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필요한 것은 강력한 리더십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7.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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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 문제·재벌 개혁 ‘발등의 불’…‘정치 쇼’말고 처방 내놓아야
“이것 좀 보세요. 이게 말이나 되는 겁니까?” 지난 4일 한 외국 언론사 서울지국 사무실. 외국 언론사 특파원 네댓 명이 국민회의가 보낸 팩시밀리 한 장을 돌려보며 껄껄 웃었다. 팩스의 요지는 국민회의가 집권하면 국제통화기금측과 재협상해 자금 지원 조건을 완화하겠다는 것. 한국에서 특파원 생활을 가장 오래한 한 기자는 ‘일고할 가치도 없는 정치 쇼’라고 일갈했다. “국민회의가 그 정도로 우둔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만약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대단히 한심하고도 위험한 발상이다”라고 비판했다.

외국 특파원들의 실소를 자아낸 것은 그뿐이 아니다. 대선 후보들이 앞다투어 쏟아내는, 일자리를 백만개 또는 3백만개 늘리겠다는 공약이나, 금융실명제를 사실상 일시 중단시키겠다는 공약 따위도 한결같이 비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내년 경제성장률이 3% 이하로 떨어지면 백만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다. 지금 상황에서 책임 있는 정당이라면 부도 위기에 처한 기업의 감원 필요성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금융실명제 보완 논의에 대해서도 비판은 가혹하다. 우선 당장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금융실명제 일시 중단이나 사실상의 폐지 주장은 정경 유착 고리를 끊고 정책의 투명성을 제고하라는 국제통화기금 요구와 정면 배치한다는 것이다.

IMF 정국은 냉혹한 현실…감정적 대응 자제해야

국내 경제 전문가들이라고 해서 입장이 다를 리 없다. 한 경제 전문가는 “당분간 한국의 경제 대통령은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총재나 클린턴이라고 보아야 한다. 경제 분야에 관한 한 다음 대통령에게는 재량권이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선 후보들이 내놓은 장밋빛 경제 공약들은 공허할 뿐이다. 지난 3일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30대 그룹 기조실장 회의에 참석한 국민신당 한이헌 정책위의장의 말은 대선을 코앞에 둔 정치권의 고민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선거를 앞둔 대선 후보들은 기업인들에게 함부로 해고하지 말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해고가 불가피함을 모르는 후보는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대선 후보들의 장밋빛 공약은 한 표가 아쉬운 그들의 현실적 필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놓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라는 고백이다. 따라서 지금 상황에서는 정책을 보고 후보를 뽑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같은 한계를 인정한다면 ‘경제 대통령’감으로 적임자는 어떤 사람인가. 외국인들은 국제통화기금이 요구하는 금융·재벌 개혁을 누가 가장 빨리, 확실하게 집행할 것이냐를 잣대로 제시한다. 국제통화기금이 요구하는 내용 가운데는 당초 일정보다 훨씬 앞당겨 금융 시장을 개방하고 수입선 다변화 정책을 포기하라는 불리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물론 돈을 빌려주는 미국·일본·유럽 국가들의 입김이 작용했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금융 개혁과 재벌 혁신은 한국 경제의 고질을 치유하고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다음 대통령은 고통스럽더라도 최대한 빨리 개혁 작업을 마무리하는 것이 절실하다.

이런 현실은 대선 후보들에게는 고통스런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에게 등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재벌과 기득권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회창 후보는 당선 직후 재벌에 메스를 대야 하고, 중소기업인·노동자·농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김대중 후보는 정리 해고와 농수산물 시장 개방을 허용하는 악역을 떠맡아야 한다. 다음 대통령이 그같은 역할을 떠맡지 않으면 한국의 위기 극복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과연 다음 대통령이 그같은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외부의 시각은 한마디로 ‘못 믿겠다’는 것이다. 3당 후보에게 국제통화기금과 한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서명을 받아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총재는, 지난 4일 일본에 들러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자금을 회수할 수도 있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도 4일자 사설을 통해 한국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감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믿지 못하겠다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 △국회는 금융개혁안 통과를 미루었고 △정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국제통화기금의 구제 금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했으며 △정부 관료와 노조·은행·기업가 들이 아직도 포괄적 개혁의 필요성을 부인하고 있다.

또 하나 외국인들이 우려하는 것은 민족주의이다. 이미 그같은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의 요구 조건 가운데 미국·일본의 무리한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는 보도가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외국 증권사 서울지점장은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번 사태의 책임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 정부와 기업, 노동자, 소비자 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비난의 화살을 외부로 돌리는 것은 부도덕할 뿐 아니라, 한국 경제의 회생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충고했다.

경제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인기에 영합하는 대통령은 안된다’고 지적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국민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 민족 감정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당분간은 욕을 먹더라도 위기를 극복할 뚜렷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이를 추진하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관건은 기업·노조·소비자의 상충하는 이해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 금융 전문가는 다음 대통령의 중요성을 이렇게 역설했다. “이번 사태의 주요 책임은 정부와 재벌에게 있다. 그러나 고통은 모두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고통을 형평성 있게 분배하고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다음 대통령의 몫이다. 대통령이 그렇게 하지 못하면 경제 불안이 사회 불안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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