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비밀계좌 내역 단옥 입수 · 공개
  • 런던· 金勇基 편집위원 ()
  • 승인 2000.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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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명 'BFC' 자금 유동 내역 단독 입수 ··· '세계 경영 = 빚잔치' 확인
BFC라는 머리 글자로만 알려졌던 대우그룹 세계 경영의 신경조직 영국금융센터(British Finance Center)의 실체가 <시사저널>에 의해 골격을 드러냈다. 대우 계열사 직원들 사이에서도 BFC가 무엇의 머리 글자인지 지금도 알지 못할 만큼 김우중 전 회장과 그룹의 몇몇 핵심 관계자만이 은밀히 관리해온 BFC는 런던 금융 시장에 1981년부터 지난해까지 20년간 존재해온 ㈜대우 역외 비밀 계좌의 전산 암호명이다. 이 비밀 계좌의 자금을 관리한 사람들이 ㈜ 대우 런던 현지법인(영문이름: Daewoo (U.K.) Ltd.) 국제금융팀이었기 때문에 이 조직 단위를 BFC라고도 불러 왔다. ㈜ 대우는 무역과 건설업 이외에 이 비밀 계좌로 입금된 자금을 동원해 대우자동차 해외 생산 및 판매 법인을 밀착 관리해 왔다. 자금은 대우통신과 대우중공업으로도 흘러들어갔다.

1981년부터 20년간 계좌 운용

<시사저널>이 최근 입수한 국제투자은행 라자드 프레레스(Lazard Freres & Co.)의 보고서에 따르면, 1999년 하반기 현재 BFC가 관리하고 있던 자금의 잔고는 약 75억 달러이다. ㈜ 대우 해외 법인들의 현지 금융을 통해 동원한 금액이 36억 달러, ㈜대우 본사와 해외 법인들의 잉여금을 끌어들인 것이 22억 달러, 대우자동차 판매 및 생산 법인들의 자동차 판매대금 등을 이곳으로 돌린 금액이 16억7천만 달러에 이른다.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목은 이 금액이 1999년 하반기 어느 한순간의 자금 유입 잔액과 유출 현황이라는 점이다. 외환 위기후 대우 등 한국 재벌 기업에 대한 국제 금융기관들의 신용 및 무역 공여 라인이 축소되었고, 해외에서 외화 증권 발행이 어려웠던 때였음을 감안하면, 자금 사정이 좋았던 1996년과 1997년 이 비밀 계좌를 통해 유통된 자금은 100억 달러를 웃돌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계좌를 비밀 계좌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이 국내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 대우의 정식 회계 장부와 관계없이 런던 역외 금융 시장에 개설되었고, 이곳에 동원된 엄청난 자금이 김우중 회장 등 극히 일부 인사에 의해 독단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자금 동원과 사용의 합리성이 주주·회계법인·감독 당국에 의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계좌를 운용한 것은 당연히 불법이다.
이 비밀 계좌의 존재와 자금 유입 및 사용은 대우가 내세웠던 세계 경영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일시적 자금 동원력을 확보함으로써 김우중 전 회장은 모험적으로 세계 경영을 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빚을 더 많이 동원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자금 동원에 따른 이자의 양이 눈덩이처럼 커져 갔기 때문이다. 1997년 말을 전후해 상황은 급속히 악화했다. 기존 자금 동원의 원천이었던 대우 현지 법인들의 현지 금융이 외환 위기 이후 확대되기는커녕 기존 라인마저 상당 부분 폐쇄됨에 따라 BFC는 대우가 외화 유동성 위기를 겪게 된 원천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우는 국내에서 자동차를 밀어내어 수출한 판매 대금을 국내로 들여오는 대신 국외에서 런던으로 입금하는 방식과 ㈜대우 본사가 동원하는 무역 금융을 선급금 형태로 지원하는 방식을 통해 해외에서 부족해진 외화 유동성을 채우려 노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밀 계좌로 뒷받침된 세계 경영은 결과적으로 국내외 대우 계열사들을 멍들게 하고, 대우 직원과 가족에게는 평생의 회한을, 국민에게는 엄청난 공적 자금 부담을 안겨주었다. 1999년 8월26일 현재 대우의 국내외 채권은 국내 3백97억5천7백만 달러, 국외 71억3백만 달러에 이른다. 국외 채권 중 55억 달러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40%만을 갚는다 해도 결국 국민의 부담으로 잡힐 대우의 국내외 부채는 4백35억6천만 달러에 달한다. 이 부채의 규모는 워크아웃이 개시된 이후에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만약 이 비밀 계좌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과연 한 개인에 의해 주도된 모험적 세계 경영이 가능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시사저널>은 지난 6월12일 런던의 한 호텔에서 열린 대우 해외 채무 관련 로드쇼에서 라자드가 작성한 이 보고서를 입수했다. 라자드는 대우계열구조조정추진협의회(의장 오호근)와 함께 지난 6월6일 호주 시드니를 시작으로 6월14일까지 세계 7대 도시에서 대우의 해외채권단 1백97개 은행을 상대로 한 로드쇼를 열고 있던 중이었다. 라자드는 대우가 지명한 대우의 국제금융 자문기관으로, 뉴욕에 근거지를 둔 투자 은행이다. 보고서는 BFC의 자금 동원과 사용처에 관한 설명과 함께 대우 계열사의 국내외 채무 규모, 대우의 워크아웃 과정, 국내 채권단에 대한 채권 회수율, 로드쇼에서 대우가 제안하는 국외 채권에 대한 회수율 비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58쪽짜리 보고서의 정식 제목은 ‘대우 해외채무 구매를 위한 제안, 2000.5.26, 6.30’이다.

소문으로만 돌았던 BFC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1999년 12월7일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이 9개 외국 은행으로 구성된 대우 해외 채권단 운영위의 보고서를 인용하면서부터였다. 이 신문은 당시 지난 18년간 ㈜대우 해외 법인들이 해외 부채를 포함해 약 75억 달러를 런던의 17개 은행 계좌에 입금했는데, 이것이 다시 손실 보전, 투자 및 이자 지급 등을 위해 일부 대우 계열사들에 이전되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번 라자드의 보고서를 통해 75억 달러는 1999년 하반기에 유입되어 있던 외화 잔액이지 그간 동원된 자금의 총량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이 보고서를 통해 비밀 계좌로 유입된 자금의 출처와 사용처가 구체적인 금액과 함께 드러나게 되었다. BFC가 역외 비밀 계정이며 전산 암호명이라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밝혀졌다.
각국 현지법인들이 빚낸 돈, BFC에 입금

BFC의 자금 동원 방식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대우 현지 법인이 최대한의 금융을 일으켜 최소한을 남기고 나머지를 전부 런던으로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대우 현지법인 금융 책임자들의 역할이 바로 BFC로 돈을 집어넣는 일이었다. 1억 달러 금융을 일으키면 이 중 8천만 달러가 런던으로 보내지는 방식이었다. 현지에서 쓰는 것보다는 런던 BFC로 보내는 금액이 훨씬 많았다는 것이 주변의 얘기다. 그리고 그 돈은 한 외국 은행 관계자의 표현에 따르면 ‘윈도 드레싱(Window Dressing)’을 위해 사용되었다. 대우 계열사 자금 사정이 좋게 보이도록 겉모습을 포장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의미이다.

비밀 계좌를 통한 신속한 자금 동원력은 나름의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현재 유일하게 흑자를 내고 있다는 폴란드 FSO 공장 인수이다. GM이 5년간 공들인 이 공장을 1995년 말 대우가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은, 대우가 기존 공장의 인력을 승계하는 조건을 받아들인 것 외에 예상 외로 탄탄한 자금 동원력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BFC가 가지는 폐해는 훨씬 근본적이고 위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자기 체력에 걸맞지 않은 확대 경영을 무모하게 밀고 나가는 주요한 원천이 되었다. 엄청난 돈의 흐름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확대 투자가 회장 1인의 판단에 의해 추진될 수 있었다. 김회장의 심복들은 BFC 출신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회장의 판단을 자금 동원으로 뒷받침하였다. BFC 출신들은 승승장구했고, 어디를 가더라도 회장이 그들을 보살펴 줌으로써 대우의 조직 문화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유입된 자금 중 상당액이 이자로 빠져나가

그러나 BFC는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리고 있었다. 부가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조직이 최소 수십억 달러에서 100억 달러에 이르는 돈을 상시적으로 끌어당김으로써, 정상으로는 가동될 수 없는 구조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65쪽 도표에 나타나다시피 BFC에 동원된 자금 중 34억2천8백만 달러가 이자로 지급되었다는 것은 그동안 빌려온 돈을 갚을 재원이 그만큼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자금이 계속 확대되면서 흘러들어 오지 않는 한 BFC는 쓰러질 운명이었다. ㈜대우 관련사와 대우자동차 관련사에 대한 손실 보전 액수가 11억 달러에 달했다는 점도 같은 의미를 갖는다. 자금이 그림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였지만, 오른쪽에 도달한 자금의 상당 부분은 이자나 손실 보전이라는 블랙홀에 빨려들어가 버림으로써 다시 왼쪽으로 이동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 구멍들이 과연 실제 존재했던 것들과 완전히 일치하느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혹이 남는다. 우선 20년간 지급한 이자의 구체적 내역이 제대로 보관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 또 투자한 금액을 손실로 털어버리는 과정이 과연 깨끗했을까라는 점 그리고 그림 왼쪽 ㈜대우 계열사에서 유입된 자금이 그 시점 유입 자금 총액의 77%였다는 점이 그렇다. 이 77%라는 수치는 당시 사용된 금액 중 77%가 ㈜ 대우 계열사에 대한 차입금의 이자(현지 금융 비용, 플러스 자금 제공, 계열사에 대한 보상비) 지급과 지원금에 사용되었다고 기록된 점과 공교롭게도 일치한다. 이는 이 수치가 가공되었다는 점을 강하게 암시하는 대목이다. ㈜대우 및 현지 법인이 자금을 동원해 자신들의 사업을 위해 사용한 것이라면 굳이 비밀 계좌를 두어 자금을 우회시키기보다는 상호 직접 거래를 통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BFC는 1999년 9월께부터 11월 사이에 금융 당국에 그 내용이 포착된 것으로 보인다. 사안의 성격을 보아 내부 인사의 고백에 의해 그 규모와 사용처가 알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국내 채권 은행 입장에서 자산 실사를 담당하는 삼일회계법인의 감사가 두 차례 있었고, 올 4월 금융감독원의 조사가 런던에서 진행되었다. 금융감독원은 아직도 감리를 진행 중인데, 빠르면 오는 7월께 대우 김우중 전 회장을 포함한 핵심 경영인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BFC와 관련한 구체적 자료가 당국에 얼마만큼 확보되었고 어떤 부분에 대한 의혹이 집중 추궁되었는지는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부분이 대중 앞에 공개되고 처벌될지 의문이다. 금융감독원 요원들이 지난 4월 ㈜ 대우 런던 현지 법인을 방문해 사법 처리에 대비한 진술서 등을 받아간 것은 분명하나 조사의 방향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특정 목적에 써야 하는 것으로 허가받아 외국에서 발행한 해외 증권의 대금이 런던의 비밀 계좌에 입금되어 사용되었고, 이 돈이 대우 계열사들의 재무 상태를 ‘분식’하기 위해 일부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적어도 외환관리법이나 증권거래법을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 대우 런던법인 대표를 맡고 있는 이학인 상무는 조사가 계속 진행 중이고 대우의 해외 채권 회수가 진행 중이어서 현재로서는 조사 내용에 대해 답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BFC 쟁점화는 국익에도 도움

BFC는 사안의 중대성에도 불구하고 그간 해외 채권단과의 채권 매입 교섭 과정과 국내 워크아웃 과정에서 잠시 쟁점으로 떠올랐다가 곧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지난해 말 이 비밀 계좌의 존재가 처음으로 라자드에 의해 간략하게나마 외국 은행 해외 채권단 자문기관인 회계법인 언스트 앤 영에 알려졌을 때, 외국 은행들은 대우 채권 회수율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라고 요구했다. 외국 채권단 처지에서는 ㈜대우의 부실이 대우중공업이나 대우자동차에 비해 심해 ㈜대우에 대한 채권 회수율(채권에 대해 돌려받을 수 있는 금액의 비율)이 낮은 것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던 차에, ㈜대우나 그 현지 법인에 빌려준 돈이 BFC를 통해 대우자동차나 대우중공업으로 흘러들어간 것을 확인함으로써 돈을 최종 사용한 곳에 대응해 회수율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법정 관리로 채권을 몽땅 잃을 것이냐, 타협해 일정 부분 회수할 것이냐 양자 택일하라고 요구했고, 결국 지난 1월 뉴욕 협상에서 후자로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에 기초해 지난 6월6일부터 14일까지 채권 회수에 대한 정식 제안이 있었고, 6월 말을 시한으로 이 제안에 대한 외국 채권 은행들의 동의서가 접수되고 있는 중이다.

이번 6월 말까지 외국 채권 은행들의 90%가 채권 회수에 응할 경우 이들 채권은 지난 5월 산업은행과 한빛은행이 설립한 ‘남산 구조조정 주식회사’라는 이름의 특수목적법인이 일단 사들이고, 이 채권을 자산관리공사가 재매입할 예정이다.
국내 워크아웃 과정에서는 주 채권 은행들의 부실 자산을 정부가 공적 자금으로 보전해 주기로 했기 때문에 BFC와 이를 통한 대우의 계열사간 자금 이전이 미친 폐해가 특별한 문제로 떠오르지 않았다. 또한 정부의 입장은 워크아웃을 통한 대우 계열사 회생에 진력한다는 입장이어서 대우 계열사간 불법 내부 거래에 관한 경영진의 사법 소추가 미루어져 온 상태이다.

결국 BFC는 그동안 국민에게 엄청난 폐해와 부담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가 가려져 있었다. BFC 쟁점화는 정부와 국내외 채권단들의 우선 관심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덮이고 미루어져 왔다.

하지만 ‘대우 의혹’에 대한 감독 당국의 엄격한 조사와 문제된 기업을 되살리는 작업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다. 금융 당국이 의혹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 설명 책임(accountability)을 다하지 못한다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 채 정치 외풍에 휩쓸리는 구태를 반복하게 될 뿐이다. 이는 금융 당국이 스스로 왜소해지는 길이기도 하다. 당국은 이 점을 냉정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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