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민영화, 전면 재조정 필요하다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8.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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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정부, 대상 업체 전면 재조정 필요…정부 조직 개편 ‘큰 틀’에 맞추어야
지난해 김현철씨 비리 수사의 기폭제가 되었던 이른바 ‘박경식 비디오 테이프’에는 김현철씨의 YTN 인사 개입 발언말고도 주목할 만한 장면이 또 하나 있다. 박경식씨가 김씨에게 ‘고속도로 휴게소 운영권을 낙찰받고 싶으니 영식님께서 힘을 써 달라’고 청탁하는 대목이 그것이다.

이는 김영삼 정부가 추진한 공기업 민영화 정책이 실패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정부는 93년 이래 공기업 58개에 대한 민영화 작업을 추진해 왔으나, 이 중 실질적으로 민영화한 것, 곧 정부가 가지고 있던 지분을 완전히 매각한 기업은 10여 개에 불과하다. 그나마 앞서의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주인만 ‘군화에서 등산화로’ 바뀌고 끝난 예가 적지 않다.

최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가 4대 공기업(한국통신·한국중공업·담배인삼공사·한국가스공사)과 포항제철·서울신문사·국정교과서 민영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배경에는, 이처럼 현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정책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깔려 있다.

YS 정부, 공기업 민영화 정책 ‘표류’ 거듭

그러나 인수위의 방침에 대해 해당 공기업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한국중공업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10월 제정한 민영화특례법의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았다’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기업을 들쑤시는 것이 무슨 관행이냐고 항변했다. 여기에서 특례법이란 지난 정기 국회를 통과한 ‘공기업의 경영 효율화 및 민영화에 관한 특례법’을 말한다. 이 법은 2002년까지 4대 공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실제로 역대 정권은 집권할 때마다 나름으로 공기업 민영화 정책을 추진해 왔다. 대한항공·대한통운 등 16개 공기업을 사기업에 판 제1차 민영화(1968년), 서울신탁은행 등 4개 은행을 대상으로 한 제2차 민영화(1980년), 포철·한전 등의 지분을 국민주 형태로 국민에게 매각한 제3차 민영화(1987년)는 이같은 정책의 산물이었다. 현정부의 제4차 민영화 정책은 그 연장선상에 있었으나 이전과 뚜렷한 차별성을 처음에는 가지고 있었다. 즉 부분적 민영화가 아니라 ‘몇 개의 예외를 제외하고 가능한 모든 공기업을 민영화한다’고 목표를 대전환한 것이다.

문제는 이같은 목표가 확고하게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애초 의욕과 달리 현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정책은 표류를 거듭했다. 정부의 자체 분석에 따르면 △재벌의 경제력 집중 우려 △증권 시장 혼란(실제로 87년 포철과 한전의 일부 지분을 국민주 방식으로 매각할 때 시가 총액이 겨우 3.2% 증가했는데도 주식 시장이 크게 동요했다) △관련 이해 집단의 반발 등이 주된 이유였다. 그나마 정권 막바지에 건진 것이 앞서의 민영화특례법이다.

그럼에도 이는 ‘민영화 정책의 총체적인 실패를 덮어 보려는 미봉책’이라는 것이 국민회의 정책분과위원회 곽해곤 전문위원의 주장이다. 이 법이 포철·한전 같은 매머드급 공기업을 제외한 4대 공기업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을 뿐더러, 이 4대 기업에 대해서도 ‘중·장기적으로 반드시 민영화하겠다’는 단서만 붙여 놓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특례법에 따르면, 4대 공기업은 2002년까지 전문 경영 체제를 도입하는 등 민영화 일정을 추진하되 완전 민영화 시점은 그때 가서 ‘재검토’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인수위가 다시금 공기업 민영화 정책을 들고 나온 것은 이같은 문제점 때문이다. 여기에는 과거에 없던 현실적인 절박함도 깔려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예산과 외환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외국인을 포함한 민간 투자자에게 공기업 주식을 대량 매각하는 것이 불가피하리라는 전망이 그것이다. 대우경제연구소는 올 한 해 36억달러 가량 유입될 것으로 보이는 외국인 주식 투자 자금에 공기업 민영화 문제가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했다. 82년 국제통화기금 관리 체제에 들어갔던 멕시코 정부는 82∼92년에 공기업 주식을 매각해 약 1백30억달러를 끌어들였다는 것이 미국 국제경제연구소의 분석이다.

정부 조직과 역할을 축소하라고 권고한 국제통화기금이 공기업 민영화를 요구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전망도 있다. 82년 멕시코 정부는 국제통화기금 권고를 바탕으로 작성한 ‘국제 경제 프로그램’에 공기업 수를 40% 이상 축소하겠다는 조항을 넣어야 했다. 그 결과 당시 1천1백55개에 이르던 공기업은 94년 말 현재 1백95개로 줄었다.

이같은 이유로 새 정부가 ‘제5차 공기업 민영화 정책’을 세우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단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가 따라붙는다. 우선은 기존 민영화 대상 공기업을 전면 재조정해야 한다는 전제이다. 인수위의 한 관계자는, 최근 민영화 대상으로 오르내린 4대 공기업과 포철·국정교과서 등은 인수위의 1차 검토 대상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 중에는 전문 경영 체제가 효과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는 기업(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도 있는 만큼 새 정부 들어 다각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원지주·황금주 제도 도입 바람직

한국개발연구원 남일총 박사는 이를 위해 해당 기업이 왜 공기업이야 하는지, 공기업 성격에 대한 합의가 먼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를테면 상업성이 강한 데다 ‘정부의 세입 확대’라는 명목말고는 공기업이어야 할 당위를 찾기 어려운 담배인삼공사 같은 경우는 즉각 민영화 작업에 들어가되, 공익성이 강한 기업은 단계적인 민영화 절차를 밟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공기업 민영화를 가로막아 온 여러 문제에 대한 대안을 모색한다는 전제이다. 이를테면 경제력 집중 우려에 대해서는, 동일인 지분 취득 비율을 7%로 억제한 특례법 조항을 다른 공기업 민영화에도 적용하는 방안이 있다. 관련 이해 집단, 특히 강성 공공 부문 노조의 반발은 정부가 사원지주제 도입 등 충분한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다.

한편으로 통신·전력 같은 국가 기간산업의 소유권을 외국 자본에 넘겨줄 수 없다는 국민 정서도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영국처럼 ‘황금주(golden share)’를 두는 방식을 제안한다. 황금주란 국가 기간산업이 외국 자본에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인수당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특정 기업의 대규모 소유권 이전이나 정관 개정 때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권한을 부여한 제도이다.

세 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작업이 정부 조직 개편이라는 ‘큰 틀’에 따라 짜여야 한다는 전제이다. 공기업과 이해가 얽힌 정부 부처가 계속 민영화 정책을 세우고 규제를 행사하는 한 정책은 왜곡·표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민영화 정책 추진 기구와 규제 기구를 정부와 별도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 김준기 교수(서울대 행정대학원)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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