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공포' 등으로 직장인 건강 적신호
  • 李哲鉉 기자 ()
  • 승인 1998.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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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공포’ 등 직장인 스트레스 급증… 흡연·음주 악순환 고리 끊어야
올해 초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부설 구로병원 응급실에 김 아무개씨(32)가 실려 왔다. 구로병원 순환기내과 오동주 교수는 김씨가 심장 근처 혈관이 막히는 심근경색증에 걸렸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오교수는 곧바로 환자의 주요 바이탈 사인을 체크하고 혈액 샘플을 실험실로 보냈다.

그런데 김씨는 다른 심근경색 환자와 달리 심근경색증에 걸릴 만한 징후가 없었다. 김씨의 혈중 콜레스테롤은 170㎎, 혈압은 80∼120으로 정상이었다. 당뇨 증세도 없었다. 심근경색증은 혈중 콜레스테롤이나 혈압이 높은 사람에게 흔히 나타나는 질병이다. 따라서 이제 서른을 갓 넘긴 건강한 젊은이가 이 병에 걸릴 가능성은 희박했다.

오교수는 김씨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발병 원인을 알았다. 월급쟁이 김씨는 경제 위기가 닥친 지난해 말부터 퇴직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출근할 때마다 혹시 정리 해고 명단에 자기 이름이 끼어 있는지를 초조하게 살폈다고 했다. 하루 한 갑씩 피우던 담배도 하루 세 갑으로 늘어났다.
45세 이하 심근경색 환자 400% 증가

갑자기 늘어난 흡연량이 김씨 혈관을 망가뜨렸다. 담배 연기와 함께 폐로 들어간 일산화탄소가 혈관 내벽에 상처를 입히자 그 부위에 염증이 생겨 부어올랐다. 또 담배 연기에 섞인 각종 유해 물질이 혈액에 녹아 피가 끈적끈적해져 혈전(핏떡)을 만들었다. 끈적끈적한 피에 실린 혈전은 혈관 내벽이 부어올라 지름이 좁아진 심장 근처 혈관을 막아 버렸다. 풍선 확장술과 스텐드 삽입 수술을 한 끝에 김씨는 귀중한 가까스로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경제 위기 이후 김씨처럼 급성 심근경색으로 구로병원을 찾는 이가 부쩍 늘었다. 올해 4∼8월 구로병원을 찾은 심근경색 환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55% 가량 늘었다. 특히 45세 이하 젊은 환자가 400%나 증가했다. 심근경색증은 50∼60대에 주로 발병한다. 45세 이하 환자는 전체 환자의 5∼10%였다. 하지만 경제 위기 이후 42세 이하가 33%를 차지할 정도로 눈에 띄게 증가했고, 30대도 14%나 차지했다.

올해 구로병원을 찾은 젊은 연령층 심근경색 환자 7명의 발병 요인을 살펴보면, 고혈압이나 당뇨 환자는 없었고,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환자도 1명뿐이었다. 하지만 7명 모두 흡연량이 많았고, 그 가운데 절반은 얼마 전부터 하루 2∼3갑으로 흡연량을 갑자기 늘렸다.

오교수는 “지난해 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 이후 30∼40대 한국 직장인들이 경제 위기에 적응하기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거리에 실업자가 쏟아져 나오고, 아직 퇴직하지 않은 직장인들도 언제 해고 대상이 될지 불안한 상태이다. 따라서 이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과거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문제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가장 좋지 않은 방법인 흡연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6월 말 실시한‘98년도 전국민 보건 의식 행태 전화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흡연율(아래 도표 참조)은 지난 10년 동안 줄곧 줄어들다가 올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경제 위기가 닥치기 전까지는 흡연율이 낮아졌다가 지난해 말 이후 갑자기 높아진 것이다. 특히 30대 남자 흡연율은 지난해 70.3%에서 올해 72.3%로, 40대 남자 흡연율은 지난해 65%에서 올해 74.7%로 크게 높아졌다.

흡연율 증가는 스트레스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 스트레스가 늘어나면 흡연율도 높아지기 마련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흡연율과 함께 조사한 스트레스 조사 결과도 스트레스와 흡연율의 상관 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지난 한 달간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느끼셨습니까’라는 질문에 ‘많이 느꼈다’ 또는 ‘대단히 많이 느꼈다’라고 응답한 인구 비율이 지난해 34.5%에서 올해 37%로 높아졌다. 특히 20∼40대 경제 활동 인구는 30%대에서 40%로 눈에 띄게 늘어났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신체는 달갑지 않은 외부 자극에 대응하기 위해 비상 체제에 들어간다. 몸안에서 아드레날린과 부신피질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혈압이 오르기도 하고, 엔돌핀이 줄어들면서 면역 기능에 변화가 일어난다. 과도하게 스트레스를 받은 이들은 소화 불량과 수면 장애를 호소하거나, 가슴과 머리에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고혈압·당뇨·동맥경화증·위궤양·과민성대장염·전립선염·암을 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삶이 각박할수록 푹 쉬어야

경제 위기 이후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으로 경제적 어려움과 직장 생활을 꼽는 이가 크게 늘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스트레스를 받는 원인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꼽은 이는 지난해 18%에서 올해 26%로, ‘직장 생활’이라고 응답한 이는 11%에서 21%로 크게 증가했다. 심지어 지난 3개월 동안 병원비가 부담이 되어 병원에 가지 못한 인구 비율도 15.7%나 되었다.

윤방부 교수(연세대학교·가정의학과)는“실직자들은 살 길이 막막하고, 직장인들은 실직자를 보면서 자신이 실직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또 정리 해고로 인해 실직하지 않은 직장인들의 업무량은 곱절로 늘어나기 마련이다”라고 말했다.

생산 활동 연령층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총생산 손실액도 그만큼 늘어날 전망이다. 질병으로 인한 95년 서울시 생산 손실액이 서울 지역 총생산의 0.68%(5천7백54억원)를 차지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이상호 연구원은“올 연말까지는 질병으로 인한 손실액이 정확하게 집계되리라고 본다. 생산 활동 인구의 질병이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손실액도 크게 늘어나리라 판단된다”라고 말했다.

외환 위기로 촉발된 경기 침체는 한국 경제를 위기에 빠뜨리는 것 못지않게 한국인의 건강도 위협하고 있다.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는 현실에서 직장인들이 살아 남으려는 노력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다. 전문의들은 하나같이, 흡연량을 줄이고 운동량을 늘리며,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게끔 여유있는 생활 태도로 휴식을 취하는 일이 더 없이 중요한 시기라고 충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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