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풍 주의보' 내린 정치권
  • 許匡畯 기자 ()
  • 승인 1997.10.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야당 ‘조기 경보반’ 등 비상 대기…여당도 역효과 우려해 신중
선거 때만 되면 부는 바람이 있다. 이른바 북풍이다. 과거 총선이나 대선 때마다 북한은 그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한국의 선거에 개입했고, 선거 결과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에 따라 정치권에서는 선거 때마다 북풍 시비가 일었고, 남북 관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멀게는 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전에 국가보안법을 통해 공안 찬바람이 몰아친 것에서부터, 가깝게는 87년 대선 전에 일어난 북한의 KAL기 폭파 테러, 92년 대선 전에 터진 중부지역당 간첩단 사건, 96년 총선 직전에 터진 북한군의 판문점 비무장지대 침입 사건(DMZ 사건)에 이르기까지 북풍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북풍을 활용하는 측은 북한 정보를 독점하고 남북 관계를 좌우할 수 있는 정부·여당이었으며, 북풍의 일방적 피해자는 야당이었다.

선거 때 북풍이 존재했다는 것, 이것이 실제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학계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이다. 신아세아연구소 김영수 북한연구실장은 “북이라는 변수는 상존하는 씨앗이고, 이 씨앗을 싹틔우고 꽃피운 것은 여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이다”라고 말한다. 정준표 교수(영남대)는 지난 4·11 총선 때 발표된 다양한 여론 조사 결과를 근거로, DMZ 사건이 야당(국민회의) 의석을 10석 정도 줄였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선거 시기에 테러나 군사 행위를 통해 긴장을 조성하는 북한의 의도는 무엇인가. 올해의 경우 아직 향방이 불투명하지만, 지난해까지 진행된 한국 선거와 관련한 북한의 대남 정책을 가장 간명하게 표현해 주는 것은 ‘적대적 의존(공존) 관계’라는 말이다. 북한의 주요 국가 목표 중 하나가 ‘대외 위협으로부터 체제를 지키는 것’이고, 체제 유지와 내부 통제를 강화하려면 한국과 일정한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는 쪽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마치 서로 등을 맞대고 기대어 서야 지탱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분석을 근거로 하여 정치학자나 북한 연구자 들은, 북한이 대북 문제에 융통적이거나 관계 개선을 적극 추진할 세력이 한국에서 집권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는 데 일치된 의견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선거에서 북한은 대북 문제에 강경한 여당이 계속 집권하기를 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부에 의한 ‘인공풍’ 가능성 높아

이와는 다른 시각도 있다. 정준표 교수는 “선거와 관련해 북한이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여당의 패배지 야당의 패배가 아니다. 96년의 DMZ 사건도 총선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라기보다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행동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북한이 제공한 북풍의 실마리가 정부·여당과 언론에 의해 확대 과장되어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북풍을, 북한이 적극 작용해 일으킨 것(자연풍)과 정부측이 선거에 유리하도록 조성한 것(인공풍)으로 구분한다. 87년 대선 때의 KAL기 폭파 사건이나 DMZ 사건이 전자의 경우며, 선거 때 정부가 발표하는 간첩단 사건은 후자의 대표적 예로 꼽힌다.

두 달 남짓 남은 이번 선거에는 어떤 북풍이 불까. 학계와 정계의 ‘기상 관측관’들은 북한이 돌발 사건을 일으킬 가능성으로 △신포 경수로 현장에서의 한국 근로자 억류 △서해 5도 지역에서의 군사적 시위 행위 등을 꼽는다. 또 KAL기 폭파 같은 테러도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북한 상황으로 보아 이같은 자연풍이 불기는 어렵다고 본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사활을 걸고 매달리는 북한 처지에서, 가뜩이나 국제 테러국으로 미국 리스트에 올라 있는 마당에 이같은 모험을 감행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보다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인공풍’이다. 선거를 앞두고 △대규모 조직 간첩단 사건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폭탄 발언 △황씨 못지 않은 북한 고위 관료의 망명 △이산 가족 관련 사업이나 남북 경협·관광 사업 등 획기적인 대북 교류 정책 발표 등이 벌어질 수 있다.

북한, 정부 실정 극대화해 야당 도울 수도

정부·여당이 인도주의를 내세워 이산 가족과 관련한 사업을 추진할 경우 야당은 아무런 대응책이 없다. 인도적 사업이므로 반대도 못하고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찬 바람보다 무서운 ‘더운 북풍’의 위력이다. 또 잠수함 사건처럼 북한의 일상적인 대남 첩보 공작이 의도하지 않게 돌출되거나 정부가 돌출시켜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그동안 선거에서 중요한 고비마다 불어닥친 북풍으로 크게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야당은 풍향계를 높이 올리고 북한과 여당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민회의의 한 관계자는 “이번 선거는 이회창·김대중·김종필·조 순·이인제 다섯 후보에 김정일까지 더한 여섯 명의 각축이다”라고까지 말한다. 김대중 총재가 상대해야 할 경쟁자에 북한까지 포함된다는 말이다. 국민회의는 최근까지 이렇다 할 북한 악재가 터지지 않았고, 야당의 정보력이 크게 신장했으며, 국민 인식도 과거와는 크게 달라져서 웬만한 북한 바람에는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투표 당일까지 북풍 가능성이 상존한다고 보고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당내에서는 ‘조기 경보반’ ‘지뢰 제거반’ 성격의 조기 발견·대응 팀이 비상 대기 중이고, 국회에서는 국방위와 정보위 등 관련 상임위원회를 통해 관련 정보를 체크하고 있다. 또 ‘북조선 명함 파동’ 같은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내부 단속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여당측은 그동안 선거 때면 북풍이 불었고, 그것이 야당에 불리하게 작용해 왔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과거의 대선·총선과 상황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우선 우리 사회에 전반적으로 합리성이 높아져서 단순한 북한 바람이 과거처럼 여당 표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야당의 상황 인식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당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북풍이 오히려 야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신한국당의 한 관계자는 “이번 선거에서는 ‘야당 북풍’이 불어닥칠 가능성도 있다”라고 말한다. 예컨대 북한이 정부의 대북 정책 실정(失政)을 극대화하는 대남 카드를 활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야당에게 표를 모아주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당은 이번 선거에서 ‘북풍 카드’가 그다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리라고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섣부른 대북 강경책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으며, 지금의 남북 상황으로 보아 활용할 수 있는 대북 카드는 관계 개선 카드일 뿐인데, 이조차 결코 여당에게 유리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 여당이 앞서서 추진할 경우 우리 사회에 굳게 뿌리 박고 있는 보수층의 지지를 잃을 우려마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 선거를 통해 최소 노력으로 최대 효과를 거둔 북풍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여당은 선거 막판까지 북풍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듯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