

ㅂ씨는 한 달 뒤 강원도 인제 출장길에서 앞쪽 번호판을 분실했다. 부실하게 부착한 번호판이 비포장 도로에서 떨어져나간 것이다. 번호판을 재발급 받는 과정은 곤혹스러웠다. 분실 확인서를 떼러 들른 거주지 파출소의 반응은 권위주의 그 자체였다. 경찰의 턱짓으로 안내를 받아 찾아간 담당자는 퉁명스러웠고, 실랑이 끝에 ㅂ씨는 “싫으면 가까운 인제에 가서 받아 와라”라는 비아냥과 “남의 집에 와서 웬 행패냐”라는 위협을 감수해야 했다. 며칠 뒤 ㅂ씨 대신 파출소를 찾아간 아내는 경찰로부터 “남편 교육 좀 똑바로 해라”라는 훈계를 받았고, 아내로부터 “도대체 어떻게 처신했기에 그런 말을 듣게 만드느냐”는 지청구를 듣고 ㅂ씨는 대판 부부 싸움을 벌였다.

교통사고·간암·결핵 사망률 1위의 의미

사례 3. 유명 회사의 간부 ㄱ씨는 2년 만에 해외 출장에서 돌아와 예기치 않은 전화를 받았다. 손님 접대를 위해 자주 이용하던 술집에서 걸려온 초대 전화였다. 때마침 접대할 손님이 있어 그 술집을 찾았다가 ㄱ씨는 기분을 잡치고 말았다. 계산서에 15병 마신 맥주가 20병으로, 안주값도 멋대로 적혀 있었다. 평소 술병 수를 꼼꼼히 세는 ㄱ씨는 엄중히 항의한 끝에 ‘바가지’를 면할 수 있었다.

이 사례들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겪었을 법한 ‘일상 풍경’이다. 어쩌다 한번 하는 호화 외식보다 매일의 식단이 건강을 좌우하듯이, 나라의 건강을 결정하는 것은 경천동지할 한두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다. 다음 통계 수치들은 ‘한국적 일상’이 축적한 ‘장엄한’ 퇴적물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서 교통 사고·간암·결핵·고혈압성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 1위. 신생아 남녀 성비 불균형 비율 압도적 1위. 보건 의료비의 공공 부문 지출 비중은 꼴찌에서 두 번째(이상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6월23일 펴낸 <한국 보건 복지 지표> 96년 통계).

‘97년 유네스코 교육 통계’ 역시 낯뜨거운 수치를 열거하고 있다. 한국은 해외 유학생 수에서 세계 3위를 차지한 반면, 인간 개발 지수(HDI·기본적인 인간 능력의 개발 정도 평가치)에서는 세계 32위를 기록했다. 남녀 성별 평등 지수는 34위였고, 여성 권한 척도는 73위에 머물렀다.

또한 한국의 1인당 담배 소비량은 2위 국가를 두 배 가까운 수치로 압도하고 있으며(유러모니터 통계·10월22일) 세계 주요 도시 가운데서 서울은 물가가 세 번째로 비싼 도시로 꼽혔다(유엔 통계·10월7일).

94년까지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하던 ‘고아 수출 왕국’의 오명은 95년 입양특례법을 제정한 뒤로 벗었지만(미국 입양아 기준·3위) 중국·러시아와의 인구 비례를 감안하면 여전히 독보적이다(이하 통계 주체 생략). 이밖에 △건설 재해 사망률(93~95년)과 어린이 안전 사고율(97년)이 선진국의 4배 △서울의 시내 버스 교통 사고율이 도쿄의 13.3배(96년)에 달한다는 기록은 우리 삶의 척박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국제한국학회 회장 최준식 교수(이화여대·한국학)는 이 강파른 삶의 자취를 ‘천박성’이라 규정한다.

“천박성은 학술 용어로 적합한 말이 못되지만, 한국의 현실은 낱말을 고르면서 점잖을 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과감하게 문제를 지적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한 뒤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솔직히 한국에서 살기가 고달프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행동의 자유’ 보장받은 개인의 이기심

실제로 한국인의 삶의 양태는 최교수의 지적과 그리 먼 거리에 있는 것 같지 않다. 성수대교·삼풍백화점 참사가 그렇고, 최근 연이은 지하철 사고가 그렇다. 동포 조선족을 울린 사기 사건이며, 장애인과 외국인 노동자를 차별하는 처사가 그렇다. 국회에서는 멱살잡이가 벌어지고, 주차 시비가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96년 11월·서울).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 공공 장소에서 예절을 지킬 줄 모르는 한국인 관광객(방문객)의 추태는 유명해진 지 오래다. 지난 9월에는 중국에 초청 받아 간 인천시 한 구의회 의원 몇몇이 공식석상에 반바지 차림으로 참석하고, 회의 중에 기지개를 켜는 등 상식 밖의 행동으로 물의를 빚은 바 있다. 동남아·구미 지역 관광단의 ‘몬도가네’식 건강 식품 탐닉도 지탄의 대상이다.

일상을 통해 드러나는 이 천박성의 연원은 도대체 어디인가. 이 행태들은 공교롭게도 거개가 익명의 관계에서 자행된다. 익명성은 이기적 행동에 대한 지탄과 책임으로부터 자유를 보장한다. 보장된 뺑소니. 이 익명의 상태가 바로 한국 사회의 천박성이 출발하는 스타트 라인인 것이다.

익명의 장막이 걷히면 한국인은 정반대다. 대체로 한국인은 다분히 주위의 평판을 의식하며 행동한다. 누군가의 손가락질이 불편한 것이다. 손가락질은 근대 이전 민초들에게 규범이고 이데올로기였다. 마을은 하나의 우주였고, 마을에서 따돌림받는다는 것은 곧 사회적 죽음을 의미했으므로, 그만큼 다수의 손가락질은 치명적이었다. 손가락질의 속성은 대상자가 속한 지역 혹은 집단의 범위까지만 힘을 미친다는 점이다. 이 힘의 경계가 ‘우리’와 ‘남’을 가르는 한계선이 되었다. ‘우리’의 기초 단위는 가족(가문)이고, 이는 지연과 혈연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마을→지방(지역)→국가’와 ‘친지→동성동본→민족’으로 확장한다.
‘우리’라는 개념 잃으면서 예절 사라져

손가락질과 익명성은 반비례 관계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해 왔다. 이 균형은 도시화 초기인 50~60년대, 도시가 제공하는 익명성이 손가락질의 위력을 압도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손가락질 규범이 무너지자 ‘우리’의 울타리도 무너졌고, 남은 것은 가족뿐이었다. 이 현상은 점차 극단적 가족 이기주의로 변질했다. “19세기 말엽부터 조선의 신분 질서가 문란해졌지만, 규범의 변화는 훨씬 늦게 익명성이 진전하는 것과 비례해 진행되었다”라고 조관연씨(한국외국어대 강사·문화인류학)는 밝혔다.

최준식 교수에 따르면, 조선 사회에서는 공중 도덕이 따로 필요 없었다. “가족·가문·친족 내 서열로, 그리고 장유 유서·남녀 유별 원리에 따라 모든 질서가 미리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구질서는 ‘우리’ 사이만을 관장해 왔을 뿐 ‘남’과의 관계를 윤활하게 만드는 기능은 미처 갖추지 못했다. 저자에서 만난 타인끼리 예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관계는 ‘우리’라는 동류 의식의 연장이었다. 지금도 한국인이 처음 인사한 사람과 학연·지연·나이 따위를 확인하려는 경향은, 신속히 ‘우리’라는 관계에 돌입함으로써 익숙한 질서로 귀속되려는 관성의 발현인 것이다.

한국 사회의 천박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손가락질 규범이 회사나 소속 단체의 울타리로 옮아갔을 뿐 타인과의 에티켓 개념은 처음부터 없었다. 개념이 없으니 학습이 있을 수 없다. 최봉영 교수(한국항공대·한국학)는 “‘우리’가 해체된 뒤 ‘너’와 ‘나’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너’마저 없어지고 ‘나’만 남은 것이 한국의 특수성이다. ‘나’밖에 없으니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라고 진단했다.

에티켓 부재와 함께 한국 사회의 천박성을 좌우하는 요소는 권위주의다. 이탈리아 파시즘을 연구한 학자들은 ‘권위주의적 특성을 가진 사람은 IQ가 낮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들은 순응적인 아랫사람을 선호한다. 권위주의자와 순응주의자가 만나면 창의력 퇴조와 획일주의 문화의 팽창을 초래한다. 한국의 경우 권위주의는 무엇보다 토론 문화의 단절을 부르고, 거의 모든 한국인이 자기 직무·직위를 사유 권력화하는 경향을 낳는다. 최봉영 교수는 이를 ‘출세 열망론’으로 설명한다. “억울함을 해소하는 합리적 제도를 갖춘 나라일수록 사회가 안정돼 있다. 법과 공권력이 그 수단이다. 우리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한을 푸는 길은 죽기살기로 출세하는 방법밖에 없다. 출세는 한풀이인 동시에 지배 수단이다. 각자의 위치가 바로 필사적으로 달려온 출세의 상한선이다.”

그러니 출세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것은 사치가 되고, 얻은 권력을 마음대로 쓰는 것도 당연하다. 오래 전부터 윗물이 더러운데 아랫물이 맑을 리 만무하다. 더구나 한국전쟁을 통과하면서(언제 죽을지 모르는 판에) 몰염치와 기회주의와 이기주의가 당연시되었고, 5공 청문회·수서 비리·한보 비리를 통해 지배층의 부패 실상이 백일하에 드러나자 국민의 상대적 박탈감은 극에 달했다.
성수대교 참사 부른 ‘눈앞의 이익’ 챙기기

불신 심리는 미래를 보고 투자하기보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하는 조급함의 원인이 된다. 이른바 ‘목전 실리 추구 성향’이다. 이 성향은 십중팔구 자승자박으로 이어진다. 앞에 예로 든 ‘사례 3’이 여기에 해당한다. 성수대교·삼풍백화점 참사도 개인이 목전 실리를 추구하는 성향이 빚은 사회적 비극이었다. 배신과 모략이 득세하는 사회 풍조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두텁게 신의를 쌓는 방식보다, 약삭빠르게 기회주의로 처신한 사람이 단맛을 보는 경우가 무척 많았다.
공적 신뢰(제도·규범에 대한)가 붕괴하면 사적 신뢰(인맥·파벌 등)에 기대게 되고, 사적 신뢰가 강화되면 공적 신뢰는 더욱 약해지는 악순환이 거듭된다(역도 성립). 이에 대해 이재혁 교수(한림대·사회학)는 “무엇보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일이 시급하다. 공적 신뢰를 회복하는 일은 ‘있으면 좋은 장식’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생존 과제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정훈 박사(한국생산성본부 조사연구부장)가 제시한 ‘응석 심리’ 이론은 한국인의 심성과 공적 신뢰 사이에 작지 않은 거리가 있음을 시사한다. 응석은 단순한 의존이 아니라, 자기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주위 사람을 수단으로 삼으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어느 나라 아기나 응석을 부리지만, 대개의 경우 서너 살 때부터 불편과 어려움을 참는 인내를 학습함으로써 자립심과 책임감을 길러준다.

한국의 유아 교육은 반대다. 기 살리기 차원에서 아이의 응석을 받아준다. 떼 쓰는 아이를 통제하는 것은 가부장의 꾸지람이다. 달래기는 응석을 독선으로 키울 위험이 크고, 꾸지람은 눈치를 학습할 가능성이 높다. 응석 심리는 훗날 권위주의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자세를 낳는다. 실제로 한국의 교육 체제에서 응석을 교화하는 정제된 프로그램은 발견하기 힘들다.

아이는 응석을 받아주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구분하고, 적절하게 감정 대응하는 비결을 학습한다. 성장하면서 투정이라는 형식은 없어지지만 응석 심리는 사라지지 않고 이기적·기회주의적인 인간 관계로 이어진다. “감정에 좌우되는 충동적 경향과 한국인 특유의 조급성은 응석 심리의 연장으로 해석된다. 다른 사람이나 조직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뭔가를 기대하고 요구하는 성향도 그 특징이다. 서로 요구가 많을 때 결과가 어떨 것인가”라고 이박사는 말했다.

응석은 관철되는지 여부에 따라 두 갈래로 발전한다. 권력을 쥘 경우 ‘응석→독선→권위주의·지배욕·독점욕’으로, 반대의 경우 ‘응석→원한→보복 심리’로 진행될 소지가 많다. 두 방향 모두 대화와 토론을 저해하는 핵심적 요인이라는 점에서, 응석 심리는 폐해가 자못 심각하다.

위와 같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빚어진 한국인의 심인적 특징이 ‘계층간 소원성’이다. 피라미드를 4~5단계로 나눈 그림을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 어느 한 단계라고 임의로 상정하고 그에 따라 타인을 대하는 방식인데, 계층간 거리가 매우 멀게 느껴지는 것이 한국적 특성이다. “외국인 노동자의 갑작스런 등장이 좋은 예다. 한국인은 피라미드 맨 아래에 새로운 단계를 하나 더 만들어 이들의 위상을 설정하고, 약속이나 한 듯이 경멸하고 배척한다.” 이정훈 박사의 분석이다.

원인 분석하고 과오 인정해야 천박성 줄어

결국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는 한국 사회의 천박성은 △전근대적 요소와 근대적 속성 혼재 △경제 성장 속도와 문화 발전 속도 불일치 △왜곡된 역사가 빚은 민족혼 훼손 따위가 뒤섞여 빚어낸 과도기적 현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천박성은 한국만의 문제인가. 임홍빈 교수(고려대·철학)는 자본주의 자체가 문화적·사회적 천박성을 요구한다고 설명한다. 천박해야 쉽게 질리고 상품 수요가 쉽게 변해 새로운 시장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선진국들은 이같은 속성을 일찍 간파하고 사회·문화 인프라를 구축해 천박성을 줄였다는 것이다.

한때 선진국 문명에 기울어 ‘민족 개조론’을 들먹이며 민족성이 열등하다고 주장한 학자도 있었다. 최근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같은 주장을 반박하며 ‘한민족은 결코 열등하지 않다. 다만 역사와 상황이 비극적이었을 뿐이다’라고 지적한다. 지난 수십 년 간의 경험으로 보면 한국인이 갈망하던 것을 쟁취하는 기간도 점점 짧아지고 있다. 백여 년 동안 진행된 관행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조급함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신중하게 천박성의 원인과 구조를 분석하고,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천박성을 줄여 가는 진득한 방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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