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는 ‘저승사자’ 아니다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7.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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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금의 실체’ 잘못 파악해 금융 불안 심화…피해 의식 버리고 이행 조건 꼭 지켜야
지난 12월8일 임창렬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은 은행회관에서 35개 은행장과 만났다. 이튿날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같은 장소에서 7개 은행장과 회동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합의한 내용을 설명하고, 금융 위기의 진원지인 종금사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자리였다. 두 사람은 필요할 경우 은행에 대해 2조원에 달하는 특융도 약속했다.

금융 불안의 진원지인 종금사를 살리겠다는 정부의 약속은 어느 모로 보나 증권 시장에서는 대형 호재임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증시는 급락을 거듭한 끝에 12월 초에 기록했던 10년내 최저치(종합주가지수 376)보다도 떨어졌다(12월12일 현재). 정부의 특융을 국제통화기금이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관측 때문이었다. 실제로 정부와 국제통화기금 간의 합의안에는 정부가 금융기관을 지원할 경우 반드시 시장 경제 지향적인 조건들을 붙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양해 각서 17항). 결국 최근의 증시 폭락은 투자자들이 우리 경제 수뇌부 대신 국제통화기금을 더 의식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낯선 국제 기구에 우리의 목을 내맡긴 것은 유엔이 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처음이다. 그러나 당시의 유엔군과 달리, 우리 경제를 수술하기 위해 들어온 이 외부의 원군을 무조건 반길 수만은 없는 처지다. 우리가 느끼는 당혹스러움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금융 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기현상들에는 이런 당혹감이 반영되어 있다. 지난 12월5일 국제통화기금의 긴급 자금 지원이 확정되고 1차 지원분 56억달러가 유입된 뒤에도, 환율은 연일 상한선까지 폭등해 원화는 70% 가까이 절하되었다. 금리도 연일 급등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의 자금 지원이 확정되고 나서도 상황이 호전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IMF는 ‘환자’를 죽이지 않는다”

한 가지 가설은, 국제통화기금의 처방 자체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국제 자본 시장의 이해를 대변하는 국제통화기금이 이번 기회에 한국 경제에 대한 주도권을 확실히 쥐려 한 것이 아닐까.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너무 가혹한 수술로 한국 경제를 완전히 죽이는 것은 아닐까. 그렇잖아도 정부와 국제통화기금 간의 합의안에는 거의 완전한 금융 시장 개방안이 들어 있다.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는 듯한 조건들이다. 정치권 일각에서 등장한 재협상 요구와 이를 둘러싼 논쟁은 우리의 이런 정서를 반영한 것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문제는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던 대부분의 나라에서 제기되어 왔다. 이른바 ‘과잉 살육의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 of overkill)’. 미국의 일부 정치경제학자들은 80년대 초반 국제통화기금이 남미에 처방했던 정책의 파급 효과를 이렇게 불렀다. 국제통화기금의 처방전이 국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핵무기를 쓰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지불 중단 사태에 직면했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는 국제통화기금이 요구한 초긴축 정책을 펴는 바람에 핫머니(국제 투기 자금)가 대량 유입되는 일대 혼란을 겪었다.

그들 국가와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한국에서도 이미 국제통화기금이 내놓은 ‘과도한 정책’에 따른 후유증이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국제통화기금과 합의한 대로 망할 회사를 망하게 놓아둔다면, 종금사와 증권사, 그 다음은 은행으로 이어지는 금융기관 연쇄 부도가 불가피할 것이다. 그 와중에 상당수 기업의 부도가 불을 보듯 뻔하다. 현재 상장 기업의 절반 이상이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다.” 선경경제연구소 주광명 연구위원의 주장이다.

구미의 일부 유력 신문들도 국제통화기금을 비난하고 나섰다. 한국 경제의 기본이 남미와 동남아에 비해 더 나은데도 너무 가혹한 정책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특히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 9일 저명한 경제 평론가인 마틴 울프의 글을 싣고, 국제통화기금이 구태의연한 처방을 계속하고 있다고 신랄히 비판했다. 이 평론가는 국제통화기금이 요구하는 대로 한국 정부가 극도의 저성장과 초긴축을 추구할 경우 상황이 더욱 악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금리가 뛰어 부채에 시달리는 기업과 금융기관 들의 사정을 더욱 악화시킴으로써 신뢰를 회복하기보다는 위험을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의 처방전은 늘 재정 균형 혹은 흑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는 나중에 해당 국가로부터 채권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건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다른 경제 지표들이 희생된다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렇다고 해서 국제통화기금이 해당 국가의 경제 위기를 처리하는 데 문외한이라거나, 그 처방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채무국 처지에서 당장은 가혹해 보이는 국제통화기금의 요구 사항들이 궁극적으로는 해당국 경제에 좋은 영향을 미쳐 왔다. 예컨대 국제통화기금이 개입한 이후 중남미 국가들의 경제 상황은 대부분 나아졌다. 국제 기구에 대해 해박한 문정인 교수(연세대·정치학)는 “국제통화기금이 전지전능한 의사는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채권을 회수해야 하기 때문에 결코 환자를 죽이는 처방을 내놓는 법은 없다”라고 말한다.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이 확정되고서도 한국 경제가 더욱 불안정해진 것은, 오히려 국제통화기금과 그들의 요구 사항에 대한 우리의 피해 의식과 관련이 깊을 수도 있다. 국제통화기금과의 협상을 다시 해야 한다는 정치권 일각의 주장이 좋은 예다. 국제통화기금을 비롯해 국제 금융 시장에서는 우리가, 특히 새로 들어설 정부가 자신들과의 약속을 지킬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버리지 않고 있는 상태다.
정부와 국제통화기금 ‘충돌’ 가능성

이로 인해 외국 금융기관들은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고, 이는 다시 생사의 기로에 선 우리 금융기관과 기업의 자금 요구를 압박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를 의식한 듯, 재협상을 주장했던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자신의 주장은 국제통화기금과 추가 협상을 하겠다는 뜻이라고 해명했다. 사실 경제 상황의 변화에 따른 추가 협상에 대해서는 국제통화기금측도 공개적으로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정부와 국제통화기금은 앞으로도 부딪칠 가능성이 높다. 금융기관과 기업의 연쇄 부도를 막으려는 정부는 내년 초까지 금융기관에 엄청난 지원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은 이 때까지 은행들의 자기자본이 국제결제은행(BIS)이 정한 비율인 8%에 이르지 못할 경우, 그러한 은행의 회생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정리를 요구하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

반면 정부는 지난 10일 금융기관과 대기업의 연쇄 부도 상황이 우려되자,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통해 종금사 지원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은행들에게 종금사를 지원하라고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은행들이 국제통화기금이 요구하는 국제결제은행 기준을 못 맞추더라도, 정부가 은행의 후순위 차입을 매입해 이를 벌충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이 확정된 이후 최대 고비가 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또 있다. 국제통화기금이 이런 조처를 용인한다 하더라도, 은행들이 정부의 이런 조처를 과연 믿을 것이냐 하는 것이다. 정부는 국제통화기금과의 협상을 전후해 금융기관과 기업의 불신을 자초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9개 종금사에 대한 업무 정지 명령을 내리기 전날 재경원은 은행들로 하여금 종금사에 콜자금을 지원하라고 종용했다. 이 요구에 따랐던 은행들은 다음 날 종금사에 대한 영업 정지 명령으로 자신들의 돈이 꽁꽁 묶인 사실을 알고 망연자실했다. 재경원은 9개 종금사 외에 추가로 영업 정지를 시킬 종금사는 없다고 했다가, 지난 10일 추가로 5곳을 더 폐쇄한 것이다.

이 때문에 금융기관은 정부를 불신하고, 기업은 금융기관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현재 금융 시장은 이들이 서로 달러화를 포함한 자금을 내놓지 않아 사실상 마비된 상태다. 신뢰에 기반한 정부와 금융기관과 기업 간의 성장 메커니즘이 상호 불신 때문에 공멸 메커니즘으로 변한 셈이다.

정부, 외환·금융 시장 개입 불가피

국제통화기금은 중남미와 동남아와는 또 다른,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한국의 이런 금융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원장은 “정부가 당장 해야 할 일은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라고 주장한다.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뾰족한 수는 없을까. 장기적으로는 국제통화기금의 극약 처방이 한국 경제에 필요한 약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국제통화기금에 모든 것을 맡기고 손을 놓고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금융 시장이 마비되어 금융기관과 대기업의 연쇄 부도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전적으로 시장 경제 원칙에 맡겨둘 수만은 없다.

정부는 외환 시장을 비롯해 금융 시장에 개입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경우 정부의 조처가 국제통화기금과의 합의안에 위배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을 수 있다. 예금 인출 사태를 겪은 서울은행과 제일은행에 대해 정부가 출자하기로 한 결정은 좋은 예다. 이 조처가 부실 금융기관에 대한 지원을 금지한 국제통화기금과의 합의안에 배치되느냐는 논란이 일기는 했지만, 상황 악화를 막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이에 대해 한 외국 증권사 임원은 “한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을 너무 의식할 필요는 없다”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이 제시한 개혁안에 정면으로 위배되지 않는 한, 국제통화기금은 정부의 정책 하나하나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에 대한 바른 인식은 이 모든 문제를 푸는 첫걸음일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은 우리를 구하러 온 자비로운 십자군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우리를 잡으러 온 저승사자가 아닌 것은 더더욱 분명하다. 그들에게 모두 맡겨도 곤란하지만, 그들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려도 곤란하다. 모든 경제 정책이 그런 것처럼, 이 둘 사이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것이 현재의 경제 위기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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