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서면 인터뷰
  • ()
  • 승인 1997.12.1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적인 고성장 시대가 지나고, 21세기는 질적인 저성장 시대가 됩니다. 회사 경영에서도 통제하는 관리가 아니라 인센티브를 주어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큰 관리’가 필요합니다.”
96년 4월 미국 샌디에이고 회의에서 기업 환경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측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엔고 등의 반짝 경기로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지금의 경제 위기는 수년 전부터 예견돼온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샌디에이고 회의 때 저는 우리 경제가 자만에 빠져 실력 이상으로 흥청대고 있다고 보고, 거품을 제거하자고 했습니다. 이러한 예측은 경제학자처럼 데이터를 분석해서 얻은 것은 아니고, 기업을 경영해 오면서 터득한 동물적인 본능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미래의 변화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편인데, 이러한 걱정이 위기를 예견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60년대 10대 그룹 중 아직도 10대 재벌에 속하는 것은 삼성과 LG뿐입니다. 온갖 정변과 위기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강한 생명력을 유지한 비결은 무엇일까요?

기업과 정치는 ‘불가근 불가원’의 관계를 맺는 게 바람직하다고 믿어 왔습니다. 한눈 팔지 않고 기업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 정치적 외풍을 피하는 비결이라고 봅니다. 내년으로 삼성은 창업 60주년을 맞게 됩니다. 사업 구조나 경영 시스템을 적절하게 변신시켜 온 것이 우리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리의 삼성’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삼성은 관리 쪽이 강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내 관료주의도 강한 듯 합니다.

신경영을 추진하면서 조직 내에 만연된 ‘대기업병’을 고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만, 아직도 부족한 것 같습니다. 사내 관료주의를 없애기 위해 저는 챙기고 통제하는 관리가 아니라, 기회 선점을 지원하는 ‘큰 관리’로 전환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삼성은 창의와 전략과 큰 관리 3개를 축으로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금세기 말 세계 경제 차원에서 닥쳐올 큰 변화는 어떤 것입니까?

21세기에는 근본적인 인식 체계가 바뀌고 게임의 룰도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적인 고성장 시대에서 질적인 저성장 시대로, 산업화 사회에서 디지털 사회로 급변할 것이고, 국가와 기업은 지구촌을 무대로 삼아 지금보다 더 치열하게 경쟁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자동차산업에 진출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계 5위 자동차 생산국으로 성장했다지만 우리는 질적인 면에서 세계 수준에 크게 뒤떨어집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길은 수출뿐인데, 품질 혁신만 제대로 하면 자동차산업은 수출 전략 산업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은 자동차산업이 기계산업 쪽에 가깝지만, 머지 않아 전장품이 많아져 전자 분야가 중요해질 것이라고 봅니다. 삼성은 전자산업에 강점이 있으니 자동차산업을 해보자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초 단계부터 차별화한 방법으로 자동차산업을 추진할 것입니다. 보통 차가 아니라 ‘한국의 벤츠’를 추진한다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다음 세기에 삼성이 주목하는 사업 분야는 어느 것입니까?

당장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정상을 지키면서 비메모리 분야를 집중 육성하고, 자동차산업에도 주력할 생각입니다. 통신설비와 통신장비, 차세대 디스플레이·생명공학·환경산업·의약품 개발도 적극 검토할 계획입니다.

가장 존경하는 분은 누구입니까?

선친입니다. 선친의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일본 혼다 자동차의 혼다(本田) 사장에게선 기술 중시 사상을,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의 잭 웰치 회장에게선 혁신 전략을 배웠습니다.

의도하는 대로 직원들이 따라와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십니까?

조직을 이끌어 가는 데는 윗사람의 솔선수범이 가장 필요합니다. 그 다음으로 신명 나서 일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권위주의적인 지시나 신상 필벌을 하기보다는 인센티브를 많이 주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기수는 절대 말에게 채찍질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바람직한 한국의 리더십은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평양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속담이 있듯, 한국인은 정서적으로 자율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자율성이 일제와 군사 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획일적이고 타율적인 근성으로 변했다고 봅니다. 지난 30년간 경제 기적을 만든 데서 알 수 있듯 우리 민족은 한번 신바람이 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앞으로 지도자는 국민의 기를 살려주는 쪽으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내년에 공황이 올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의 위기는 우리 모두가 제 분수를 모르고 자만한 데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국민 소득 만 달러라는 허상에 젖어 제몫 찾기에만 열중한 것도 한 원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부와 기업과 국민 모두가 고통 분담 차원에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뼈를 깎는 구조 조정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렇게 경제 살리기에 뜻을 모으면 지금의 위기는 오히려 우리의 경제 체질을 강화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난 11월26일 삼성은 경영 체질 혁신 방안을 밝혔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삼성 직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나라가 없으면 회사가 없고, 회사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경쟁력 강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기를 당부합니다. 경제 상황이 바뀐 만큼 낭비와 거품을 최대한 줄여 저비용 고효율의 선(善) 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차기 정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21세기의 지도자는 확고한 비전과 철학을 갖고 경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사회 시스템을 고쳐 후대를 위한 ‘국가 경영의 틀’을 구축해야 합니다. 21세기는 시스템 경쟁 시대이므로, 차기 지도자는 규제를 완화하고 인프라를 확충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