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 못찾고 떠도는 TK 정서
  • 대구·吳民秀 기자 ()
  • 승인 1995.06.2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팽배한 ‘반민자 비민주’ 정서, 출구 못찾고 표류…서울·부산 선거에 오히려 관심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을 맡았던 시절 얘기이다. 이 위원회가 구성될 당시, 대구의 경북고 동문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TK 세력’의 득세를 과시하는 우스갯소리가 나돌았다. 올림픽 준비를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위원회 국장급 자리를 경북고 출신 관료들이 독차지하다시피 했는데, 유독 서울의 경복고 출신 관료 한 사람이 그 대열에 끼여 있었다. 즉 노태우 위원장이 인선하는 과정에서 경복고를 경북고로 착각함으로써 빚어진 ‘인사상의 실수’였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도 노태우 위원장의 착각에서 말미암은 일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아직도 경북고 동문들은 옛날의 영광을 떠올리며 이 얘기를 슬그머니 꺼낸다고 한다.

TK 세력. 대구·경북 지역 출신들이 학연과 지연으로 얽혀 무려 30여 년간 국가의 요직을 독점했고, 군 출신 대통령을 3명이나 배출했던 그 힘이 무너졌다. 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중앙 권력의 빈 자리를 PK(부산·경남) 출신들이 채웠다. 그렇다고 대구`·경북이 다른 지역처럼 단일 정치 세력으로 묶인 것도 아니다. 과거 하나의 권력집단을 형성해서 서열을 다투던 사람들이 이제는 여야와 무소속으로 흩어져 있다.

지금 대구는 정치적으로 빈 공간이다. 대체적인 정서는 ‘반민자 비민주’이지만 맹주가 없다. 강력한 리더십이 이 지역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누가 무주공산 대구를 차지할 것인가. 이번 지방자치 선거에서 대구 지역의 선거 결과에 전국의 이목이 쏠리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출사표를 던진 후보들의 면면에서도 이런 현상은 잘 드러난다. 현지 언론은 선거 판세를 2강2약으로 집약하고 있다. 무소속 문희갑 후보(전 청와대 경제수석)와 민자당 조해녕 후보(전 대구시장)가 앞서 있고 자민련 이의익 후보(전 대구시장)와 무소속 이해봉 후보(전 대구시장)가 부지런히 그 뒤를 쫓고 있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네 후보가 모두 여당 성향 인사들이다.
“유권자 50% 이상이 후보 못 정한 상태”

정통 야당은 아직 발을 못붙이고 구 여권에서 갈라져나온 고만고만한 정치 세력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지역 민심을 공략하고 있다. 이것이 30년 집권이 끝난 이후 권력에 대해 ‘금단 현상’을 보이고 있는 TK세력의 현주소이다. 경북도지사 선거도 마찬가지다. 민자당 이의근 후보와 무소속연합 이판석 후보 간의 싸움으로 굳어지는가 했더니, 막판에 자민련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 박준홍씨를 후보로 내세웠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보자는 심산이다. 애초에 이판석 후보를 밀던 신민당과 박철언씨는 자민련에 합류했다.

이처럼 주인 없는 영토를 차지하려는 각 정치 세력의 움직임은 부산하지만, 유권자들은 이번 선거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적어도 본격적인 선거 운동에 돌입한 6월11일 직전까지는 그랬다. 그때까지 현지 언론들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50% 이상이 아직 후보를 정하지 못한 상태’라고 전하고 있었다. 경력 10년이라는 한 택시 운전기사는 “예전 선거 때는 손님들 대다수가 ‘누가 당선되어야 한다’고 얘기했지만, 요즘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물론 선거 당일까지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리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6월 초순까지는 ‘예상 외로’ 선거 열기가 달아오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이곳에서 만난 몇몇 언론계·정치계·학계·재야 인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유권자들이 오히려 서울시장 선거와 부산시장 선거에 더 흥미를 느끼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정치권 및 다른 지역 사람들이 대구 선거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과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대구 서문시장에서 건어물을 파는 한 상인은, 서울시장에 출마한 정원식·조 순·박찬종 후보와 심지어 부산시장에 출마한 문정수·`노무현 후보의 이름을 훤히 꿰고 있었지만, 정작 대구시장에 누가 출마했는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 지역에서는 이를 지역 선거사상 처음 나타난, 일종의 정치적 기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왜 이런 기현상이 벌어지는가. 대구의 한 중견 언론인은 “이 지역의 정치 구도가 낳은 냉소주의 때문이다. 시민들에게 누구를 찍겠느냐고 물으면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 저변에 깔린 권력에 대한 반감은 대단하다”고 진단한다. 한마디로 김영삼 정부에 대한 반발 심리가 지역 내에서 출구를 찾지 못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정치권에 냉소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대구사회연구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약 60%가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응답했다. 이른바 ‘반민자 비민주’라는 소극적 형태의 정치 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도 있다. 30년간 국가를 경영한 경험이 낳은 ‘소중앙의식’이 지역 정서의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권력자의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자기 지역보다는 다른 지역 선거 결과에 더 신경을 쓴다는 분석이다. 대구 시민들이 부산 선거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는 ‘YS가 자기 앞마당에서 혼쭐나는 꼴을 보고 싶은 심정’ 때문이라는 얘기다. 폄하하자면 정치적 오만이랄 수도 있겠지만, 92년 대통령 선거 때만 해도 지역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정서가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YS는 국내 어느 도시보다 대구에서 가장 많은 몰표를 받았다. 대선 기간에 킹메이커 김윤환 장관이 설파하고 다닌 ‘우리가 남이가’라는 담론이 강력하게 작동한 배경에 소중앙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의식은 권력을 잠깐 빌려준다는 발상과 맥락을 같이한다.

여하튼 이제 대구·경북 지역을 둘러싼 정치 환경은 크게 달라져 있다. 이제는 유권자들이 동창회장을 뽑듯이 대통령을 뽑았던 예전의 감각 그대로 이번 선거를 치를 수는 없게 됐다. 그만큼 지역내 정치 세력이 세포 분열을 거듭했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전형이 바로 대구시장 선거전이다. 공교롭게도 대구시장에 출마한 네 후보가 모두 경북고 출신이기 때문이다.

경북고 동창회는 예전에는 선거 때마다 정치적 결사체로 돌변하곤 했지만 이번 선거에 관한 한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지난 5월 중순 서울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경북고 총동창회에서 박준규 총동창회장이 “정치적 발언을 삼가자”고 얘기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경북고 동문회 일각에서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게 전체 동문을 위해서 바람직하다. 차라리 공명 선거 캠페인을 벌이는 편이 낫다”는 말까지 흘러나오는 실정이다.

대구시장 출마자 네 사람이 파악하는 ‘TK 정서’도 제각각이다. 저마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김대통령을 ‘우리가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보답은커녕 배신을 당했다는 생각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서는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현재 사분오열된 TK 상층부가 반 김영삼 정서를 끌어모으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대구는 지금 새로운 정치세력을 원하고 있다.”(무소속 문희갑 후보)

“TK 정서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권력의 핵에서 밀려난 정치인들이 지역 주민의 감정을 자극해서 생겨났다. 원래 대구 기질은 의리를 중시하는 것이다. 나를 제외한 세 후보는 가면 쓴 민자당 후보이다. 그래서 이번 선거는 의리를 저버린 민자당 후보들과 의리를 지키는 민자당 후보와의 싸움이다.”(민자당 조해녕 후보)

“TK 정서는 처음에 정치인들이 자신을 보호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한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시민 정서로 고착됐다. 정부가 지역 개발에 대한 약속을 저버렸고 인사를 무원칙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3공화국의 개발 이데올로기를 공급한 김종필씨의 자민련이 대구 정서를 쓰다듬는 대안이 될 수 있다.”(자민련 이의익 후보)

“정부가 국정 운영 능력을 상실한 이상 TK 정서를 수습하기는 어렵다. 이제 TK 정서는 정서가 아니라 민심이다. 국정 운영 능력을 갖고 있다면 왜 가스가 폭발했겠는가. 이런 정서가 반민자 무소속 후보에 대한 지지로 나타나고 있다. 기성 정당에 대한 선호도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 ”(무소속 이해봉 후보)

이처럼 TK 정서에 대한 네 후보의 진단과 처방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이들도 반민자 비민주로 요약되는 TK 정서가 실재한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리고 어느 정치 세력도 그 정서를 점령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TK 정서는 이번 선거를 통해 대구·경북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정치권의 화두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TK 정서의 실체는 무엇인가.

대구에서 말깨나 한다는 언론인이나 정치인들 대다수가 대구 정서의 근거로 ‘TK 푸대접론’을 들고 있다. 지식인들의 분석 역시 이런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과연 이런 분석은 설득력을 갖는가. 지난해 대구에서 열린 시민대토론회에서 서울대의 한 교수는 “대구 푸대접론에 대해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는 냉소적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다른 데도 아니고 30여 년간 배타적으로 권력을 독점해온 대구 지역에서 푸대접론이 나오는 것을 다른 지역 사람이 쉽게 납득할 수 없다는 얘기다.
잠재된 피해의식 문민 정부 들어 폭발

그러나 이러한 피해 의식이 대구·경북 주민 사이에 꽤 퍼져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지난해 대구사회연구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9%가 지난 30년간 대구·경북 지역의 발전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서울에 거주하는 TK 출신 지도층 인사들에 대한 불만 역시 64%를 넘어섰다.

이런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대구·경북 지역의 섬유산업이다. 즉 역대 정권이 이 지역에 특혜라는 이름으로 제공한 섬유산업이, 이제는 오히려 산업구조 조정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더구나 섬유산업이 토해내는 각종 공해 물질 때문에 대구 시민들은 노이로제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잠재해 있던 불만이 문민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적으로’ 폭발한 것이 바로 TK 정서인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 때만 해도 대구·경북 주민들은 ‘한 다리만 건너면 청와대와 연결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이는 서울에서 대구로 발령 받은 관료들이 ‘시베리아로 떨어졌다’고 투덜거린 데서도 잘 드러난다. 소신껏 업무를 집행하려고 해도, 청와대와 통하는 지역민들의 힘 앞에 번번이 좌절된 경험 때문에 나온 말이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러한 힘의 과시가 불가능해졌다. 뿐만 아니라 사정의 칼을 맞아 밀려난 친인척이나 선후배를 직접 목도하기도 했다.

이런 정서에 불을 지른 것은 언론과 정치인들이다. 정부가 고속전철 대구역의 지하화와 지상화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대구에 들어서기로 했던 삼성 자동차 공장이 부산으로 옮겨 가자 이 지역 여론은 들끓었다. 권력의 핵에서 밀려난 몇몇 정치인이 지역 감정을 부추겼다. 민자당에 잔류한 TK 중진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지역구에 내려가면 정부의 정책에 대해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민자당 민정계 의원 사이에서 ‘개혁 좋아하네’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번졌다.

물론 집권 여당에 소속한 의원들에게조차 반정부적 제스처를 강요하는 TK 정서는, 아직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떠도는 ‘정치의 섬’ 대구의 현실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