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인물로 보는 항일무장투쟁사>역사문제연구소
  • 지수걸 (공주대 교수·한국사) ()
  • 승인 1995.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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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어떤 언어에서는 ‘역사(history)’라는 말과 ‘이야기(story)’라는 말이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사마천이나 헤로도투스와 같은 위대한 역사가도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예로부터 역사와 이야기가 매우 유사한 것이었음을 반증한다. 하지만 ‘이야기체 역사’의 전통을 온전히 되살린 우리의 역사책은 그리 흔치 않다. 그러던 중에, 우리도 감동과 재미를 겸비한 이야기 책 한 권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역사(학)의 대중화를 표방하면서 창립 때부터 대중 사업을 많이 벌여 왔다. <인물로 보는 항일무장투쟁사>는 그 중 ‘한국사 교실’에서 이루어진 강의와 질의·응답을 본맛 그대로 녹취하여 편집한 책이다.

이 책에는 조동걸 교수의 <총론:항일무장 투쟁의 역사>를 비롯한 ‘이야기’가 모두 7편 실려 있다. 서중석 교수는 ‘청산리 전쟁의 영웅들(김좌진·홍범도)’을, 윤병석 교수와 이균영 교수는 이상설·박용만·신채호·이동휘를, 젊은 연구자인 염인호·장세윤·이종석은 김원봉·무정·이청천·양세봉·김일성·최용건 등 대표적인 항일 투사들의 삶과 투쟁을 이야기체 역사의 정석대로 흥미롭게 엮어 놓았다.

사실 이야기 소재만을 놓고 볼 때 사람 이야기만큼 재미와 감동을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특히 한반도는 20세기의 ‘세계사적 실험’이 이루어진 곳이므로 파란만장한 이 땅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눈물겹다. 모든 것의 끝간 자리를 남김없이 보여주었던 사람들, 어둡고 괴로운 역사를 맨몸뚱이 하나만으로 거뜬히 살아냈던 사람들. 그래서 그들의 삶과 투쟁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과 교훈을 준다.

더욱이 <인물로 보는 항일무장투쟁사>는 ‘있는 바 그대로’라는 역사학 고유의 덕목을 철저히 지켰다는 점에서 다른 흥미 위주의 책들과는 그 품과 격이 다르다. 특히 이 책의 저자들은 현장 답사를 통해서 수집한 여러 유형의 구전 자료를 이야기 곳곳에서 풍부하게 활용함으로써 입담의 생생함과 품위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흔히 우리의 역사 현실은 소설보다 훨씬 감동적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동안 젊은 역사 연구자들은 ‘운동의 과학화’를 실현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그런 역사를 쓰는 데 소홀하였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과학적·실천적 역사학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요즘은 사정이 좀 달라졌다. ‘애국이니 매국이니 골치 아픈 이야기는 그만 두고 자본주의 발전만 이야기하자’는 몰역사적인 담론이 횡행하고 있는가 하면, 몇몇 언론 매체들은 상업성을 의식한 무분별한 ‘역사 뒤집기’로 시도 때도 없이 시청자와 독자를 우롱하고 있다. 이런 판국에 ‘과학과 실천’만을 고집하는 것은 일종의 직무유기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인물로 보는 항일무장투쟁사>는 ‘역사(학)의 대중화’라는 목표를 훌륭하게 달성한 보기 드문 성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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