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섣부른 '박정희 회고'
  • 김 당 기자 ()
  • 승인 1997.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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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회고록 연재 등 복고 기류, 여론 호도 가능성
구관이 명관이라는 속설이 신화처럼 되살아나고 있다. 죽은 박정희가 무덤에서 부활해 산 김영삼을 구축(驅逐)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나라 전체가 나락에 떨어져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는 지금’ 복권된 박정희는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원해줄 ‘메시아’로 등장하고 있다.

지금 시중에는 인간 박정희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인간의 길>이 화제이고, 대학가 여론조사에서는 인간 박정희가 복제하고 싶은 모델 2위로 떠올랐다.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에는 요즘 추모객을 실은 승용차와 관광 버스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이런 추모 열기에 힘입었는지 구미시는 박대통령의 기념관을 구미에 건립키로 했다고 한다.

박정희 소장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시절에 비서실장을 지낸 전형적인 박정희맨이었고 그 자신이 포철 신화의 살아 있는 주인공인 박태준 전 포철 회장의 포항 보선 출마도 그런 흐름을 탄 것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올해 대선은 이른바 무주공산인 TK(대구·경북) 지역의 민심이 좌우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 이른바 대권 후보들도 죽은 박정희의 지원을 업는 것을 대선 가도의 지름길로 인식하고 있다. 죽은 박정희가 차기 정권마저 좌우하고 있는 형국이다.

언론의 상업주의가 이러한 시류를 놓칠 리 없다. 지금 일부 언론 지상에서는 박정희가 복권되고 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박정희 메시아론’을 은연중에 전파하고 있는 언론 매체가 대개 재벌·보수 언론이라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의 회고록을 10여 회 연재하고 있는 <중앙일보>가 ‘박정희 다시 보기’를 주도하고 있다.

물론 이 신문의 회고록 연재를 시류에 영합한 상업주의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최장수 비서실장(69년 10월∼78년 12월)을 지낸 인물이 긍정 일변도로 회고한 것을 별다른 검증 장치 없이 전파하는 것은 정당한 재평가 방식이 아니라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 실제로 김씨의 회고록은 군사 쿠데타, 헌정 유린, 군부 독재, 인권 탄압, 공작 정치, 지역 갈등 유발 같은 박정희 시대가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교묘하게 여론을 왜곡·호도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정치 자금 유용을 ‘미담’으로 소개

<중앙일보>에 연재 중인 ‘김정렴 정치 회고록’에서 부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미덕은 애국과 청렴, 탁월한 국가 경영 능력으로 대변된다. 그러나 인간 박정희에 대한 김씨의 주정(主情)적 평가는김씨가 회고록 연재를 시작하며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잘 드러난다. 김씨는 특별히 이 시점에 회고록을 탈고한 까닭을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올해는 대선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 국가의 운명이 걸린 문제인데…. 박대통령이 나라를 어떻게 운영했는지 밝혀 놓는 것이 국민이 대통령을 올바로 뽑는 데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김씨는 유신(維新)과 장기 집권 그리고 인권 탄압 같은 비판에 대해서는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박대통령의 속마음과 의지는 그게 아닌데 사람들은 물리적 결과만을 놓고 얘기하거든요. 장기 집권만 해도 그래요. 서독의 아데나워 총리는 14년 1개월이나 집권했고 독일의 콜 총리는 현재 14년7개월째 하고 있어요. 기간이 문제가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지요.”

김씨는 ‘집권 기간이 문제가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장기 집권한 독일 총리들과 군사 쿠데타로 집권해 또 한번의 친위 쿠데타(10월 유신)로 사실상의 영구 집권을 꾀한 박정희를 동일시하고 있다. 게다가 김씨는 ‘내용이 중요하다’면서도 정작 민주주의의 후퇴와 인권 탄압 및 노동자의 희생을 담보로 박정희 시대에 이룬 ‘한강의 기적’과 그 기적의 원조 격인 아데나워 시대의 근면한 국민성과 모범적인 민주제도를 바탕으로 이룩한 ‘라인강의 기적’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있다. 또 그렇게 내용이 중요하다면, 똑같은 시기에 강대국에 의해 분단 상황을 맞이했으면서도 독일 통일의 위업을 이룬 콜 총리와 오히려 남북 관계를 장기 집권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해온 박정희 대통령의 본질적인 내용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김씨의 주장은 차라리 궤변에 가까운 것이다. 죽은 박정희를 살리기 위해 산 김영삼을 죽이는, 그럼으로써 ‘시의 적절’한 차별성을 갖지만 본질을 흐리는 김씨의 언술은 회고록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정치 자금과 관련해 김씨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업자를 직접 만나 정치 자금을 거두었고, 쓰다 남은 정치 자금만도 무려 2천억원씩이나 되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비서실장으로 있었던 9년3개월간 업자를 직접 만나 정치 자금을 받은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김씨는 자신이 기업주로부터 정치 자금을 받아 바로 박대통령에게 전달하면 ‘박대통령은 즉석에서 봉투 위에 날짜, 기업체명, 금액을 기입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이 직접 받는 것과 분신인 비서실장을 통해 받은 돈을 치부책에 적는 것 사이의 차별성은 ‘염치’의 정도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도 김씨는, 자신은 기업으로부터 직접 한푼도 안 받았다고 강조하는 김대통령과 똑같이 박대통령은 직접 받지 않았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김씨는 또 박대통령이 정치 자금을 조달한 방식이 독특했다고 주장하면서 정치 자금의 용도에 관한 비화를 버젓이 흐뭇한 이야기라고 소개하고 있다. 박대통령의 외아들 지만군이 중앙고를 졸업한 후 육사에 입학하자 박대통령은 학부형의 처지에서 중앙고에 ‘조그마한 기념’이 될 만한 것을 해주고 싶어하다가 어느날 중앙고 재단 관계자를 불러 ‘후원기금 5억원을 조성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제의하고 정치 성금의 여유분 중에서 2억2천만원을 내놓았다는 것이 정치 자금의 쓰임새에 얽힌 ‘미담’의 요지이다. 기업들로부터 거둔 정치 자금 중에서 수억원을 사적으로 ‘유용’한 것을 미담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국민의 망각·상업주의 어울린 빗나간 복고”

김씨는 인사 방식에서도 박대통령이 공정하고 개방적인 원칙을 지켰다고 술회했다. 김씨는 ‘조각(組閣)에서는 출신도별 안배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 나는 후보자 명단에 출신도를 꼭 명기했다’라고 강조했다. 한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망국적인 지역 감정과 지역 패권주의의 씨를 뿌린 장본인이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주지의 사실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남영신씨의 <지역 패권주의 연구>에 따르면 3·4공화국 장·차관급 고위직 관료들의 출신지별 현황(총 4백32명)은 △경상도 1백30명(30%) △이북 87명(20%) △서울·경기 62명(14%) △충청도 60명(14%) △전라도 57명(13%) 등이다. 이런 객관적 사실을 외면한 채 김씨는 ‘출신도별 안배’를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을 감옥에 보내고 역대 군부 독재에 맞서 싸운 문민 대통령이 정치적 ‘식물 인간’이 된 비극적 상황에서 군부 독재의 씨를 뿌린 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복고(復古)는 분명 역사적인 아이러니이다. 특히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박정희 시대에 젊음을 차압당한 세대인 30대 후반과 40대에게 박정희 시대를 겪지 않은 세대들의 ‘복제 모델’ 선정은 ‘억울한 청춘’에 대한 보상 심리마저 박탈하는 것이다. 인권운동사랑방 박래군 사무국장(36)은 현재의 박정희 증후군에 대해 ‘경제난과 현직 대통령의 지도력 부재뿐만 아니라 망각하는 국민성과 언론의 상업주의가 빚은 감상적인 빗나간 복고 현상’이라고 풀이했다. 지금은 박정희의 관을 열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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