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의 위기, 인류 위기 부른다
  • 李文宰 기자 ()
  • 승인 1995.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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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강요하는 ‘강한 남성성’ 확보 못해…남성의 위기는 인류의 위기 초래
몸뚱이 하나로 가난을 이겨내고 어엿한 가정을 꾸민 40대 가장. 근검 절약이 몸에 뱄고 오직 일밖에 몰랐다. 그게 화근이었다. 아내는 “사내가 좀스럽게시리…, 너희들은 아빠 같은 사람이 되면 절대 안돼”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내의 달라진 교육 내용을 알 길이 없는 가장은 언제나 그랬듯이 직장에서 퇴근하는 대로 곧장 귀가해 신발장이며 책상, 냉장고 속을 들여다보며 “이게 뭐냐, 아껴 써라”고 지시하곤 했다.

어느날부터인가 귀가하면 아내와 자식들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 버리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직장에서도 부하들이 그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일밖에 모르는, 앞뒤가 꽉 막힌 꽁생원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심각해졌다. 눈썹 사이에 주름이 패기 시작했고 위장병이 나 얼굴이 노래지고 말았다. 최근 개설된 ‘남성의 전화’(02-652-0458) 모정애 실장이 들려준 상담 사례이다.

왜 모든 남자가 울고 있는가

동창회 같은 자리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또 다른 사례 하나. 몸이 천근이 되어 뒤늦게 집에 돌아온, 수험생을 둔 한 가장. 식탁 위에 있는 과일을 하나 집어드는데 “그거 애들 간식이예요!”라는 아내의 호통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이 가장도 앞의 가장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위의 두 가장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무엇을 위해 나는 여기까지 달려왔는가’라는, 보상 받을 데라고는 어디에도 없는 자문을 했을 것이다. 이 무기력한 자문은, 이 시대 30대 중반 이상의 가장들이 저마다 붙잡고 있는, 그러나 떨쳐내 버리고만 싶은 화두가 되어 있다.

중년 가장만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직장 상사에게 꾸중을 들으면 전화통을 붙잡고 어머니에게 하소연하는 신입 사원, 같은 반 여학생에게 얻어 터지고 찔찔 짜는 국민학교 남학생, 애인에게 버림받고 징징 우는 젊은 사내, 부부싸움을 하면 어머니에게 달려가는 젊은 신랑, 아내가 적으로 보이는 젊은 남편, ‘명예롭게’ 실직(명예 퇴직)당한 뒤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는 중년 가장, 정년 퇴임한 젊은 노인들….
남자들은 추락하고 있는데, 추락하는 그들에게는 날개가 없다. 남성성 붕괴 현상은 연령과 직업, 신분과 지역을 떠나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프랑스의 한 페미니스트 사회학자가 말했듯이 현대의 남성은 지금 모두 울고 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남성성의 일상적 위기는 다름 아닌 강요된 남성성에서 비롯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남성다움이 왜 문제인가? “여자는 태어나지 않는다,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명쾌한 지적은 오늘의 남성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80년대 들어 미국을 중심으로 강력한 자장을 형성하고 있는 남성학(93쪽 기사 참조)은 물론, 여성학의 선두에서도 왜곡되고 강요된 남성성이 남성을 남성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고, 나아가 여성과 자녀들에게도 심한 역기능을 가져왔다고 강조한다.

남성들은, 남성성의 본질은 투쟁 본능이라면서 여성과 자연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그 남성성은 이제 ‘만들어진 것’이라고 판명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남성성은 부메랑이 되어 남성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다. 어떤 남성들은 벌써 그 부메랑에 맞아 넘어지고 있다.

이같은 성(sex가 아니고 gender) 정체성에 관한 연구들은 모계 사회 이후 인류를 지배해온 남성 지배 사회의 종말을 강력하게 예고, 견인한다.

한 사회가 남성성을 강화시키는 메커니즘은 유구하고(육아, 신화와 속담 등) 다양하고(대중 매체와 일상적 대화 등) 섬세하고(생물학적 결정론, 문학과 영화, 드라마와 광고 등) 또 강력하다(산업화·근대화·세계화 슬로건 등).

세계화 원년으로 ‘거듭나고 있는’ 광복 50주년은, 다르게 돌아보면 남성들이 시기 별로 강제된 남자다움에 혹사 당해온 50년이기도 하다. 거칠지만, 이 시기는 전전(50대 이상) 전후 (30대 후반~40대 후반) 신세대(60년대 이후 출생)로 구분된다. 각 세대는 저마다 차별화한 ‘집단 성년식’을 통과해 왔다. 국가 권력이 베푼 그 성년식을 전후해 그 세대의 남성다움이 고정되는데, 거기서 일탈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도표 참조).
어머니 치마폭에 감겨 있는 남자 아이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성인 남성(전사)으로 키워내기 위해 그 사회는 성년식(통과의례)을 반드시 치렀다. 그러나 산업 사회가 급진전할수록 성년식은 사라지고 말았다. <남자만의 고독>을 펴낸 미국의 시인 로버트 블라이는, 성년식 부재가 부성의 부재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사회의 남성성 및 여성성 부재를 이끌어낸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전쟁과 혁명, 근대화, 군사 독재, 민주 항쟁, 징병제, 이농향도, 월남전, 핵가족화 등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급격한 변화를 거듭해온 한국 사회는 청년들에게 거부하기 어려운 성년식을 제공했다. 한국 전쟁 이전(혹은 전쟁중)에 태어나 폐허 위에서 ‘근대화’를 밀고 나온 전전 세대의 성년식은 4·19와 5·16이었다. 승리와 패배를 같은 시기에 체험한 이들은 ‘가부장의 황혼’ 속에서 근대화 드라이브에 적극 편입되었다. 전전 세대에게는 아직 ‘가장의 아랫목’이 확보되어 있었다.

전쟁 와중, 혹은 전쟁 직후에 태어난 전후 세대, 즉 현재의 30~40대는 ‘도시 핵가족의 첫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 연탄 아궁이가 사라질 즈음 이들의 남성성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농경 공동체사회 마지막 가장의 아들들인 이 세대는 도시 핵가족 사회에 처음 진입해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이 경계 위의 샌드위치 세대가 바로 남성성 위기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남성성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오히려 그 남성성은 ‘타도’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독일의 대표적인 정신분석학자 A. 미체를리히의 <아버지 없는 사회>에 따르면, 60년대 미국 대학의 학생운동은 부성 부재와 연관된다. 아버지가 낮에 무엇을 하는지 확인할 수 없는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는 사악한 존재로 각인되고 부정해야 할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70~80년대 한국 젊은이들의 민주화 운동 또한 군사 정권으로 대표되는 ‘아버지 죽이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의 싸움으로 성년식을 치른 그 아들들은 고도 관리 사회에서 원자화하는 한편, 미시족을 꿈꾸는 ‘여우 같은 아내’를 통해 남성성을 부여받는 ‘토끼 같은 자식’ 앞에서 무기력해지고 있다. 아버지를 부정했지만, ‘새로운 아버지’는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미체를리히의 견해에 동의한다면, 오늘의 젊은 아버지는 어머니와 연합전선을 펴는 어린 아들들로부터 곧 공격 받게 되어 있다. 어린 아들들은 도무지 아버지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정하거나 모방해야 할 아버지 자체가 없는 이 신세대들에게 주입되는 남성성의 통로는 어머니와 무차별적인 대중 매체들이다. 그 자신이 왜곡된 여성성의 지배를 받고 있는 젊은 어머니가 ‘피곤한 남편’을 모델로 정할 리는 만무하다. 드라마와 광고, 스포츠, 대형 사건 등을 충격적 이미지로 전달하는 대중 매체가 일러주는 남성성 또한 남성성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기만 하다(94쪽 기사 참조).
거세 당한 남성성, 자학하는 남성성

성은 생물학적으로 XY 염색체의 결합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데, 여성이 같은 염색체인 XX인 데 견주어 남성은 서로 다른 염색체 XY의 ‘불안정한’ 결합이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 천부적으로 약하다는 주장의 근거가 여기서 비롯한다. 남성성의 본질을 탐사하는 프랑스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엘리자베트 바텡테의 는, 남성이 더 약하다는 사실을 프랑스 남녀 유아의 사망률과 병원 치료비 차이를 들어 뒷받침한다. 남아가 많이 죽고, 같은 기간의 여아에 견주어 남아의 병원 치료비가 더 많이 든다는 것이다.

남성이 사냥꾼이었던 수렵 채취 사회에서도 남성의 역할은 남성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미미했다. 조혜정 교수(연세대·사회학)의 <한국의 여성과 남성>은, 그 사회의 성별 분업은 뚜렸했지만 실제 식량의 70~80%는 여자들이 담당했다고 밝힌다. 남성이 가끔 잡아오는 ‘큰 짐승’은 여성들이 장만한 음식보다 특별했을 뿐이다.

고도 산업사회에서의 남성성은, <남자의 성해방>을 펴낸 재일교포 작가 양석일씨에 따르면, 거세당한 남성성이고 스스로를 자학하는 남성성이다. 남성의 지배욕·투쟁욕을 에너지로 한 산업화는 남성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수탈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이 관리 사회를 가동시키는 시스템은 이중적이고 또 자동적이다. 양씨는, 관리 사회 속의 남성이 자기 내부에 관리하는 자와 관리 당하는 자를 동시에 집어넣고 있음을 발견했다. 남성들은 분열증적 상태에 있지만, 거기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가 없다.

한국의 남자 아이가 성인 남성으로 거듭나기는 외국에 비해 훨씬 어렵다(94쪽 기사 참조). 사회는 선진국 못지 않은 고도 관리 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반면, 육아나 교육 제도는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나미 박사는 “구미에 비해 한국 어머니는 지나치게 아들에 집착한다”고 지적한다.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날 틈이 없을 뿐만 아니라, 20세 직전까지 대학 입시라는 감옥에 갇히는 바람에 한 인간으로 독립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유아-어린이-청소년-성년으로 넘어가는 자연스런 단계를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나서서 치워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은 없다. 남성성의 위기에 관한 절박한 논의들은 여성 해방운동에 대한 ‘마마보이의 피해의식’이 아니다. 남성성의 위기가 남성 자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자의 성해방>이 간파했듯이 이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사이를 매개하는 것은 신화와 사랑이 아니다. 그 매개체는 상품(물건)이다. 상품 논리가 가족관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왜곡된 성 정체성은 마침내 남편과 아내를 서로 상품화(물질화)하고 있다. 남성성의 위기의 본질은 여성성은 물론이고 인간성 자체를 극한으로 몰아가는 데에 있다.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성 정체성의 위기에서 출발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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