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정복’ 희망 찾은 미국임상종양학회 회의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4.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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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은 과연 정복될 것인가? 지난 6월 초 세계의 내로라 하는 1만5천여 암 학자들이 미국 뉴올리언스에 모여 머리를 맞댔다. 그들이 암환자에게 던진 희망의 메시지는 한둘이 아니었다.
가정의학 전문의 김선규씨는 꽤 오랫동안 단단한 건강을 유지했었다. 그러나 1998년 직장암 선고를 받으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고, 머리 속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점은 그가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불안을 다독이며 서둘러 병원 문을 닫고 시골로 내려갔다. 다행히 그곳에는 깨끗한 공기와 물과 음식이 있었다. 그는 맑고 조용한 환경에서 부활을 꿈꾸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루었다. 얼마 전 암세포가 사라졌다는 판정을 받아낸 것이다. 다시 병원 문을 연 뒤 한국암환자협회까지 이끌고 있는 그는 “마치 어둡고 답답한 긴 터널을 빠져나온 느낌이다. 희망과 삶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으면 누구나 암을 이길 수 있다”라고 말했다.

김씨의 말이 100%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암 환자가 꿈과 노력만으로 병을 이겨낼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수많은 암 환자가 지금 이 순간에도 2백50여 종의 암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2002년 건강보험에서 진료비를 지급한 누적 암 환자는 남성 14만8천2백66명, 여성 14만3천5백54명 등 모두 29만1천8백20명. 그리고 그 해에 암으로 사망한 사람은 모두 6만3천여 명으로, 하루 평균 1백70여 명씩 세상을 떴다. 한국인 사망 원인 가운데 1위에 해당하는 수치이다(2위는 뇌혈관질환, 3위는 심장질환, 4위는 당뇨병). 10만명당 사망률에서도 암은 1백30.7명으로, 뇌혈관질환 77.2명과 심장질환 37.2명을 크게 앞선다(2002년 통계청 자료).

그렇다면 암 환자들 앞에 놓인 것은 절망뿐인가. 아니다. 의지가 굳센 의학자들 덕에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서는 환자가 적지 않다. 특히 최근에 나오고 있는 새로운 항암제 덕에 각종 암의 5년 생존율에 미미하게나마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 6월4~8일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제40회 아스코(ASCO:미국임상종양학회)는 그같은 의학적 성과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그동안 아스코에서는 획기적인 암 관련 정보가 종종 발표되었다. 기적의 항암제로 알려진 글리벡과 이레사의 효과도 아스코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김주항 교수(연세암센터)는 “아스코는 암 치료와 관련된 정보가 집대성되는 자리이다. 이곳에서 검증받아야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전세계에서 1만5천여 의학자가 참여한 이번 아스코에서도 절망에 빠진 암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연구 결과가 다수 발표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폐암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보조 항암제를 쓴 결과 5년 생존율이 5% 높아졌다’는 연구 결과였다.

‘5% 상승’이라는 말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암 환자의 하루가 건강한 사람의 서너 달과 맞먹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간 의사들은 폐암 수술을 한 환자에게 보조 항암제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여왔다. 몇 개 안 남은 암세포를 사멸하기 위해 쓰는 항암제가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세계폐암학회 필 번 회장은 “이제야 보조 항암제를 쓸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라고 말했고, 김훈교 교수(가톨릭대·내과)는 “물음표였던 일이 느낌표로 바뀌었다”라고 해석했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항암제를 투여하는 ‘맞춤 치료법’도 주목되었다. 연구 결과를 발표한 의학자들에 따르면, 같은 암일지라도 환자에 따라 항암제에 대한 반응이 달랐다. 암 환자에 따라 처방하는 항암제의 종류와 양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맞춤 치료법이 보편화하면 같은 위암 환자라도 각기 다른 항암제를 처방받게 되고, 항암제 양도 다르게 투여될 전망이다. 물론 투약 기간도 환자마다 달라진다. 부작용과 경제적 손실도 대폭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암세포(종양)와 혈관은 친밀한 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암세포는 유인 물질을 분비해 혈관이 자기들 쪽으로 자라게 한다. 암세포가 혈액을 공급받으면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수주일 내에 1만6천 배까지 자란다. 그러나 반대로 혈관이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지 않으면 종양은 작게 남아 있거나, 아니면 완전히 말라 죽는다. 의학자들은 이같은 점에 착안해 암세포로 향하는 혈관을 폐쇄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정 부분 성과도 얻었다. 이번 아스코에서는 이같은 연구 결과가 다수 발표되었다.

1990년 말 개발되어 폐암·췌장암·방광암 치료에 쓰이고 있는 젬자(항암제)에 대한 재해석도 눈길을 끌었다. 젬자는 젬시타빈이 주성분인 항암제. 하워드 호츠스터 교수(뉴욕대) 등은 이 약이 췌장암에 분명한 효과가 있다고 재차 확인했다. 그동안 췌장암은 불치병으로 여겨져 왔다. 복부 뒤에 위치해 있는 데다 유의할 만한 증상이 잘 나타나지 않아 조기 발견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호츠스터 박사는 췌장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대규모 임상 시험에서 젬자가 종양의 크기를 줄이고, 환자의 통증을 약하게 하고, 전신 수행 능력을 좋게 하는 효과를 나타냈다고 말했다. 그는 이같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젬자를 이용한 치료가 “췌장암 환자의 생존 기간을 늘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일부 의학자들은 젬자가 췌장암 치료에서 “성경 같은 대접을 받는다. 그동안 췌장암 치료를 위해 수많은 약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젬자처럼 단독 효과가 있는 약은 전무했다”라고 말했다. 특히 엘록사틴이라는 약을 병용해 치료하면 1년 생존율이 15%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졌다(15%라는 수치 역시 암 환자에게는 엄청난 희망이다).

젬자와 폐암의 ‘긴밀한 관계’도 재확인되었다. 그동안 의학자들은 젬자의 주요 성분인 젬시타빈과 제1세대 항암제인 시스플라틴을 비소세포폐암 환자에게 함께 사용하면, 다른 항암제를 함께 사용한 것보다 평균 생존율(암 치료제 사용 뒤 암이 없어지고 나서의 평균 생존 기간)이 2~5% 높아진다고 주장해왔다(젬스타빈+시스플라틴에다 방사선 요법까지 병용하면 평균 생존 기간은 18.3개월로 늘어난다. 반면 시스플라틴+파클리탁셀+방사선 요법은 평균 생존 기간이 14.8개월이다). 그런데 이번에 그같은 내용이 사실임이 재차 확인된 것이다.

병이 진행되는 평균 시간(TTP;time to progres sion)도 젬시타빈+시스플라틴 병용 요법이 4,2개월로, 시스플라틴+파클리탁셀 병용 요법(3.4개월)보다 우수하다고 밝혀졌다. 이로 인한 경제적 이익도 크다. 유럽헬스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비소세포폐암을 치료할 때 젬시타빈과 시스플라틴을 병용 치료하면, 파클리탁셀+시스플라틴 사용 때보다 치료비를 48%나 절감할 수 있다.

전이성 유방암에 대한 젬자의 효과도 재검증되었다. 그동안 전이성 유방암에는 탁솔이 큰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탁솔에 젬자를 함께 투여하면 치료 효과가 높아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지난해. 즉 전이성 유방암 환자에게 탁솔만 투여했을 때보다, 탁솔+젬자를 투여했을 때 재발 시기가 2~3개월 정도 더 늦추어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실 역시 이번 아스코에서 재확인되었다.

전세계 19개국 98개 암센터에서 여성 유방암 환자 5백29명을 대상으로 한 무작위 임상 시험에서도 탁솔과 젬자를 병용한 결과, 1년 생존율이 60.9%에서 70.7%로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허가를 받은 알림타(항암제)의 효과도 발표되었다. 알림타는 ‘표적 항암제’(정상 세포는 놔두고 목표물만 공격하는 항암제)와 비슷한 방법으로 암세포를 공격한다. 임상 실험 결과 폐암·유방암·대장암·위암에 효과가 있었다. 특히 효과가 있는 암은 흉막폐세포암. 이 암은 암 가운데 매우 위험한 종류에 속한다. 환자 대부분이 진단 3개월 내에 사망한다. 그런데 알림타가 이들 환자의 1년 생존율을 15%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최근 서울대병원에서 임상 실험한 결과 비슷한 효과가 나타났다).

아스코에서 발표되는 연구 결과들이 주목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직접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얻은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항암물질 실험에서는 종종 실험실 결과와 병원의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김시영 교수(경희대병원·종양혈액내과)는 “근거 없이 쓰이는 항암제에 대한 실험 결과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아스코의 연구 결과가 소중하다”라고 말했다.

제40회 아스코 회의장은 경연장을 방불케 했다. 자신들과 다른 의견이 발표되면 여기저기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반면 수긍이 가는 주장에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한국에 많은 위암과 간암에 대한 연구 결과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유가 있었다. 위암의 경우 외국인에게는 비교적 드문 암이어서 한국이나 일본에서 임상 시험 결과를 발표하지 않으면 자료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번 아스코에서 또 하나 주목된 점은, 많은 의학자들이 암 예방과 암 환자의 심리 치료 연구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기 진단의 필요성도 강조되었다. 현재 미국의 암 완치율(5년 생존율)은 64%. 반면 한국의 완치율은 40%에 불과하다. 한국의 완치율이 낮은 이유는 조기 검진율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한국의 2000년 조기 검진율은 1.6%, 일본은 20%). 김준석 교수(고려대 구로병원·종양혈액내과)는 조기 검진을 많이 받는 성인들이 늘면 늘수록 암 완치율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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