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풍과 북풍, 한 뿌리에서 나왔다
  • 김 당 기자 ()
  • 승인 1998.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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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내 김현철 인맥이 진원… YS 위한 카드가 ‘이회창 당선용’으로 쓰여
‘이번 총풍 사건을 계기로 검찰은 4·11 총선 건을 수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대선 전 총풍 유인 사건은 4·11 총선 전의 무력 시위 사건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즉 두 사건은 구 여권의 같은 뿌리에서 나온 사건이기 때문에 검찰로서는 줄기를 캐면서 뿌리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4·11 총선에도 ‘거래’ 있었다’ 제목의 지난호 〈시사저널〉 커버 스토리 기사의 한 대목이다. 10월13일부터 발매된 이 기사가 나온 직후인 10월14일 안기부는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에 대한 안기부 입장’이라는 제목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서 안기부는 ‘선거 때마다 북한의 불순 책동으로 집권당이 항상 어부지리를 얻었다는 사실’과 함께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을 조사함에 있어 명예를 걸고 전모를 국민에게 명백하게 밝힘은 물론 4·11 총선 당시 판문점 북한군 출몰 사건의 진상도 밝혀 국민들의 의구심을 풀겠다’고 분명한 의지를 밝혔다. 그동안 언론이 4·11 총선 전 북한군 무력 시위 사건에 대해 남북한 거래 의혹을 제기해 왔지만 국가 기관이 공개적으로 진상 규명 의지를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고문 시비라는 암초에 걸려 진전이 없던 총풍 사건에 대한 수사가 이제 비로소 ‘맥’을 짚은 셈이다. 이번 총풍 사건은 96년 판문점 무력 시위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즉 총풍과 96년 판문점 북풍은 한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시사저널>이 지난호에서 내비쳤지만 북풍과 총풍의 연결 고리는 박관용 의원과 김현철씨의 사조직이다. 박의원은 지난호 인터뷰에서 총풍 배후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박의원은 자신이 배후로 오해 받는 배경에 대해 △85년 남북 국회회담 대표를 할 때부터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93년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면서부터는 대북 문제에 신경을 안 쓰고 개혁에만 신경을 썼고 △그러다 카터 전 대통령이 94년 북한에 다녀온 뒤 남북 정상회담을 열기로 정해지자 이제는 남북 문제에 신경을 써야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김일성이 죽어서 그것으로 끝났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박의원은 93년 문민 정부 초대 비서실장 시절부터 김영삼 대통령 임기중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하기 위해 야당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전금철 북한 조평통 및 아태평화위 부위원장과의 비선(秘線) 라인을 가동해 왔다. 현재 북한에 억류된 것으로 확인된 김진경 옌볜 과기대 총장, 밀가루 북송 사업을 중개한 재미교포 김양일씨, 재미교포 목사 ㄱ씨 등이 YS의 대북 밀사 노릇을 했던 사람들이다.

YS의 대북 정책이 혼선을 빚게 된 것도 아무런 공적인 책임이 없는 이런 비선들이 남북 관계에 개입해 기존 공조직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청와대와 안기부는 심한 마찰을 빚었으나 안기부를 불신했던 YS의 ‘개혁 위세’에 눌려 안기부는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중의 하나가 중국 선양 민족경제개발공사 김진송 부총경리의 밀입국 및 박관용 의원 면담 사건이다. 95년 당시 김씨는 91년부터 알게 된 대북 사업가 장석중씨의 배로 밀입국해 박의원을 만났다. 문제는 김씨가 안기부 내사 자료에 북한 공작원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회창 지지도 떨어지자 ‘총풍’으로 급선회

박의원이 대북 비선을 가동한 목적은 정상회담을 실현해 궁극적으로 남북 통일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박의원이 가동한 비선 조직이 김현철씨에게 소개되면서 정권 재창출을 위한 대북 프로젝트로 변질했다. 이를 계기로 김씨와 김씨의 천거로 청와대에 포진한 ‘현철 인맥’(행정·비서관)은 남북 관계를 이용해 정권을 재창출할 목적으로 이산 가족 상봉 같은 ‘포지티브 카드’와 대북 지원을 대가로 한 북풍 거래 같은 ‘네거티브 카드’를 동시에 준비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총풍 사건을 수사하는 서울지검 공안1부(부장검사 홍경식·주임검사 박철준)가 10월12일 박의원의 생질로 이른바 총풍 실행 3인조의 한 사람인 오정은 전 행정관이 을지의대 설립 인가 비리와 관련해 구속 수감된 최동렬 전 청와대 행정관에게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위한 사조직 결성을 제의한 사실을 밝혀내고 최씨를 소환해 이 부분을 집중 조사했다는 점이다. 또 검찰은 이미 10월10일 오씨와 함께 대선 당시 대선 정책 보고서를 작성해 이회창 총재에게 전달한 조청래 전 행정관을 ‘조용히’ 불러 조사했다.

최씨는 96년 9월 김현철씨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김씨를 수행한 측근이다. 또 오씨는 청와대의 지시로 현대가 돈을 댄 96년 밀가루 북송 사업의 실무를 이끈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이 바로 정권 재창출을 위해 대북 카드를 마련한 장본인들이다.

한보 커넥션 및 국정 개입 의혹으로 주군(主君)을 잃은 민주계 출신 젊은 비서관·행정관 들은 대선 전에 이른바 김심(金心)의 향배를 두고 난상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참석자들은 이회창 대세론과 YS와 이회창의 껄끄러운 관계를 의식해 중립을 지키자는 쪽으로 나뉘었으나 대세는 이회창을 따르자는 쪽이었다. 이들은 청와대 안에 이후보 비선 조직을 가동했다. 그러나 이후보의 패색이 짙어지자 초조해진 이들은 ‘아이디어’ 차원에 머물렀던 대북 카드를 실행에 옮겼다(원래의 대북 프로젝트 중에는 판문점에서 아군이 응사할 때까지 총격전을 벌여 전시 상황을 조성해 대선을 무기한 연기함으로써 YS 임기를 자동 연장시키는 안까지 있었다).

처음에는 포지티브 카드를 쓰려 했던 신한국당이 네거티브 카드를 쓰기로 돌아선 것도 병풍(兵風)을 맞아 떨어진 이후보의 지지도를 만회하기 위해서였다. 이때부터 나름으로 대북 비선을 관리해 온 신한국당 중진 의원들이 가동되었다. 97년 9월 이명박 의원은 선거법 위반 사건으로 ‘제 코가 석자’인데도 비밀리에 베이징으로 가서 북한 국가보위부가 직영하는 위장 식당주점 해당화에서 아태평화위원회 참사 강덕순(대남 공작 기관인 통전부 국장)을 만났다. 97년 11월 정재문 의원은 강덕순과 안병수 조평통 부위원장을 베이징 장성호텔에서 두 차례나 만났다. 정의원은 선거일이 한 달도 채 안 남은 상황에서 ‘한가하게’ 이후보 당선 뒤의 남북 관계를 의논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일까? 이회창 총재의 비선 조직이자 박관용 의원의 생질, 이총재 동생의 후원인 등으로 얽히고 설킨 ‘총풍’ 3인 중 한성기·장석중 2인이 12월10일 베이징 캠핀스키 호텔에서 강덕순을 만나 비료 지원을 대가로 총격을 요청한 사건으로까지 전개된 것이다. 결국 주군을 잃은 YS·현철 인맥이 YS를 위해 준비한 비장의 카드를 이총재를 위해 써 먹으려다 실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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