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옐친을 무덤으로” 모스크바의 분노
  • 모스크바·페테르부르크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8.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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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 직전의 러시아 ‘들끓는 민심’ 현지 르포
모스크바 중심가에 있는 정부 종합 청사 뒤편 광장은 석 달째 러시아 광산 노조원들에게 점거되어 있다. 시위가 일상화하지 않은 러시아에서 석 달 넘게 지속되는 광부들의 시위는 내·외국인들의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이들이 임금 체불에 항의해 시베리아 횡단 철도까지 점거하는 등 강경 투쟁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비닐 천막 수십 개를 쳐놓고 거기서 먹고 자면서 농성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처음보다 많이 줄었다. 광산 노조로부터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는 노조 핵심 관계자들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8월28일 오후 6시께 “체르노미르딘을 만나러 가자”라고 소리치며 농성 텐트를 출발해 의기 양양하게 정부 종합 청사 입구로 다가간 이들을 가로막은 것은 한국에서처럼 전투 경찰이나 청사 경비원들이 아니라 외신 기자들의 카메라였다. 확성기를 쥔 지도자를 뒤따르는 시위대 숫자와 그들 앞에서 뒷걸음질하며 셔터를 누르는 사진 기자 수는 엇비슷했다.

키리옌코 전 총리 “재벌이 나를 해임했다”

시위대는 최근 들어 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부인을 거듭했음에도 결국 루블화 평가 절하라는 극약 처방을 선택한 데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정치적 책임을 따지는 야당과 비판 세력의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옐친에 대한 이들의 거부감은 농성 현장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옐친 사진이 내걸린 ‘옐친의 무덤’ 주변에는 장난감 철도 레일이 어지럽게 뿌려져 있다. ‘임금 체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철도 레일 위에 드러눕겠다’고 공언했던 옐친을 빈정거리는 것이다.

모스크바 정가에서는 시위대가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 당수 등 반옐친 진영의 암묵적 지원을 받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루블화 평가 절하를 계기로 200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옐친을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야당 세력의 결탁을 의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장기 국면으로 접어든 광산 노조원들의 시위 현장은 크렘린 권력을 둘러싼 정치인들의 각축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석 달 만에 총리 직에서 물러난 세르게이 키리옌코(36)는 경질되자마자 농성 현장을 찾아 광원들을 격려하며 보드카 잔을 돌렸다. 어제의 적이 갑자기 동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시위대도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온 전 총리에게 박수를 보냈다. 비록 꿈을 펴 보지도 못하고 구 정치인 빅토르 체르노미르딘에게 총리 자리를 내주고 말았지만, 개혁적 이미지를 가진 젊은 정치인의 단명이 무척 아쉬웠던 모양이다.

해임 직후 농성장을 방문한 것이 언론을 의식한 정치 쇼로 보일 수도 있다. 키리옌코 전 총리는 물러난 직후 러시아 영자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러시아 신흥 재벌인 올리가키(Oligarchy)들이 나를 해임시켰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등 정치적 행보를 계속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광산 노조원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열기가 사그러들고 있는 자신들의 시위가 정치적 평가를 받는 것을 은근히 즐기는 눈치이다.

옐친 정부의 개혁 정책에 대한 서방 언론들의 시각은 결코 곱지 않다. 미국 CBS 텔레비전은 크렘린 소식통을 인용해 옐친이 이미 ‘기한이 명시되지 않은’ 사직서에 서명했다고 보도했다. 다른 서방 언론들도 옐친의 사임이 시간 문제라는 각계 전문가들의 발언을 인용하기에 바쁘다. 러시아에서 모스크바 다음으로 큰 도시인 페테르부르크에서 발행되는 <페테르부르크 타임스>는 ‘옐친이 사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큼지막한 제목을 달기도 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정부 대변인까지 나서서 옐친 사임설이 사실 무근이라고 진화하고 있다.
“옐친은 제발 가만히 있기나 했으면…”

그러나 모라토리엄 선언 이후 외국인들에 대한 불평등 조처가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 나돌고, 루블화 평가 절하 이후 물가가 더욱 뛰어오르면서 옐친은 위기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다. 물가 이야기만 나오면 러시아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어디까지 뛰어오를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생필품 가격이 40∼50%나 뛰어오르고 루블화가 곤두박질치면서 담뱃값도 30∼40% 올랐다. 일부에서는 사재기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물가는 이미 포기했기 때문에 별 관심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렇게 물가 폭등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에게서도 루블화 평가 절하 이후에는 불안 심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삼성·LG 등 러시아에서 인기를 누리는 한국산 가전 제품이 평가 절하 이후 20% 이상 판매가 늘어난 것이 단적인 예이다.

물가 폭등과 잦은 정책 변경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가장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곳 역시 시내 한복판의 광산 노조원 농성 현장이다. 농성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시위대를 지지한다는 일장 연설을 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한다.

농성 현장을 서성이던 슬라와(65) 씨는 카메라를 멘 기자의 소매를 붙잡고 옐친 무덤을 찍으라고 재촉했다. 그는 또 옐친의 초상화 옆에 적힌 ‘나는 노동자들을 위해 노력할 것을 맹세한다’는 글귀를 연신 손가락질했다. 경제학을 가르치다 3년 전 은퇴했다는 그는 옐친 정부가 광원들의 시위를 만만하게 보았다가는 큰일 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혁명 기념일인 11월7일 대대적인 시위가 열릴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모스크바 사람들은 옐친을 믿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옐친 정부가 내놓은 각종 개혁 정책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이겠지만, 그 여파는 200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옐친 진영의 정치적 위기로 나타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옐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한 운전 기사는 “더 이상 왔다갔다 하지 말고 제발 가만 놓아두면 좋겠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모스크바 시민들이 또 하나 믿지 않는 것은 바로 은행이다. 1천6백 개가 넘는 은행이 있지만 은행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는 바닥에 떨어져 있다. 쓰베르 방크(저축은행) 등 유수한 대형 은행들은 루블화가 폭락하면서 ‘내부 수리중’ 따위 안내문을 내걸고 영업을 일시 중단하기도 했다. 이미 러시아 군소 은행들의 대량 도산 가능성은 금융 위기 이후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은행 도산은 러시아 은행들에 대한 불신을 더욱 부채질할 것으로 보인다.

새롭게 총리에 임명된 체르노미르딘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도 엇비슷하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체르노미르딘이 가스프롬이라는 초대형 가스 회사를 경영했던 만큼 재벌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우려한다. 그에게는 아예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시민들의 반응이다. 이런 반감은 서민층으로 내려갈수록 정도가 심해진다.

투명한 정책을 기다리던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던져진 체르노미르딘 총리 재임명 소식도 실망을 안기기는 마찬가지이다. 서방 언론들이 ‘옐친 사임설’을 집중적으로 부각하기 시작한 것도 체르노미르딘 총리 임명과 이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주요 기업들이 정부 정책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대 의사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도 크렘린 처지에서는 매우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연료와 에너지 분야의 상위 8대 기업이 정부의 금융 위기 타개책에 반론을 제기하는 공개 성명을 내기도 했다. 현지에 상주하며 러시아 경제 상황을 관찰하는 대우경제연구소 윤찬혁 연구위원은 “지금까지 재벌들이 정부 정책에 불만이 있을 때 크렘린과 통하는 막후 채널을 이용해 해결한 적은 있지만 반정부 공동 연대를 결성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라고 분석했다.

러시아인들, 불만 많지만 변화도 바라지 않아

궁지에 몰린 옐친이 어떤 카드를 내놓느냐에 따라 러시아는 모라토리엄 선언 이후 또 한번 격랑에 휘말릴지 모른다. 그러나 모스크바건 페테르부르크건 시민들은 더 이상 텔레비전 뉴스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들쭉날쭉하는 정책 탓에 이미 정부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들도 불평에는 익숙하지만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계획 경제에서의 노동 방식과 생활 방식이 오래된 코트처럼 그들의 몸에 잘 맞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코트를 벗어던지는 것은 그들에게 대단히 두려운 일이다.
모스크바 사람들은 옐친 정부의 각종 정책을 날씨에 빗대기도 한다. 모스크바의 초가을 날씨는 무척 변덕스럽다. 오전 내내 가랑비가 뿌리다가도 오후 2∼3시쯤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북유럽 특유의 청명한 햇빛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눈부신 햇볕을 보면서 저녁 산책 계획이라도 세울라치면 하늘은 또 잿빛을 띠면서 어두워진다. 그래서 요즘 같으면 늘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편이 낫다. 변화에 대한 준비를 늘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은 변화에 무척 수동적이다.

바뀌지 않아도 좋으니 이대로가 그냥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면서도 변화 과정에서 지불해야 할 대가가 귀찮거나 두려운 것이다. 시내를 감싸고 도는 모스크바 강에 늘 떠 있는 유람선처럼 규칙적으로 하늘거리는 바람을 항상 곁에 두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대형 뉴스를 쏟아내는 모스크바 정가는 시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평온하지도 한가롭지도 않다.

지금 모스크바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제일 어려운 시험을 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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