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0돌 특집]통한의 50년, 원폭 피폭자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5.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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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피폭자들 한·일 양국 무관심 속 이중 고통… “일본인과 똑같이 원호법 적용하라”
45년 8월6일과 9일 단 두 개의 폭탄으로 순식간에 70여만 명의 사상자를 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투하는 인류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비극이었다. 그러나 원폭 투하로 5년에 걸친 태평양전쟁과 36년에 걸친 일제의 한반도 강점은 한순간에 끝났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광복 50돌’을 기념하는 자리에 서 있다. 그러나 요란한 경축·기념 행사의 뒷전에서 아직도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광복과 함께 기약 없는 새로운 고통을 안고 50년을 살아온 사람들, 그들은 원폭 피해자이다.

섬광은 한순간이었으나 버섯구름 아래 펼쳐진 참상은 인류 역사상 가장 엄청난 것이었다. 폭심으로부터 반지름 1km 안에 거주하던 사람의 90%가 즉사했다. 당시 인구 26만 명의 히로시마 시에서 7만여 명이 즉사했고, 그 해 연말까지 14만여 명이, 그리고 피폭 15년 뒤에는 20만명이 사망했다. 나가사키에서는 7만여 명이 숨졌다.

피폭 당시 화강암을 녹일 만큼 뜨거웠던 섭씨 6천도의 열기, 잇단 핵폭풍으로 인한 시가지 초토화, 그리고 방사능 피폭에 따른 급성 장애가 대량 사망의 원인이었다. 요행히 목숨을 건진 사람도 그 비참함에서는 사망자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었다. 살아 남은 자들은 대부분 대폭발 후 찾아온 ‘죽음의 비’(방사능 물질을 포함한 검은 비)에 노출돼 원인 모를 병마를 키워나가야 했다.

이 가공할 참사 현장에는 약 10만여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히로시마 7만, 나가사키 3만). 그 가운데 히로시마에서 3만5천명, 나가사키에서 1만5천명이 즉사했다. 그중 대다수는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군수 도시여서 전쟁 말기에 끌려온 징용자와 그 가족이었다.
귀국후 주변 냉대 시달리다 속속 병사

살아 남은 5만명도 대부분 화상과 부상, 죽음의 비로 인한 방사능 질환을 앓게 됐다. 이들 중 2만여 명이 일제가 항복하자 부산행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귀국선에서는 극심한 화상 부위에 DDT로 소독을 하는 웃지 못할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조국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무지로 인한 주변의 오해와 편견과 냉대였다. 원자병은 전염병이라며 친지들조차 기피했다. 이후 뿔뿔이 고향을 찾아간 이들은 뒤늦게 나타나는 원인 모를 질환으로 속속 숨져 갔다. 소란스런 해방 정국과 이어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이들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생계조차 막막한 상황에서 수많은 피폭자가 진료는커녕 약 한첩 못 써보고 눈을 감았다. 같은 피해자이면서도 ‘패전 국민’인 일본의 피폭자들이 곧바로 정부 차원의 무료 진료를 받고, 미국에서조차 원폭 후유증 연구 및 치료 기금을 일본에 제공한 점에 비춰볼 때, 가장 억울한 피해자인 한국인 피폭자들에게 드리운 운명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귀국한 피폭자들이 한국 정부와 사회의 관심권에서 밀려나 신음하고 있던 65년 설상가상으로 박정희 정부는 한일협정을 통해 이들 피해자를 포함한 일제 침략기 피해 국민들의 배상 권리를 포기하는 ‘청구권협정’을 체결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67년, 그동안 숨어 살다시피 해온 피폭자들은 처음으로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창립했다. 일본에, 침략전쟁에 따른 피해 보상과 치료를 요구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 단체에 등록한 피폭자 수는 2천73명뿐이었다.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도 있었지만 알고도 가입을 기피한 사람이 많았다. 이처럼 힘겹게 출발한 상태에서 이들의 외로운 투쟁이 시작됐다. 패전 후 20년 이상 전체 피폭자 중 10%에 이르는 한국인 피해자를 외면해온 일본의 태도는 협회가 생긴 직후의 반응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 68년 3월 <아사히 신문>이 <특파원의 눈> 난을 통해 ‘한국에도 원폭 피해자가 있었다’고 본국에 타전했을 정도였던 것이다.

일본 “한일협정으로 보상문제 끝났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은 한동안 계속됐다. 그러다 74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민간 차원에서 처음으로 원폭 피해자 돕기 운동을 벌이면서 피폭자들에게는 실로 29년 만에 처음으로 ‘따뜻한 손길’이 미쳤다(39쪽 기사 참조).

이후 두 단체가 연대해 민간 차원에서나마 치료와 대일 배상 요구, 모금 활동을 펼쳐나가 국내 피폭자 문제는 사회의 관심 영역에 들어서게 됐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없었다. 피폭자들의 끈질긴 요구와 투쟁에 대해 한·일 두 나라 정부는 좀체 지원의 손길을 보내지 않았다. 특히 한국인 피폭자에 대한 일본의 태도는 인색하기 그지없었다. 73년 12월 일본의 민간 단체인 ‘핵병기 금지협회’가 1천9백만엔을 모아 합천에 원폭진료소를 건립해 경남도에 기증한 것이 그나마 일본의 한가닥 양심을 살린 최초의 사례였다.

그뒤 원폭피해자협회와 교회여성연합회의 끈질긴 노력으로 한국인 피폭자가 국제 문제화하자 일본 정부는 마지못해 ‘원폭피해자진료협정’을 체결하고, 히로시마 원폭 병원에서 무료로 진료 받을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그러나 그동안 일본에 건너가 진료 혜택을 받은 사람은 전체 희망자 3천5백여 명의 18%인 6백44명에 지나지 않는다.

8월 현재 한국원폭피해자협회(회장 정상석)에 가입한 회원 수는 2천3백48명이다. 2만여 명이 귀국한 것으로 볼 때 1만7천여명은 누락된 셈이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는 질환과 고령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회원 가입 절차의 까다로움과 사회적 편견 등으로 아직도 피폭 사실을 숨기는 사람이 많다고 협회측은 설명한다. 등록된 피폭자들의 연령·지역 분포는 오른쪽 표와 같다. 피폭자 2세와 3세는 5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 중 등록자는 8천여 명에 불과해 이들은 1세보다 더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피폭자들의 끈질긴 요구가 한·일 두 나라 정부의 외면으로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자 80년대 후반부터 국민 여론은 정부의 무성의를 비난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일본 정부의 제국주의적 태도와 한국 정부의 무대책·무관심이 동시에 공격 대상이 되는 데 당황한 정부는 그제서야 대책을 마련했다. 89년 8월의 일로, 당시 6공 정부는 마침 실시된 전국민 의료보험제도를 통해 피폭자를 치료할 길을 찾았다. 보사부가 개인 부담금의 50%를, 원폭피해자협회가 50%를 부담하게 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와 별도로 원폭피해자협회는 87년 한국 정부를 통해 일본 정부에 23억달러의 피해 보상을 청구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65년 한일협정으로 이미 결말이 난 문제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피폭자들의 분노는 거셌다. 다수의 한국인 피폭자는 결국 일본 식민 정책과 2차대전 수행을 위해 동원된 희생자이므로 일본이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함에도 이를 끝까지 외면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 정부는 자국인 피폭자 34만명에게 연간 1천3백억엔씩 치료비 및 생계보조비를 주면서도 피폭자의 10%를 차지하는 한국인 피폭자를 외면하는 처사가 여론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당황한 노태우 정부는 90년 5월 방일 때 이 문제를 외교 협상 테이블에 올렸다. 한·일 양국 정부가 40억엔(1백84억원)씩 부담해서 치료기금을 지원하자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인도적 차원이라며 40억엔을 출연하겠다고 했다. 그나마도 일시불이 아닌 분할 지불이며, 10억엔은 의료기구로 대신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도 ‘치료기금 40억엔’ 약속 안 지켜

그러나 원폭 피해자들은 당초 요구한 치료비에 훨씬 못미치는 데다 절반을 부담하겠다던 한국 정부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거세게 항의했다. 그 와중에서 한 원폭 피해자의 자살 기도 사건이 발생했다. 65세이던 피폭자 이맹희씨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90년 6월11일 일본문화원 앞에서 “일본 정부와 노대통령이 나를 짓밟았다. 원폭 피해를 보상하라”고 외친 뒤 농약을 마신 것이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이맹희씨는 그 뒤 일본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이후에도 양국 정부의 태도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동안 전달된 40억엔은 대한적십자사가 원폭사업소를 설치해 관리하고 있다. 이 돈은 현재 등록된 피폭자 1세들에게 매월 10만원씩 의료보조비 지급과 경남 합천에 무의탁 피폭자를 위한 수용센터(50명 수용) 건립에 쓰인다. 나머지 절반 40억엔을 출연하기로 약속한 한국 정부는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다. 정부 보조라면 87년부터 보건사회부가 적십자병원에 피폭자 치료비조로 매년 1억원을 지원하는 것이 고작이다.
이런 상황에서 광복(피폭) 50주년을 맞아 원폭 1세들은 극도의 분노감을 보이고 있다. 한·일 양국 정부가 자신들의 문제를 미봉책으로 끝내버리려 하는 데 대한 배신감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은 지난 7월부터 ‘피폭자원호법’을 새로 제정해 34만여 피폭자 개개인에게 치료비·생계비·가족수당 등으로 연간 총 1천5백억엔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한국인 피폭자를 외면했음은 물론이다.

현재 일본에 대한 한국인 피폭자들의 요구 사항은 두 가지로 모아진다. 첫째는 일본인 피폭자와 똑같이 피폭자원호법을 적용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전후배상으로 한국인 피폭자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라는 것이다.

최근 피폭 50주년을 맞아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본부 및 각지부장이 일본을 방문했다. 이들은 이번 8·15를 기점으로 일본 외무성 앞에서 항의 농성에 돌입하는 등 실력 행사도 불사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은 지금도 히로시마 시내 한복판에 당시의 파괴 현장을 보전하고, 세계 유일의 원폭 피해국임을 내세우고 있다. 올해도 무라야마 총리까지 참석한 가운데 어김없이 ‘히로시마를 잊지 말자’는 행사를 벌였다. 그러나 전범으로서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할 한국인 피폭자 문제는 아직도 외면하고 있다.

다른 한편 광복 50주년을 맞는 우리는 과거 극복과 자기 반성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도 스스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주변의 소리 없는 고통을 외면하고 질질 끌어온 우리와, 전후 청산을 외면한 채 원폭의 피해를 딛고 대국으로 일어섰음을 요란하게 과시하고자 하는 나라의 중간에 아직도 흐느끼는 한국인 피폭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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