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의 쌀회담의 막후 해결사 홍지선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5.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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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선 북한실장, 대북 채널 통해 쌀 회담 성사…청와대ㆍ안기부와 비밀리 공동 보조
북경에서 열린 남북한 차관급 쌀 회담을 막후에서 성사시킨 주역은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홍지선 북한실장이다. 북한 당국이 홍실장에게 한국의 쌀 제공과 관련하여 남북한 당국자 회담 가능성을 타진한 때는 6월2~6일이다.

홍실장은 6월2일 북경을 방문하여 북한 대외경제위원회 인사를 만났다. 홍실장이 그를 만난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남북 경제협력을 촉진하기 위한 세미나를 서울과 평양에서 개최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남북간 위탁가공 무역을 확대하기 위해 중국 심천에서 양국 기업인들의 집단 상담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측 인사는 접촉 과정에서 갑자기 홍실장에게 북경에서 남북 당국자 회담을 개최할 수 있는지 가능성을 타진했다. 홍실장은 7일 서둘러 귀국해 이를 정부에 보고했다. 정부는 그에게 다시 북경으로 가서 남북 당국자 회담이 열릴 수 있게 준비토록 했다. 그는 12일 북경을 재차 방문해 쌀 회담을 성사시켰다.

홍실장이 북경 회담을 막후에서 도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대북 대화 채널을 가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그가 구축한 북한 인맥은 김정우 라인이다. 김정우가 위원장으로 있는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는 외국 기업들의 대북 투자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홍실장이 김정우 라인과 채널을 개설한 시기는 올해 초이다. 작년까지 홍실장이 가동했던 대북 채널은 고려민족산업발전협의회 이성록 회장이었다. 그러나 올해 1월 고려민족산업발전협의회가 해체되어 대외경제협력추진위 산하로 들어가면서 홍실장의 대북 채널은 김정우 라인으로 바뀌었다. 홍실장은 국제무역촉진위원장으로 활동을 재개한 이성록과의 채널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그가 대북 채널을 열성적으로 구축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남북 경협 세미나와 위탁 가공무역 확대를 위한 상담회를 개최하는 데 있지는 않다. 그의 진짜 목적은 평양에 대한무역진흥공사 무역관을 개설하는 것이다. 홍실장의 이러한 노력은 대외적으로는 단순히 무공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홍실장의 대북 접촉은 안기부를 비롯한 관련 부처와 협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정부는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 전에 한국의 연락사무소를 평양에 설립하려고 한 것이다. 때문에 무역진흥공사가 개설하려는 평양 무역관은 단순한 무역관이 아닌 셈이다.

무역공사 사장조차 대북 접촉 사실 몰라

정부는 남북한간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기 이전에 북한이 미국·일본과 수교하면 남북 관계의 주도권을 잡는 데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리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에서 안기부는 홍실장과 협조하여 실질적인 연락사무소 성격을 갖는 평양 무역관 설립을 추진해 왔던 것이다. 물론 이와 관련하여 안기부는 청와대와 사전 협의를 해 왔다.

이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있다. 작년 9월까지 홍실장은 북경에서 수 차례 북한 당국자들과 협의한 끝에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에 무역관을 개설하는 데 합의했다. 그는 즉각 귀국하여 이 사실을 안기부에 보고했고 안기부는 김영삼 대통령의 결재를 받았다. 그는 곧바로 북경에 가서 남북한이 동시 발표할 날짜를 북한측과 협의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정부의 은밀한 움직임을 한 일간지가 ‘남북 무역관 개설 합의’라는 제목으로 보도해 버린 것이다. 이에 북한측은 홍실장에게 격렬히 항의했고 결국 모든 실무적인 합의가 무산되었다.

그 당시 북한 당국은 김일성 주석의 사망에 대해 한국 정부가 조의를 표하지 않았다고 연일 비난을 퍼부어 남북 관계를 경색시켜 놓은 상태였다. 그런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어렵사리 나진 무역관 개설에 합의했는데 언론 보도로 무산되었으니 정부로서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정부는 나진 무역관 대신 평양 무역관을 개설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 일로 홍실장은 3개월 감봉 처분을 받았다.

홍실장의 대북 접촉은 이처럼 청와대·안기부와 긴밀히 협조하여 성사한 것이다. 그러나 무공 안에서도 이 사실을 아는 직원은 거의 없다. 작년 9월 무공 박용도 사장조차도 이 사실을 모른 채 그를 베를린 무역관장으로 인사 발령을 낸 적이 있다. 박사장은 나중에서야 홍실장이 북한통임을 알고 인사 조처를 취소해야만 했다.

현재 홍실장은 북경 회담을 막후에서 성사시킨 주역으로 이미 국내 언론에 밝혀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서는 그가 과연 앞으로도 정부의 유력한 대북 창구 역할을 계속 맡을 수 있을지 걱정한다. 언론의 빗발치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무공은 인물 사진을 포함해 홍실장에 관한 인사 자료를 일절 공개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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