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몰린 ‘소문 의 城’ 젊은 영주
  • 崔 進 기자 ()
  • 승인 1997.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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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씨, 문민 정부 4년 내내 공천·인사·이권 개입설 무성…‘한보 사태 무관’ 검찰 발표에도 국민 의혹 안 가셔
‘소산(小山)이 거산(巨山)을 흔들고 태산(泰山)마저 진동시키고 있다’. 김현철씨가 아버지를 곤경에 빠뜨리고 온 나라를 요란하게 만들고 있다고 푸념하면서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요즘 시중 여론이나 언론은 자나깨나 온통‘김현철’일색이다. 야당은 일찌감치 현철씨를 국회 한보청문회 증인 1호로 지목해 놓고 있어서 그를 둘러싼 증인 공방이 치열할 전망이다.

92년 대통령 선거 때부터 나돈‘김현철 실세설’은 차기 대선을 앞두고 절정에 달했다. 문민 정부의 정치 유언비어는 김현철로 시작해 김현철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를 둘러싼 소문과 의혹은 4년 내내 그치지 않았다. 문민 정부의 또 다른 유시유종(有始有終)인 셈이다.

“공천 따려면 김소장에게 가라”

과연 김현철 실세설의 최종 종착지는 어디일까. 검찰은 현철씨를 소환해 26시간 동안 밤샘 조사했지만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했다. 검찰 조사 발표를 보면, 마치 현철씨의 평소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느낌이다. 그렇다면 현철씨는 한보 사건의 면죄부를 받았는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아니다.

많은 국민들이 아직도 그에게 면죄부를 주기를 유보하고 있다. 아니 더 많은 의혹과 불신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당초 단순한 참고인 자격으로 검찰에 출두한 현철씨가 하룻밤을 넘기며 한보 사태와 관련해 포괄적인 조사를 받은 것도 사실은 여론의 압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검찰 발표 이후에도 현철씨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여권은 내심 걱정이 태산이다. 하루속히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노동법 파동으로 가뜩이나 틀어진 민심이 완전히 등을 돌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권에서는 그 해법의 하나로 현철씨 해외유학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야당은 연일 성명을 내고 만약 현철씨를 해외로 도피시킨다면 국민적 저항을 면치 못할 것이라면서, 반드시 국회 청문회 증언대에 세우겠다고 벼르고 있다. ‘젊은 부통령’이 바야흐로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현철씨가 야당도 그 후속 증거를 확실히 들이대지 못하는 한보 연루설로 이처럼 곤욕을 치르는 것은, 문민 정부 내내 최대 실세로 군림해 온 배경 때문이다. 흔히‘김소장’으로 불리는 현철씨가 YS 버금 가는 정치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는 얘기는 현 정권 출범 직후부터 정가에 파다했다.

현철씨가 정치판에 첫발을 디딘 것은 87년 대선 때였다. 그러나 당시 그의 선거 운동은 홍보물을 뿌리거나 원론적인 조언을 해주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선거에서 패한 현철씨는 88년 3월 여의도에 중앙조사연구소라는 여론 조사 팀을 만들면서 정치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진가가 유감 없이 발휘된 것은 92년 대선 때 나라사랑운동실천본부의 청년조직과, 전병민씨가 주축이 된 동숭동 전략기획 팀 등 사조직을 주도하면서부터였다. 그때를 계기로 아버지의 1급 참모로 확실하게 자리잡았다.

자연히 현정권 들어 현철씨의 정치적 역할은 더욱 확대되고 구체화했다. 그 단적인 사례 하나. 현정권 출범 후 2년이 지난 94년, 민정계의 한 거물급 의원은 현철씨 쪽으로부터 ‘식사나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 의원은 대통령이야 정치를 함께 하는 사이지만 아들은 만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번번이 자리에 없다는 핑계를 대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중진 의원은 최근 사석에서 “그 친구 참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날 만나자고 할 위치가 아닌데. 세간의 소문이 상당 부분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술회했다.

중진 의원에게 스스럼없이 전화를 걸 만큼 기세 등등한 현철씨가 주요 선거 때에 뒷짐지고 있었을 리 만무하다. 15대 공천 당시 당 안팎에서는 현철씨와 이원종 청와대 정무수석, 강삼재 사무총장 3인이‘차 치고 포 쳤다’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경남 지역에 공천 신청했다가 낙천한 한 민주계 인사의 말. “일찌감치 김소장에게 매달렸더라면 낙천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 어린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이 자존심 상해 그만두었다. 당시 여권에는 공천을 따내려면 김소장에게 가라는 말이 파다했다”라고 털어놓았다.

15대 총선 때 서울 예술의전당 옆에 있는 사무실과 광화문 사무실이 현철씨의 선거 캠프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주로 30대 초·중반으로 구성된 현철씨 팀은‘신청사단’이라는 전국 조직망을 통해 권역별·지역구별 판세를 분석하고 대응 전략을 수립했다.

군 인사 때도 이름 오르내려

개각 때도 현철씨 개입설은 빠지지 않았다. 아무개는 현철계라느니 아무개는 현철씨에게 밉보여 경질되었다느니 하는 출처 불명의 소문들이 약방의 감초 격으로 따라다녔다. 현정권 출범 직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에 발탁되었다 3일 만에 물러난 전병민씨 인사에서 최근 군 인사에 이르기까지 김현철 이름 석자는 어김없이 오르내렸다.
지난해 군 장성 인사를 앞두고 한 대령이 민주계 중진 의원에게 인사 청탁을 하러 갔다고 한다. 그러자 이 중진은 가장 빠른 길이라면서 ‘김소장’에게 가라고 일러주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60대인 고위 인사가 현철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식사를 했다느니, 전직 장·차관들이 맨 먼저 현철씨측의 전화를 통해 자신이 입각한 사실을 알았다는 등 현철씨의 인사 개입설들이 요즘 언론에서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런 온갖 소문과 의혹 들에 대한 현철씨의 입장은 단호하다.“소문만 무성했지 실제로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지 않느냐. 그런 시각은 아버지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나 물증이 확인되지 않았을 뿐 소문을 반증하는 정황 증거는 숱하게 많다. 정·관가 곳곳에 포진한 현철씨 라인만 해도 그렇다. 현정권 출범 직후 청와대에서 사정 실무 작업을 주도하다 15대 때 국회에 들어온 ㄱ의원, 정보기관의 핵심 요직에 있다가 지난 12월 개각 때 장관에 임명된 ㅇ씨 등은 자타가 공인하는 현철계다. 이들 외에도 주변에서 현철계라고 지목하는 정·관계 인물은 얼마든지 있다.

이권 개입설도 무성했다. 케이블 TV 같은 굵직한 사업에서 한약업사 사건, 메디슨 연루설, 하다 못해 고속도로 휴게소나 교통신호등까지 웬만한 이권 사업마다 ‘배후에 현철이가 있다’는 소문이 어김없이 나돌았다.

도대체 왜 지난 4년 내내 권력 주변에서는‘김현철 증후군’이 끊이지 않았는가. 먼저 현철씨 개인의 성격 그리고 아버지 김대통령과의 관계 등 1차적 요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철씨는 외모는 물론 성격까지 아버지를 빼닮았다. 국내외 유력 언론들과 정면 대결을 피하지 않는 승부 근성, 일단 결정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저돌성, 지난해 메디슨 사건 때 전화 통화에서 보여준 불 같은 성격 등을 보면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실감난다는 것이 주위의 평이다.

YS “현철이가 열심히 한다” 각별한 애정 보여

그러한 현철씨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은 각별하다. 상도동 집안 내력을 훤히 아는 민주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대통령께서는 수십 년 동안 야당 생활을 하면서 자식을 보통 사람들 자녀처럼 키우지 못한 데 대해 무척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특히 김소장(현철)에 대해서는 각별했다. 불같이 화를 낼 일도 김소장에게는 그냥 넘어가곤 했다”라고 말했다.

지난 대선 직전에 상도동 식당에서 무언가를 논의하던 도중에 현철씨가 발끈 화를 내며 일어서 나가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YS는 “저놈, 참…” 하고 허허 웃고 말더라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이 측근은 93년 초 현철씨 유학설이 나돌았을 때 유학을 권유하는 것이 아버지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YS가 현철씨를 가까이 두는 것은 애틋한 혈육의 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지닌 참모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정치 9단인 YS조차 깜짝 놀랄 아이디어를 내놓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통일민주당 시절 현철씨가 중앙조사연구소를 만들어 아버지를 적극 돕던 무렵이다. 좀처럼 자식 얘기를 안하는 YS가 종종 사석에서 “현철이 그놈 참 열심히 하는 것 같아”라며 기꺼워하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지난 대선 때도 조직이나 자금, 인맥에 현철씨가 깊숙이 개입해도 그냥 두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불씨였을까. 상도동계의 한 고위 인사는“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게 다 부담이 됐다. 선거 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뛰어다녔는데, 그 사람들이 선거 뒤에 김소장을 가만 놔두었겠는가. 이런저런 청탁을 해 오고 만나주기를 간청해 온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선거라는 특수 상황이 현철씨를 구설의 주인공으로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질 나쁜 사람들이 현철씨의 이름을 팔아 호가호위(狐假虎威)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철씨를 바라보는 정치권의 시선은 얼음처럼 차갑기만 하다. 청와대의 몇몇 관계자들도 사석에서는“우리가 언제까지 김소장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나”라며 투덜거리기도 했다.민주계 의원들 가운데는 현철씨가 당당하게 국회 청문회에 나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고교 때부터 정치에 높은 관심

오늘날 현철씨가 한보 사태의 배후 차원을 떠나 정치권의‘빅뱅 변수’로 떠오른 배경은 여러 갈래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혈연을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 때문이다. 우리나라만큼 특정인이 정권을 잡으면 친인척이 덩달아 득세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5,6공 때도 그랬고, 현정권도 크게 보면 마찬가지다. 게다가 유별나게 보안을 중시하는 YS가 가장 확실하게 믿을 사람은 아들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YS의 막후 정치 스타일 때문이다. YS는 과거 군사 독재 정권과 싸우면서 공조직보다 사조직에 더 의지해 왔다. 지난 대선 때도 당의 공식 조직보다 민주산악회나 나라사랑운동본부 같은 사조직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YS가, 한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가 된 이후에도 사조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철씨의 정치적 기질 문제다. 현철씨는 고교 때부터 신문의 정치면을 주의 깊게 보고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아버지와 종종 정치 얘기를 할 만큼 어려서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국사에 개입하거나 무리수를 낳기도 한다는 지적이다. 현철씨에게 바른 말을 하는 참모들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철씨를 잘 아는 한 여당 인사는 과거의 핵심 브레인들이 청와대나 국회로 빠져나간 이후 그의 민심 안테나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 현철씨가 선택할 길은 크게 두 갈래다. 해외 유학을 떠나 다음 정권 때 돌아오는 측면 돌기 전략과,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 야당과 맞서는 정면 돌파 전략이다. 그러나 어느 쪽도 여의치 않다. 해외로 나가면 도피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고, 국회에 출석하면 문자 그대로 야당의 파장 공세를 온몸으로 맞받아야 한다.

현철씨는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 때 일반 국민들이 자신을 어떻게 본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아마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은 머리에 뿔이라도 달린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분명히 현철씨의 머리에는 뿔이 달려 있지 않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정치권과 언론, 일반 국민의 시각은 위험 수위를 넘었다고 할 만큼 험악한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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