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스파이에 구멍 뚫린 한국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4.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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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산업 스파이 각축장이다. 반도체·휴대전화 기술을 빼내가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목숨 건 전투가 매일 벌어지고 있다. 철통 보안의 삼성이 두 번이나 뚫렸을 정도로 ‘적’은 막강하다. 더욱이 산업 스파이
“홍콩 커넥션이 있는 것 같다.” 지난 1월, 국가정보원(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로 전화가 걸려 왔다. 휴대전화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온 휴민트(제보)였다. 홍콩 쪽으로 국내 휴대전화 기술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는 막연한 제보였다.

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는 곧바로 내사에 들어갔다. 제보가 모호하더라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산업 기밀은 한번 빠져나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산업기밀보호센터 요원 2명이 전담했다. 이들 2명은 모두 휴대전화 키퍼, 휴대전화와 관련된 기술 유출을 막는 전문가다. 업무 특성상 산업기밀보호센터 요원들은 반도체·휴대전화·LCD 등으로 전담 분야가 나뉘어 있다.

국정원 요원들은 저인망식 내사에 들어갔다. 우선 홍콩 쪽부터 훑기 시작했다. 국정원 홍콩주재원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파견된 주재 요원들이 조용하게, 그러나 분주하게 움직였다. 산업 기밀과 관련된 수사는 보안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보다 눈에 안 띄게 내사를 벌여야 한다. 자칫 내사 기미가 탄로나면, 산업 스파이는 잡더라도 산업 기밀은 넘어가기 십상이다.

홍콩의 휴대전화 업계를 뒤진 끝에 ㅋ사가 용의 선상에 올랐다. 주요 임원이 한국인이었고, 한국 휴대전화를 중국 시장에 파는 중개 회사가 최신 휴대전화 기종 개발에 착수했다는 ‘이상 동향’이 파악되었다. 국정원은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은 격이었다. 내사는 속도를 냈다.

홍콩 ㅋ사에 대한 정보를 모두 긁어모았다. 한국의 코스닥에 해당하는 홍콩의 GEM에 상장한 ㅋ사는 한국인이 지분 15.45%를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는 외국 자본이었다. 중국과 홍콩 등에 자회사를 4개 두고 있었는데, 국내에도 ㅋ코리아가 들어와 있었다. 연결 사슬을 찾은 셈이었다. 국정원은 휴대전화 케이스를 생산해 수출하는 ㅋ코리아에 주목했다. ㅋ코리아 주변을 파악한 결과, 휴대전화 제작 연구소 격인 자회사 ㅊ코리아를 운영하고 있었다. 막연한 제보가 두 달 만에 중요한 첩보로 바뀐 것이다.

국정원 요원들은 ㅋ코리아 조 아무개 부사장(35)을 밀착 내사했다. 산업 기밀이 샌 곳, 이른바 출구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조부사장은 용의주도했다. 그는 휴대전화를 2~3개 번갈아 사용하며 국정원 추적을 따돌렸다. 내사가 시작되면서 그는 간간이 홍콩을 오갔다. 국정원 요원들은 초조해졌다. 자칫 산업 기밀이 빠져 나가는 것 아닌가 염려했다. 홍콩까지 따라붙었다. 다행히 별다른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조부사장에 대한 내사가 막히자, 국정원 요원들은 방향을 틀었다. 곧장 출구 조사에 착수했다. 국내 기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최신 휴대전화 기술이 빠져나올 만한 기업은 한정되어 있다. 빅3으로 불리는 국내 회사들을 뒤졌다. 빅3 가운데 보안 의식이 비교적 약한 곳부터 점검했다. 산업 정보 유출 수사의 기본은 연구원들의 이동이다. ㅍ사 인사 담당자를 국정원 요원들이 조용히 불러냈다. “지금부터 들은 말은 사장한테도 보고하면 안된다. 당분간 당신만 알고 있어야 한다.” 보안 수칙을 강조하고, 휴대전화 기술 유출을 귀띔했다. 이 인사 담당자로부터 지난 1년간 퇴직자 명단을 확보했다. 총 40여 명. 국정원 요원은 ‘뺄셈’ 수사에 들어갔다. 한명씩 확인 작업을 거쳐, 혐의가 없으면 지워가는 뺄셈 확인을 한 끝에 국정원 요원들은 무릎을 쳤다. ㅍ사 양 아무개 팀장(32) 등 연구원(8명)이 지난 한 해 동안 ㅊ코리아로 직장을 옮긴 것을 확인했다. ‘조직표’가 그려졌다.
지난 5월19일 서울지검 컴퓨터수사부는 홍콩의 ㅋ사 조 아무개 부사장과 양 아무개 팀장 등 8명을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과 업무상 배임 혐의로 기소했다. 제보를 접수한 지 다섯 달 만에 일망타진한 것이다. 다행히 휴대전화 제작 관련 핵심 기술이 해외로 넘어가기 전이었다. 기술이 유출되었다면, 3년간 총 4조5천억원대 손실이 예상되었다.

올해 들어 여섯 번째 적발된 국내 산업 정보의 해외 유출 시도였다. 국정원은 지금까지 적발된 건수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추정한다.

한국이 바야흐로 산업 스파이 각축장으로 변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핵심 기술을 손에 넣으려고 뚫는 자와 막는 자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어찌 보면 한국이 기술 선진국으로 도약했다는 의미다. 세계 경제포럼의 지난해 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기술 경쟁력은 세계 6위, 특히 휴대전화·반도체 분야에서는 최고를 다투고 있다. 그러나 보안 수준은 걸음마 단계다. 그래서 산업 스파이들에게 한국은 더없이 훌륭한 먹잇감이다.

산업 스파이 침투도 점점 용의주도하고 대담해지고 있다. 이번에 적발된 ㅍ사만 보더라도 무려 1년 동안 핵심 기술을 곶감 빼먹듯 빼내갔다. 그랬는데도 ㅍ사는 국정원이 알려준 뒤에야 기술이 빠져나간 사실을 알아챘다.

그 시작은 2003년 1월로 거슬러올라간다. 홍콩 ㅋ사 조 아무개 부사장은 ㅍ사 양 아무개 연구팀장에게 스카우트를 제의했다. 스카우트비 1억2천만원, 연봉 5천5백만원에 수십억원대 스톡옵션까지 제시했다. 로또복권식 스카우트 제의를 양팀장은 마다하지 않았다. 조부사장이 지시한 대로 동료 연구원들까지 포섭했다. 지난해 8월까지 총 6명을 포섭했다. 양팀장의 제안에 솔깃한 6명은 입사 2~3년차, 30대 전후의 젊은 연구원들이었다.

포섭 대상 선정은 치밀했다. 휴대전화를 만들려면 구동 원리인 레이어, 연결 기능인 프로토콜, 외장 기능인 애플리케이션이 필수다. 조부사장은 양팀장을 통해 3개 부문 연구원을 2~3명씩 시간차를 두고 전직시켰다.

조부사장이 노린 먹잇감은 ㅍ사가 2백5억원을 투자해 만든 최신 기종이었다. 조부사장이 연구원들에게 지급한 스카우트비와 연봉은 총 11억6천만원, 그러니까 홍콩의 ㅋ사는 한국의 ㅍ사가 2백5억원을 들여 개발한 최신 휴대전화를 거의 거저 먹으려 했던 셈이다.

ㅍ사로부터 학비 보조를 받아 박사 학위까지 받은 연구팀장은 두 얼굴의 산업 스파이였다. 지난해 9월, 양팀장은 외장형 하드 디스크에 통째로 기술을 복사해 퇴사했다. 이들이 빼돌린 기밀 파일은 총 7만5천개, A4 용지로 따지면 100만장 분량이었다. ㅍ사 관계자는 “시차를 두고 개인적인 사유로 전부 퇴사해 짐작조차 못했다”라고 말했다.
국정원에 따르면 1998년부터 적발된 산업 스파이 사건은 모두 46건, 유출되었을 경우 피해액은 무려 38조원에 달한다.

국내에 산업 스파이가 본격적으로 침투한 것은 외환위기 직후부터다. 평생 직장이 사라지고 이직이 보편화하면서 스카우트를 미끼로 핵심 연구원들을 포섭하기가 쉬워졌다. 국내 휴대전화와 반도체 등 첨단 기술 발전은 산업 스파이들의 한국행 골드러시를 이루었다.

정부나 기업도 마냥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국정원은 산업기밀보호센터 인력과 지원을 늘렸고, 검찰에도 산업 기밀 관련 전문 검사가 늘어나고 있다(상자 기사 참조). 국내 기업 가운데 가장 보안이 철저한 곳은 삼성이다. 삼성전자나 삼성 SDI는 ‘관리의 삼성’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최고 보안 시설을 자랑한다.

서울 태평로 삼성전자 본관은 철옹성이다. 본관 출입구에는 지하철에나 있는 보안 펜스가 설치되어 있다. 직원들은 개인 신상 명세가 담긴 스마트 카드가 있어야만 통과할 수 있다. 방문객도 방문증을 받고 공항 검색대와 같은 X선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몰래 플로피 디스켓에 기밀을 담아 가더라도 X선 검색대를 통과하면 저절로 삭제된다. CD도 마찬가지다. 소지품은 모두 검색되고, 노트북은 요주의 대상이다. 노트북 소지자는 인적 사항이 전부 기록된다. 최고위급 임원이라도 서류 봉투를 들고 나올 수 없다. 보안필증이나 다름없는 빨간 딱지가 봉인된 봉투만 통과가 허용된다.
삼성 계열사 어느 사무실에나 들어서면, 환풍구나 형광등 스피커 틈새에 조그만 스티커가 붙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삼성 자회사인 보안업체 ‘에스원’ 스티커다. 때때로 도·감청 여부를 체크하고, 안전하다는 의미로 봉인 스티커를 붙여둔 것이다. 삼성은 보안을 시스템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지난 4월13일 삼성SDI 김성기 차장(가명)은 퇴근 무렵 전화를 받았다. “곧장 OO지방 사업장으로 내려가시오.” 사내 보안팀의 지시였다. 김차장은 책상 서랍에서 ‘보안 마패’를 꺼냈다. 그리고 지방의 한 사업장으로 향했다. 도착 시간은 밤 9시. 직원들이 전부 퇴근한 사업장에 도착한 김차장은 보안 직원에게 마패를 보여주었다. ‘보안어사 출두’였다.

김차장은 다음날까지 해당 사업장의 보안 사항을 세세히 점검했다. 연구원들의 PC 점검은 기본이고, 임원들 방까지 모두 뒤졌다. 만일 임원급 사무실에서 서랍을 열어, 서랍이 잠기지 않은 채 열려 있으면, 김차장은 서랍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압수해 버렸다. 이른바 서류 보안 위반이었다. 위반 사항이 나오면, 사업장의 최고책임자를 호출하고, 호출받은 책임자는 밤이든 새벽이든 30분 안에 도착해야 한다. 현장에서 문제점을 지적받고, 확인 사인을 해야 한다. 김차장은 다음날 김순택 삼성SDI 사장에게 보안 보고서를 제출했다.

삼성SDI는 2001년부터 보안어사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보안어사 임명은 김순택 사장이 직접 한다. 누가 보안어사인지도 기밀 사항이다. 서너 달에 한 번씩 보안어사가 출두하는데, 보안어사에게도 출발 한 시간 전에야 보안 점검을 할 사업장을 알려준다.

보안 시스템과 보안어사 제도, 에스원 등 최고의 보안팀까지 3중 잠금장치를 갖추었지만, 철옹성 삼성도 1998년에 이어 지난해 6월까지 산업 스파이에게 두 번이나 뚫렸다. 일개 연구원이나 직원이 아니라 임원급 인사가 산업 스파이였다.

삼성SDI 천안공장 고객품질그룹장 정 아무개 부장(45)은 플로피 디스켓 취급 허가를 받았다. 보안을 이유로 삼성SDI는 플로피 디스켓 사용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다만 연구 목적에 한해 부서장 허락을 받아 취급을 허가하고 있다. 정부장은 1984년 입사해 연구원·연구소 개발실장·PDP 개발팀장까지 거친 삼성맨이었다. 회사도 의심 없이 그에게 플로피 디스켓 취급을 허가했다. 정부장은 연구를 핑계로 플로피 디스켓에 부하 직원들을 통해 수집한 차세대 디지털 영상 장치인 PDP 제작 신공법을 몽땅 담았다. 그리고 자기 집에 있는 컴퓨터에 자료를 옮겨두었다.

삼성맨을 산업 스파이로 돌변하게 만든 것은 사소한 이유였다. 정부장은 그 해 승진 심사에서 탈락하자 딴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정부장에게 접근한 쪽은 타이완 기업이었다.
전 삼성SDI 선임연구원으로서 한솥밥을 먹던 대학 후배 김 아무개씨가 정부장에게 접근했다. 김씨는 삼성이 1천8백55억원을 들여 개발한 PDP 공법을 타이완 회사에 팔아넘기자고 제안했고, 구체적인 액수까지 합의했다. 정부장이 받기로 한 액수는 30억원대. 승진에서 탈락한 그는 돈으로 ‘상류 인생’을 꿈꾸었지만, 지난해 11월 검찰에 붙잡혀 ‘하류 인생’으로 전락했다. 정부장이 파일을 전송하기 전에 검찰이 급습해 유출을 막을 수 있었다. 삼성SDI 관계자는 “그 사건으로 가장 중요한 보안은 시스템보다 사람임을 절감했다”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해당 기업뿐 아니라 국정원이나 검찰도 놀라게 만들었다. 철옹성 삼성이 뚫리면서 산업 스파이 안전지대가 사라졌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산업 스파이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한국은 협공을 당하는 국면이다. 삼성SDI나 휴대전화 업체인 ㅍ사 사건에서 보듯, 한국이 앞선 기술 분야에는 후발국 산업 스파이가 대거 침투하고 있다. 특히 중국쪽 공세가 거세다. 휴대전화 기술의 8할은 중국 쪽으로 유출된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한목소리다. 외교 분쟁을 의식해 내놓고 불만을 터뜨릴 수도 없어 벙어리 냉가슴일 뿐이다. 한 휴대전화 업체 관계자는 “한국이 마늘 수입을 억제하자 중국은 휴대전화 수입 규제로 맞섰다. 배째라는 식인데, 거기다 대놓고 산업 스파이짓 하지 말라고 하면 장사 그만하겠다는 소리다”라고 말했다.

중국이 후방 공격을 한다면, 미국이나 일본 등 한 발짝 앞선 기술 선진국은 보복전을 전개한다. 지난 4월 ㅈ사 서 아무개 상무가 산업 스파이 혐의로 검찰에 적발되었다. ㅈ사는 LCD 제작 공정을 특화한 국내 업체로, 전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미국의 A사에 맞선 다윗이었다. 선발 업체인 미국의 A사가 ㅈ사가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막으려고 서상무를 통해 기술 유출을 시도한 것이다. 1999년 ㅈ사에 입사하기 전까지 서상무의 직장이 바로 A사였다. 서상무는 결국 트로이 목마 역할을 한 셈이었는데, A사는 자신들과 무관하다며 딱 잡아뗐다.

미국, 산업 스파이 색출 요원 3만명

뺏고 뺏기는 약육강식의 산업 스파이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각국은 서둘러 울타리를 강화했다. 1996년 미국은 외국인에게 산업 기밀을 유출할 경우 15년 실형 또는 50만 달러 벌금형에 처하는 경제 스파이 처벌법을 제정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외국 산업 스파이 활동을 감지하기 위해 해외본부를 20개에서 44개로 늘렸다. 정부 부처 합동으로 국가방첩센터(NCIX)를 2001년에 설립해 3만명이 산업 스파이 색출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도 국가보안위원회(KGB) 후신인 연방안전국(FSB)에 전담반을 구성해 첨단 기술 인력을 집중 관리하고 있다. 일본 역시 지난해 2월 기술 유출 방지 지침을 발표하며 산업보안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이제야 울타리를 치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부정경쟁방지법부터 손질했다. 오는 7월 발효 예정인 개정법안에서는 양벌 규정을 강화해 벌금을 이득액의 2배에서 최고 10배까지 부과하게 했다. 그동안 미수범을 처벌할 수 없었는데 예비 음모에 대해서도 처벌 규정을 두었다. 지난 3월에는 국정원이 주도해 69개 기업이 참여하는 산업보안협회를 구축했다.

치열한 산업 스파이 전쟁은 국가 대리전 양상이 되고 있다. 산업 정보를 지키느냐 뺏기느냐 문제는 이제 죽느냐 사느냐 문제인 것이다. 대한민국은 제3차 산업 정보 전쟁에 휩싸였다. 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승패에 대한민국의 내일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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