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별 진 어스름 새벽길 ‘제3의 장정’
  • 북경·李興煥 특파원 ()
  • 승인 1997.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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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 사후 중국, 정치 실험期 돌입
중국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총설계사 등소평(鄧小平)이 사망하던 날 밤 북경에는 6급 세기의 바람이 불었다. 이튿날인 2월20일 아침 7시 천안문 광장에 조기가 내걸렸고, 광장 동쪽 역사박물관 입구 대형 전광판에는 홍콩 반환일인 7월1일까지 1백31일이 남아 있음을 알리는 붉은색 글자가 선명했다.

계속된 북풍은 천안문 광장의 오성홍기를 휘날렸지만, 엿새 간의 추도 기간 내내 북경 시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잠잠했다. 등소평이 사망한 사실을 보도하는 서방 외신들의 호들갑마저 잠재울 만큼 등의 죽음 앞에 대륙은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북경 주재 서방의 한 외신은 ‘예상 밖으로 조용하고 평온하다. 길거리에서 권력 투쟁의 조짐은 찾아볼 수가 없다’라고 타전했다.

鄧 사망에 철저 대비, 장례식 진행 순조

중국 정부는 등소평이 사망한 직후부터 장례식까지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치밀하게 진행했다. 등의 죽음을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북경 시 치안을 담당하는 북경 시 공안국이 처장(국장)급 실무자들을 긴급 소집해 등의 사망 사실을 통보한 시간은 19일 밤 10시께였다. 중국 정부가 발표한 등의 사망 시간(밤 9시8분)이 확실하다면, 치안 실무자들에게 치안 유지 지시가 내려진 것은 등이 사망한 지 채 1시간도 안된 시점이었다.

추도 기간에도 북경 시내에서 별다른 조짐은 발견되지 않았다.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절(春節)을 쇠려고 지방에 갔던 주민들의 귀경을 일부 통제하고, 북경 시 호구(주민등록)나 거류증을 소지하지 않은 채 북경 시내에 거주하는 일부 불법 거주자들을 단속하는 것 외의 특별 조처는 최소한 겉으로는 취해지지 않았다.

등소평은 거듭된 실각과 복권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권력 투쟁의 거센 물살을 제어해온 타고난 정략가이자, 우선 먹고 살아야 한다면서 실사구시의 길을 연 탁월한 경세가였고, 동시에 빼어난 지략과 용병술을 지닌 군사 전략가였다.
‘하나의 중국’을 위해 그가 제시한 통일 원칙은 일국양제(一國兩制)였고, 홍콩·대만·마카오 문제는 바로 이 원칙 위에서 해결의 실타래가 풀려 나갔다. 그런 점에서 등은 또한 냉전 전후의 시대 상황을 꿰뚫어 본 외교 전략가이기도 했다.

외교 전략에서 그는 치밀한 논리와 명쾌한 화술, 왜소한 체구에 걸맞지 않는 두둑한 배짱으로 상대방을 압도했다. 82년 9월 중국을 방문한 영국 대처 총리를 상대로 펼친 홍콩 주권 협상에서 그는 특유의 화술과 논리를 선보였고, 그 대화록은 지금까지도 화젯거리로 남아 있다. 당시 그는 머뭇거림 없이 직설적으로 대처에게 파고들었다.

“홍콩 문제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제가 보기에 1~2년이면 능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중국 정부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주권에 대한 논의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홍콩은 본래 우리 땅입니다. 단, 현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홍콩 문제를 논의하는 것일 뿐이며, 주권에 대한 한 어떠한 논의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이어 자신이 제시한 시한 내에 홍콩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중국은 홍콩에 관한 정책을 일방적으로 선언할 수밖에 없으며, 그 후에도 홍콩 문제가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등소평이 사망함으로써 중국은 근·현대사의 한 장을 마감했다. 동시에 21세기의 중국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펼쳐들었다. 등은 중국 대륙의 개혁·개방을 입안하고 추진했다. 결과를 섣불리 점칠 수 없는 중국사 초유의 거대한 실험이었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그 실험은 지금도 중국 대륙 전역에서 폭발력을 지닌 채 추진되고 있다.

등소평 없는 중국 대륙은 이제 막 또 하나의 실험에 돌입했다. 개혁·개방이 경제 실험이라면 이제 막 시작된 실험은 정치 실험이다. 강택민(江澤民)을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도 예단하기 어렵다. 이 정치 실험 역시 그 총설계사는 등소평이었다.

결국 등소평은 사회주의 시장 경제 체제의 이름으로 추진되는 개혁·개방과, 권력 구도에서 집단지도체제라는 두 가지 과제를 중국 대륙에 남겼다.

등소평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개혁·개방을 진두 지휘했다. 이미 모택동(毛澤東) 시기에 중국 개혁을 독려하고 나섰다. 그는 75년 7월 국방공업중점기업회의에서 ‘동지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작은 병을 스스로 키우고 있다. 꾀병 앓는 신음소리가 낭자하다. 그런 영도 간부들은 차라리 집에 가서 푹 쉬는 게 낫다. 똥통 위에 섰으면 똥을 누워야지 똥은 누지 않고 도대체 무얼하고 있느냐?’라고 갈파했다.
등소평은 개혁·개방만 밀어붙인 것이 아니다. 역시 자신이 설계한 집단지도체제의 새로운 권력 구도를 무려 7년 동안이나 감독하고 지휘했다. 그의 생존 기간에 강택민을 정점으로 한 분점형 권력 구도는 별 탈 없이 유지되어 왔다. 하지만 감독자 등소평이 사라진 후에도 중국 지도부가 예전의 권력 구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는지는 불투명하다.

강택민 체제의 앞날과 관련해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으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강택민 체제가 당분간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으로 보고 있다. 강은 등소평 이후를 대비해 권력 공백을 신속하게 메우면서 개혁·개방 정책에 근거한 경제 성장을 추구해 왔다. 특히 강은 등의 개혁 노선을 이어받아 경제 성장 실적을 통해 자신이 정점으로 있는 현체제의 합법성을 인정받으려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올해는 홍콩 반환과 15차 당대회 등 중요한 대사를 여러 가지 앞두고 있으므로 무엇보다 강을 중심으로 한 체제 결속과 단결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내부 권력 투쟁에 소모할 시간이 없다.

당중앙위원회와 인민해방군은 등이 사망한 직후 후계자인 강택민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강택민 주석과 이붕(李鵬) 총리도 ‘등소평 동지의 노선을 계속 유지한다’고 강조했다. 당분간은 커다란 권력 재편이나 체제 변화가 없으리라는 예고이자 다짐이다.

당과 군의 충성을 다짐받은 강택민은 등소평 시대의 조율사였다. 등소평 사후 아직까지 강택민의 정치적 위상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당분간 강택민을 중심으로 한 권력 구도에 극적인 변화가 올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러나 모택동과 등소평에 이어 혁명 3세대가 이끌어갈 중국의 현재 상황은 모택동이나 등소평 못지 않은 강력한 리더십, 즉 조율사 이상의 실질적인 정치 권력 집중을 요구하고 있다. 등이 사망한 이튿날인 20일 당중앙위는 ‘당의 단합을 유지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성명을 내고 당의 단합을 강조했다.

강택민 上海幇 인맥 두터워 큰 권력 변화 없을 듯

강택민은 단순한 조율사가 아니었다. 권력의 3대 축을 이루는 당·정·군 곳곳에 포진한 상해방(上海幇) 인맥이 그를 뒷받침하고 있고, 국가 주석이자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서 짧지 않은 기간에 기반을 다져왔다. 국무원의 주요 요직에도 강이 입각시킨 인물이 그를 보좌하고 있다.

강택민은 89년 당총서기에 취임한 이래 자파로 분류되는 상해방 인사들을 당·정에 대거 기용했다. 현재 당내 상해방의 대부는 대만과의 협상 기구인 해협회(海峽會)의 왕도함(王道涵) 회장이다. 왕회장은 강이 다녔던 상해 교통 대학의 선배로 85년 상해 시장에서 물러나면서 강을 후임 시장으로 천거한 바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는 대만 문제에 관해 여전히 강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강택민의 상해방 인맥은 국무원에도 포진해 있다. 그 대표적 인물이 경제 개발의 사령탑을 맡고 있는 주용기(朱鎔基) 부총리와 오방국(吳邦國) 부총리. 두 사람 모두 상해 시 당서기를 거쳤다. 강은 또 오는 가을에 열릴 제15차 당대회에서 황국(黃菊) 상해 시 당서기를 중앙 정치의 요직에 앉히기로 하는 등 자파 세 불리기에도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다.

강택민은 군부내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이 약점으로 지적되기는 하지만, 이미 몇 차례에 걸쳐 단행된 군부 인사를 통해 자파 세력을 구축해 놓았다. 산동성 출신으로 산동방 인맥인 지호전(遲浩田) 국방부장, 장만년(張萬年)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등 군부 지도자는 강을 지원한 등소평이 군부 내에 포진시킨 등의 인맥이다.

중국은 97년 한 해 국내 문제에 매달려야 한다. 7월에는 역사적인 홍콩 귀속이 예정되어 있고, 10월에는 15차 당대회를 치러야 한다. 10월 당대회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이붕 총리의 임기 만료(93년 3월)에 따라 새로운 총리가 나와야 하는 등 어떤 형태로든 분점형 권력 구도가 개편될 상황이다.

상해방의 요직 진출 여부도 관심거리이고 교석(喬石) 전인대 의장의 향후 거취도 권력 구도 재편에 주요 변수이다. 그러나 현 중국 지도부가 국내 정치 안정을 최대 과제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급격히 변화할 가능성은 높지 않으리라는 것이 중국 문제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계속 추진해야 하는 국내 상황 역시 권력 구도의 급격한 변화에 제동을 거는 중요한 요인이다. 사회주의 시장 경제는 이미 가속도가 붙어 있고, 중국 대륙은 개혁·개방의 거센 물살에 온몸을 던져놓은 상태이다.

끼니 걱정 없는 ‘溫飽’가 최대 관심

중국 지도부 내에서 개혁·개방을 둘러싸고 보수파와 개혁파 간의 일부 갈등이 간혹 드러나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 개혁·개방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에 몸을 실어놓은 중국에서 보수와 개혁의 이념 대립은 빛바랜 지 오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도부 내의 이견은 개혁·개방의 속도와 방법에 대한 이견일 뿐 개혁·개방 자체에 대한 시시비비는 발 붙일 여지가 적다.

등소평 사후에도 중국이 개혁·개방을 계속 추진하리라는 전망은 진작부터 정설로 굳어져 왔다. 국제 정치 환경 역시 중국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을 좁혀 놓았다. 냉전 이후 국제 정치 무대는 경제력에 의한 우위를 누가 확보하느냐는 경제 논리가 깊숙하게 작용하고 있다. 중국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은 이제 막 등 따습고 끼니 걱정을 하지 않는 온포(溫飽) 문제를 해결해 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부유하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먹는 문제로 걱정하지는 않는다는 ‘작은 편안함’, 이른바 ‘샤오캉(小康)’이다.

샤오캉은 물론 등소평이 심혈을 기울여 몰아붙인 개혁·개방의 산물이다. 그는 개혁의 신봉자였다. 개혁을 주저하는 반대파에게 등은 ‘개혁은 혁명이다. 대담해야 한다’면서 ‘전족 여인의 걸음걸이처럼 아장거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개혁·개방은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것이며 자본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지적에도 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4인방은 사회주의의 풀 한포기(草)가 될 망정 자본주의의 싹은 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건 황당무계한 소리’라고 쏘아붙였다.

또한 등소평은 심천 특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심천 특구의 성은 ‘社’씨이지 ‘資’씨가 아니다’라면서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개방이 결코 자본주의가 아님을 강조했다. 그는 ‘선부(先富)’라는 개념도 도입했다. 개혁을 추진하기는 하지만 중국 인민이 한꺼번에 모두 잘살게 될 수는 없으며, 먼저 부자가 되는 층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개혁·개방의 부작용은 만만치 않다. 초고속 성장의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위협하는 복병은 곳곳에 숨어 있다. 물가 불안은 수년째 계속되고 있는 고속 성장의 이면에 드리운 짙은 그늘이고, 내륙과 연안의 지역 발전 불균형과 계속 벌어지고 있는 빈부 격차는 최대 난제이다.
국유(國有) 기업 문제는 비효율 차원을 넘어 중국 개혁의 관건이라는 지적이 나올 만큼 중국식 사회주의 정착의 선결 과제로 부각되어 있고, 대략 1억으로 추산되는 실업자 문제와, 실업자 대량 양산에 따른 범죄 증가 현상도 걸림돌로 등장해 있다.

사회주의 절반에 자본주의 절반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반사반자(半社半資)’라는 유행어는 격심한 빈부 격차를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개혁 후유증과 권력 투쟁 겹칠 땐 대혼란 예상

관료 부패도 개혁·개방이 낳은 대표적인 부작용 가운데 하나이다. 등소평도 일찌감치 공직자 기강과 부패 문제를 지적했다. 이도저도 아니고 어설프게 일을 하는 ‘만금유(萬金油·치료 효과가 확실치도 않으면서 여기저기 만병통치약처럼 쓰이는 중국의 기름약)’ 간부가 득시글거린다는 것이다.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 경제가 양산해낸 지역 격차·빈부 격차 부작용과 온갖 사회 병리 현상은 등소평 사후 강택민 체제가 어차피 칼을 들이대야 할 대상이다. 어디를 먼저 칼질해야 하는가, 어떤 칼을 써야 하는가 하는 해결책을 놓고 지도부 내에 이견이 노출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뿐이 아니다.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노선과 추진 방법 등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이견 노출이 권력 투쟁과 겹칠 경우 중국의 향후 진로를 속단하기는 더욱 어렵게 된다.

최근 들어 중국 지도부는 줄기차게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주창해 왔다. 홍콩 귀속과 미국·일본 등 강대국들의 중국 견제가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외적 요인이었다면, 사회 동요를 사전에 예방하고 개혁·개방 노선을 줄기차게 추진하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소수민족 문제에 대처한다는 것이 중국 인민의 대단결을 외치게 한 내적 요인이었다.

이 민족주의 캠페인은 등소평 사후 더욱 힘을 발휘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홍콩 귀속 이후와 대만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그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중국이 겨냥하는 것은 2010년 경제 선진국 진입이다. 군사 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것도 시간 문제이다. 모택동의 대장정은 신중국을 탄생시켰고, 등소평은 개혁·개방이라는 제2의 대장정을 통해 중국을 다시 한번 미국·일본·러시아 등 세계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등소평 사후의 중국은 ‘제3의 장정’이라는 미지의 길에 이제 막 발을 들여놓았다.

제3의 장정의 최종 목표는 중국 현대화이다. 현대화를 이룩하기 위한 수단은 중국이 실험하고 있는 사회주의 시장 경제 체제이다. 등은 중국의 현대화에 확신을 가지고, 그 이유로 네 가지를 꼽았다. △중국은 자원이 풍부하고 △공업과 과학 기술의 기초가 잘 갖추어져 있으며 △중국인은 결코 어리석지 않고 △정확하게 대외 개방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중국 근·현대사의 산 증인이자 스스로 ‘나는 중국 인민의 아들’이라고 말했던 등소평은 이제 한줌의 재로 변해버렸다. 중국의 품에 다시 안긴 홍콩땅을 밟아보고 죽겠다던 그의 마지막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등은 그의 생전에 홍콩 귀속이라는 선물을 중국 인민에게 바쳤다.

등이 사망하기 한 달여 전, 북경 시내의 한 대형 건물 옥상에는 국가 시책을 홍보하는 대형 광고판이 설치되었다. 그 광고판에는 등소평이 갈파했던 열 글자가 큼직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글귀는 개혁·개방의 핵심 실체가 무엇이며,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중국이 국책으로 추진해야 할 세기적 과제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놓고 있다. ‘국민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기고, 나라는 식량을 중히 여긴다(民以食爲天 國以糧爲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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