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력, 도전정신 · 컴퓨터로 무장한 소호족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7.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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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 작은 사무실서 '지적인 자기 사업' 하는 사람들의 세계
곽동수씨(33)는 명함에 자신을 ‘컴퓨터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명함의 재질이 종이가 아닌 OHP용 필름인 것도 남다르다. 이 명함에는 회사 주소 대신 집 주소와 전자 우편 주소, 인터넷 도메인 주소가 적혀 있다. 그는 이 명함을 집에서 워드 프로세서로 만들어 레이저 프린터에 인쇄해 쓴다.

곽씨는 이런 명함을 쓰는 이유에 대해 ‘튀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곽씨가 튀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그는 재택 근무를 하는 프리랜서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매기고 적극적으로 남들에게 알리고 팔아야 생존할 수 있다. ‘회사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의 고용 상태는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그는 현재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면서도 그는 지난해 1억원을 거뜬히 벌어들였기 때문이다.

곽씨는 매주 3~4건 컴퓨터 관련 글을 쓰고, 고정적으로 방송에 출연하며, 기업체 컴퓨터 교육과 컴퓨터 관련 업체에 컨설팅을 하고 있다. 이 일을 위해 그는 아파트에 홈오피스를 꾸몄다. 고성능 PC 3대(1대는 노트북)와, 디지털 카메라, 스캐너(화상 인식기), 프린터 등이 그의 사무 기구들이다. 곽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자신의 정체성을 재택 근무를 하는 프리랜서라고 자리매김했지만 요즘은 ‘소호족’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근무 형태와 일 성격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최근 이토 도모하치로(일본 전자출판 회사 진우사 대표)씨가 쓴 〈소호 사업법〉을 편역한 것도 소호의 매력과 유용성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였다.

빌 게이츠는 1세대 소호족

소호(SOHO)는 집이나 작은 사무실을 근거로 활동하는 기업 형태인 Small Office Home Office에서 따온 말이다. 도모하치로씨 같은 소호 전문가들은, 소호의 겉모습은 혼자 혹은 몇 사람이 집 또는 작은 사무실에서 사업하는 것이지만, 진정한 소호 형태는 ‘컴퓨터 네트워크를 활용하며 자기 자신의 비즈니스를 주체적으로 전개하는 지적 사업의 소규모 사업장’이라고 본다. 우리에게는 아직 생소하지만 미국·유럽연합·일본 등에서는 소호족으로 묶일 수 있는 다양한 직업군에 속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다. 특히 관련 협회가 있는 미국에서는 사회 변화를 상징하는 용어로 보고 있다.

소호족은 작게는 개인 프리랜서에서 크게는 벤처 기업 종사자들을 지칭한다. 빌 게이츠 같은 미국 실리콘밸리의 주역들은 주차장 한귀퉁이나 창고에서 아이디어만을 갖고 사업을 시작한 1세대 소호족들이며, 컴퓨터 관련 기술을 발달시켜 소호 발전에 디딤돌을 놓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소호는 개인용 컴퓨터(PC) 보급이 크게 늘어나고 통신망이 발달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일등 공신인 셈이다. 특히 세계의 모든 컴퓨터와 연결할 수 있는 인터넷이나, 싼 비용으로 인터넷을 사내에서 활용하게 하는 인트라넷은 소호들의 입지를 크게 높여 놓았다. 이같은 컴퓨터 네트워크들이 거리나 시간 같은 물리적 제한을 일시에 없앴기 때문에 굳이 큰 조직의 틀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소호족은 모두 일에 미쳐 산다

우리에게 소호는 낯선 말이지만, 이미 새로운 근무 형태를 지향하는 소호족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특히 컴퓨터 네트워크를 기반 삼아 활동하는 소호족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정보 사회가 진전해 새로운 영역이 숨돌릴 틈 없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멀티 미디어 광고 대행사인 인포메카를 경영하는 오세경 사장(30)은 전형적인 소호족이다. 오사장은 조직의 부속품이기를 거부하는 탈 회사 인간이다. 집과 사무실의 구분도 전혀 없다. 자신이 일하다 지쳐 쓰러져 자는 곳이 집이다. 그곳은 대부분 사무실이다.

멀티 미디어 업계에서는 토털 솔루션이라는 말을 흔히 한다. 문제 해결안이다. 이것에 오사장은 완벽한(perfect)이라는 말을 앞에 붙인다. 멀티 미디어 분야는 자고 나면 신기술이 개발되는 불꽃 튀는 경쟁 시장이다. 어느 쪽으로 튈지 예측하기조차 어렵다. 어떤 새로운 매체가 치고 들어와도 대처할 능력을 갖춘 회사를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오사장은 돈 버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다. 그는 우리 사회가 필요로 했던 것을 창출한 공익적 기업가로 평가받고 싶어한다.

소호족은 모두 일에 미쳐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기 때문이다. 컴퓨터 그래픽 회사인 빔 그래픽스를 3년 전 창업한 20대 젊은이 3명도 이런 사람들이다. 강훈일(29) 이승택(29) 도재민(26) 씨가 일에 미친 올빼미 3총사다. 지난해 겨우 5천만원을 벌었지만, 올해 매출 목표는 1억5천만원이다. 아직은 기술도 마케팅 능력도 부족하지만, 그들에게는 젊음과 넘치는 열정이 있다. 게다가 최근 에인절(벤처 기업 전문 투자가)이 생길 것 같아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워크스테이션 장비를 갖출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그들은 각자 독립해 회사를 차리고 전략적 제휴를 통해 컴퓨터 그래픽 업계에서 일가를 이루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창조적 아이디어가 없으면 소호족이 될 수 없다. 이창희씨(33)는 아이디어를 사업으로 연결시킨 재택 근무 소호족이다. 대한항공 국제선에서 일하면서 해외 여행을 많이 한 이씨는 여행용 가방을 빌려주는 사업이 돈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틀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이씨는 항상 사업을 할 꿈을 꾸었지만, 대부분의 직장인처럼 무엇을 할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시장 조사를 해보니 가방 대여업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렌트백 서비스는 창고·전화·팩스만 있으면 가능한 사업이었기 때문에 마진 폭이 80%나 되었다. 지난해 매출액 6천만원 가운데 5천만원 정도가 고스란히 그의 수중에 들어온 셈이다.

이씨는 최근 사업 2호인 할인 서비스를 시작했다. 가격 파괴 열풍을 활용한 신종 사업이다. 거절도 많이 당했지만 서울 전역을 누비고 다닌 끝에 이씨는 6개월여 만에 3천3백여 가맹점을 모을 수 있었다. 요즘 이씨는 광고와 PC통신내 기업 포럼에 할인 서비스를 띄워 마케팅에도 열심이다. 그는 이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또 다른 서비스로 ‘이창희 시리즈’ 브랜드 장사를 할 작정이다.
소호, 여성·정년 퇴직자에게도 매력적

소호가 확산되는 것은 노동력 절감을 꾀하는 기업들의 전략과 개성적인 근무를 선호하는 현대인들의 성향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다. 특히 미국에서 소호족이 크게 늘어난 데에는 미국 기업들의 대대적인 리스트럭처링(사업 재구축)이 큰 영향을 미쳤다. 기업들은 군살을 빼기 위해 감원하는 와중에서도 사원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수용하기 위해 기업내 벤처 회사 설립도 적극 권장했던 것이다. 이 회사는 사내 소호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 이런 조류가 걸음마 단계이지만, LG그룹은 상당히 적극적인 축에 속한다.

LG그룹 메카팀. 이 팀은 96년 말 30 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교통정보사업팀과 함께 뽑힌 사내 벤처 회사다. 메카팀의 벤처 사장인 송기환씨(34)는 사람을 뽑고 사무실을 빌리며 모든 경비를 지출하는 데 전권을 행사한다. 올해 그룹으로부터 받은 돈은 12억원. 메카팀은 돈을 지원받는 것 외에 그룹으로부터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는다. 송사장은 화상 회의 시스템을 이용한 교육 사업이라는 아이디어 단계의 사업을 불과 6개월도 안되어 최근 ‘LG 튜터(가정교사) 라인’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해 시범 서비스를 하고 있다. 송사장은 앞으로 3년 동안 이 사업을 흑자로 돌려 놓은 뒤 독립할지 여부를 팀원들과 상의해 결정할 계획이다.

감원과 명예 퇴직 등으로 사람을 내침으로써 소호가 생길 여지를 만들었던 기업들은 또 다른 이유에서 소호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른바 아웃소싱(외부 조달)의 필요성 때문이다. 이제 어떤 기업도 모든 것을 내부에서 조달하지 않는다.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구미에는 제조 시설이 없는 회사가 허다하다.

(주)커뮤니케이션 신화 조재형 사장(40)은 기업의 아웃소싱 바람을 일찍이 예견한 사람이다. 그가 4년 전 한 재벌 그룹의 잘 나가던 홍보과장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도 사업이 되겠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가 창업한 회사는 ‘당신 회사의 홍보실이 되어 드립니다’를 슬로건으로 내건 홍보 대행사. 전 직장에서의 장기도 살리고 기업이 아웃소서를 활용할 가능성이 높은 분야가 홍보나 마케팅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발주자들의 비밀 유지 요구에 따라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홍보 대행이나 사외보 제작, 각종 이벤트를 의뢰하는 기업의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고 말한다.

소호를 새로운 근무 형태로 자리잡게 한 것은 컴퓨터 네트워킹과 아웃소싱이라는 두가지 시대 조류 때문이었다. 네트워킹이 소호족의 일 작업을 가능케 했다면 아웃소싱은 돈벌이가 되도록 하는 존립 기반이었다. 곽동수씨 같은 프리랜서나 대행 전문 업체들은 모두 기업의 아웃소서로 기능하는 사람들이다.
소호의 매력은 여성이나 정년 퇴직자들에게도 강렬하다. 소호 환경의 기본 시스템인 재택 근무는 육아 문제로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는 여성들에게 획기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현대정보기술의 재택 근무자 강영화씨(39)는, 일하고 싶은 욕구와 육아 문제를 동시에 충족시켜 만족도가 높다고 말한다. 프로그래머 17명을 재택 근무시키고 있는 현대정보기술은 이런 근무 형태가 회사에도 경비 절감 등의 이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인 셈이다. 문화 역사 기행 전문 업체 천하장군 브레인스위치를 지난해 창업한 박원순(55) 김수홍(55) 이지연(53) 씨는 할머니 소호족이다. 재택 근무를 하며 전화와 컴퓨터로 회원을 모집하고 여행 기획을 하는데, 나이 많은 사람들도 아이디어만 좋으면 ‘짭짤한 사업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이다.

2000년에는 미국 노동자 절반이 소호족

미국에서 텔레컴뮤터라고 부르는 재택 근무자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이유는, 회사나 당사자에게 모두 좋은 조건이며, 교통난을 타개하고 환경 오염을 줄여야 하는 사회적 필요성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홈오피스 근무자는 대기업 재택 근무자를 포함해 약 6천만명. 미국 노동부는 2000년에는 노동 인구의 절반이 집에서 일하는 소호족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한국에서도 소호 선호 현상은 뚜렷해지고 있다. 대기업의 인기가 주춤해지는 현상에서 이같은 소호 선호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인터넷·인트라넷 전문 업체인 버추얼아이오시스템 김 욱 실장, 한글과컴퓨터사 김택환 이사, 그룹웨어 업체인 핸디소프트 장금용 차장 등은 삼성·현대·코오롱에서 몇년 전 전직한 사람들로, 인재 역류 현상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스스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자기 아이디어가 회사 발전에 즉각 반영되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격식과 외형을 따지기보다 자유분방하게 마음껏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근무 형태를 선호하는 20, 30대 젊은 사람들이 한국에서도 거센 소호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이 틀림없다.

이미 한국에서 소호 형태로 성공한 사람들은 적지 않다. 한글과컴퓨터사 이찬진 사장(32), 웹인터내셔널 윤석민 사장(30) 같은 잘 나가는 벤처 기업 사장들은 이미 10대의 우상이 된 사람들이다. 정보제공업체 피시링크의 서원태 사장(37)과 브레이트시스템즈 이미영 사장(31) 같은 이들은 이미 소호 시장의 거물급 인사들이다.

소호의 세계는 학력 이데올로기나 집안 배경을 따지지 않는다. 오직 기발한 아이디어와 실력의 승부처일 뿐이다. 유망한 사업을 찾아내는 정보력과 그것을 구체화하는 기획력·실천력을 가졌거나 가지고 싶다면 소호에 도전해보는 것이 어떨까. 소호 예찬론자 곽동수씨의 조언이다.

소호는 국민 경제 측면에서도 긍정적이다. 창의성을 발휘하는 사람들을 늘리며 새로운 일자리와 업종을 창출해 경제 전체의 역동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서상록 중소기업연구원장은 “21세기는 정보 사회이며 소기업 중심 사회이다. 소호는 어떻게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하나의 답을 주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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