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글로벌’을 알아?
  • 차형석 기자 (papapipi@sisapress.com)
  • 승인 2004.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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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의 ‘글로벌 지수’는 낮았다. <시사저널>이 글로벌 기업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인적 자원은 비교적 경쟁력이 있지만 경영 투명성 등에서는 세계 수준에 못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한 경쟁 시대, 아시아 각국의 투자 유치전이 치열하다. 이미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른 중국의 상하이는 글로벌 기업의 대(對)아시아 전진 기지로 급속히 떠오르고 있고, 싱가포르·홍콩·말레이시아 등도 다국적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고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를 꿈꾸는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6월에만 해도 산업자원부장관과 서울시장이 투자 유치를 위해 각각 일본과 미국으로 날아갔다.

‘경제 국경’이 사라지고 있다. 사람과 돈이 넘나드는 글로벌 시대. 그렇다면 한국의 글로벌 지수는 얼마나 될까? <시사저널>은 한국에 진출해 있는 대표적인 글로벌 기업을 선정해, 그곳에서 근무하는 직장인 100명에게 글로벌 감각과 기업 문화에 대해 설문 조사를 벌였다. 글로벌 비즈니스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이들은 ‘경계인’과 같다. 이들의 자화상을 통해 한국 기업과 직장인들의 글로벌 지수를 확인해 보았다.

조사 대상 기업:GE코리아(미국) 모토로라코리아(미국) 애질런트테크놀로지스(미국) 월마트(미국) 인텔(미국) 로레알코리아(프랑스) 스탠더드차타드은행(영국) 한국바스프(독일) 노키아(핀란드) 볼보건설기계코리아 (스웨덴) 아그파코리아(벨기에)
*괄호 안은 본사가 있는 국가

글로벌 기업의 직장인 100명에게 한국의 글로벌 감각을 물었다.
1. 본인의 해외 체류 경험은?
2. 글로벌 기업과 국내 기업을 비교해볼 때, ‘이 점은 가장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점은?
3. 일반인들이 글로벌 기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오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4. 아시아(한국 포함)에서 가장 글로벌 감각이 뛰어난 국가는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5. 본인의 경험으로 볼 때 향후 아시아(한국 포함)에서 글로벌 기지로 떠오를 것이라 예상되는 국가는?
6. 한국과 한국 기업의 글로벌 지수는 얼마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5점:매우 높다, 4점:높다, 3점:보통이다, 2점:낮다, 1점:매우 낮다)
분야 별로 점수를 매겨주시기 바랍니다.
- 기업내 의사 결정 시스템
- 기업 문화
- 인적 자원(언어, 전문성 등등)
- 기업 운영의 투명성
7. 점수를 위와 같이 평가한 이유는 무엇인가?
8. 상대적으로 (본인이 느끼는) 글로벌 기업의 글로벌 지수는 얼마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5점:매우 높다, 4점:높다, 3점:보통이다, 2점:낮다, 1점:매우 낮다)
분야 별로 점수를 매겨주시기 바랍니다.
- 기업내 의사결정 시스템
- 기업 문화
- 인적 자원(언어, 전문성 등등)
- 기업 운영의 투명성
9. 점수를 위와 같이 평가한 이유는 무엇인가?
10. 한국에서 글로벌 기업이 활동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글로벌 기업 아그파코리아에서 독일인 임원 비서로 근무하는 권일수씨는 기업 비자금 문제로 떠들썩할 때마다 ‘미니 바(mini-bar) 요금 3천원’을 떠올린다. 권씨가 모시고 있는 독일인 임원이 한번은 해외 출장을 다녀와 출장비를 정산하는데, 영수증 가운데 3천원 가량 하는 호텔 객실 미니바 요금 항목에 줄을 긋는 것이었다. 업무와 무관하게 자신이 목이 말라 마신 물이니 비용을 본인이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권씨는 “이 분이 출장이 잦은 편인데, 영수증을 보면 항상 이런 식으로 줄이 그어져 있다. 개인의 도덕성뿐만 아니라 투명한 기업 문화가 회사에 자리 잡고 있다고 느낀다”라고 말했다. 수백억원대 비자금과 미니 바 요금 3천원. 권일수씨에게 비친 한국 기업과 글로벌 기업의 이미지는 이처럼 대조적이다. 권씨처럼 다국적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들은 글로벌 기업 문화와 구설에 오른 한국 기업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시사저널>은 한국 내 글로벌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100명을 대상으로 e-메일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대상 연령층은 2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했다. 조사 대상자들은 글로벌 기업과 한국 기업을 평가하면서, 한국 기업이 인적 자원은 비교적 경쟁력이 있지만 기업 내 의사 결정 시스템, 기업 문화, 기업 운영의 투명성에서는 큰 차이가 난다고 대답했다(도표 참조). 특히 기업의 투명성 부분에서는 매우 큰 인식차를 드러냈다. 응답자들은 글로벌 기업의 투명성(평균 3.9)이 높다고 대답한 반면 한국 기업은 투명성이 낮다(2.0)고 대답했다.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은 매트릭스 조직 형태로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는 점이 한국 기업과 가장 큰 차이라고 꼽았다. 조병렬 GE코리아 이사에 따르면, 사업 부문별 담당자, 지역별 담당자, 실무자가 수시로 토론하면서 위험 요소를 상호 점검하고, 민감한 사안이 생길 경우 유관 부서 담당자가 함께 논의하는 매트릭스 구조이기 때문에 수직적 위계 구조에서 벌어지는 실수를 현저히 줄일 수 있다. 상호 협의 없이는 일을 추진할 수 없기 때문에 상급자의 독단은 불가능하다. 또 의사 결정 과정이 투명하기 때문에 집행 과정에서도 직원들의 충성도가 매우 높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들 글로벌 기업은 저마다 독특한 사내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다. 아그파코리아는 분기 별로 ‘인포투어(info-tour)’라는 행사를 갖는다. 이 자리에서 본사와 국내 사업소의 경영 정책과 자료를 전직원이 알 수 있게 한다. 이은정 아그파코리아 홍보팀 과장은 “인포투어는 경영을 투명하게 하고 직원들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을 활발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직원들이 목표를 공유하며 마인드 셰어(mind-share)를 하는 효과도 있다”라고 말했다.

애질런트테크놀로지스는 정기적으로 설문 조사를 벌인다. 회사에서 전문 업체에 의뢰하거나 본사 커뮤니케이션 팀이 주도해 직원들을 대상으로 의사 결정 시스템, 기업 문화, 업무 만족도 등을 조사한 후 이를 고지하고, 문제점을 개선해 간다.

응답자들은 격식이 없는 기업 문화를 글로벌 기업의 두 번째 특징으로 꼽았다. 예를 들어 월마트는 임원들이 해외 출장을 할 때도 이코노미 클래스를 이용하게 한다. 이세영 월마트 홍보팀장은 “임원들의 사무실이 넓지 않고, 인테리어도 거의 없다. 다국적 기업은 격식보다 실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합리적 기업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국내 기업에서 다국적 기업으로 변신한 볼보건설기계코리아도 회사의 대주주가 바뀌면서 신선한 문화 체험을 했다. 인수되기 이전에는 그룹 회장이 창원공장을 방문할 계획이 잡히면 1주일 전부터 공장을 청소하고 의전에 신경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김희장 볼보건설기계코리아 홍보팀 과장은 “외국인 CEO는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자기가 먼저 인사하고 바로 사장실로 들어간다. 직원들도 그냥 ‘굿모닝’ 하고 답례하면 끝이다. 사장이 직접 직원 자리로 찾아와 그 자리에 서서 업무 얘기를 하는 것을 보고 직원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문화 충격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사랑의 집짓기 행사(사진) 등 사회 공헌 행사에 적극 나선 것도 볼보 그룹이 인수한 이후의 변화다.

한국 기업과 비교할 때 글로벌 회사 직원들이 자기 회사에 대해 갖는 신뢰 수준은 상당히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문화 차이에서 오는 고충 역시 만만치 않았다. 우선 직급·연공 서열과 상관없이 성과 위주로 평가하기 때문에 성취감을 느끼지만 이로 인한 스트레스도 상당하다. 한 30대 후반 여성 직원은 “휴가원을 내기가 편하고 단합대회, 회식 등 사생활을 강제하는 요소가 거의 없지만 노동 강도가 센 편이다”라고 말했다. 시간당 업무 처리량이 국가 별로 비교되기 때문에 상당한 압박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기업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방출될 수 있다. 글로벌 기업을 편하고 우아한 직장이라고 여기는 것은 오해다(상자 기사 참조).
글로벌 기업에도 결정권이 주로 본사에 집중되어 있고, 소수의 상주 외국인이 의사 결정을 독점한다는 지적이 따른다. 한국 기업은 현장 상황에 따라 유동성이 있는 반면 외국 기업은 본사 지침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대응이 늦어지는 경우가 있다. 한 응답자는 “한국에 이해가 부족한 외국인 상사와 일할 때는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때가 많다. 특히 한국적 상황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 상사의 능력이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같은 문제는 상대적으로 현지화가 덜 진행된 기업에서 발생한다. 한 글로벌 기업의 한국인 임원은 현지화 수준은 한국의 글로벌 감각과 시장성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한국의 글로벌 감각이 높아지고 해당 기업이 한국 시장을 높게 평가하면, 한국 내 글로벌 기업의 의사 결정 권한도 자연스럽게 커진다는 것이다.

문화 차이도 합리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때로는 후진국 이미지 때문에 불필요한 문화적 논란이 생긴다. 한 글로벌 기업에서 있었던 부조금 논란은 문화 차이와 한국의 대외 이미지가 얽혀 생긴 소극(笑劇)이다. 한국에서 관혼상제 때 현금을 주고받는 것은 전통적이고 일상적인 문화인데, 본사에서는 거래처 직원과 현금을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뇌물일 수 있다는 견해를 보인 것이다. 이 회사의 한 임원은 “그동안 부조금은 윤리 경영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었는데, 최근 비자금 등 문제로 한국의 부정 부패 이미지가 강해져 부조금을 지양하자는 논의가 나왔다”라고 말했다.

이번 설문 조사의 응답자들은 대부분 출장·교육 연수 등 해외 체류 경험이 있었다. 각국의 글로벌 비즈니스를 두루 경험한 이들은 글로벌 감각이 가장 뛰어난 국가로 싱가포르(72명), 홍콩(27명)을 꼽았다. 한국(5명)과 일본(3명)을 지목한 사람은 소수였다. 싱가포르와 홍콩을 꼽은 가장 큰 이유는 ‘언어 문제’였다. 싱가포르에 교육센터를 두고 있는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는 한 직장인은 “두 지역은 영어가 잘 통한다. 그래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본부를 싱가포르나 홍콩에 두는 글로벌 기업이 많다”라고 말했다.

현지 매출액이 높다고 해서 해당 국가의 글로벌 감각이 높은 것은 아니다. 이 회사의 경우, 매출액만 보면 일본 시장이 가장 크지만 비즈니스를 하기에는 싱가포르가 훨씬 좋다고 판단해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또 싱가포르에 교육센터를 지으면서 아시아 각국에 있는 지사의 매출액에 비례해 돈을 내게 했는데, 일본 지사는 돈은 가장 많이 내면서도 교육 인원은 가장 적게 파견한다고 한다. 일본이 경제력에 비해 글로벌 감각이 뒤떨어진다는 증거다.

조사 대상자들은 아시아에서 글로벌 기업의 전진 기지로 떠오를 국가로 단연 중국을 꼽았다. 중국이 생산 기지뿐만 아니라 아시아 중심 지역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특히 상하이가 앞으로 글로벌 기업의 아시아 중심지로 성장할 것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로레알 홍보팀 정다정씨는 “한 직원이 상하이 출장을 다녀온 후 레스토랑 주방장을 프랑스에서 데려올 정도로 외국인 상대 서비스가 달라졌다며 놀라워했다”라고 말했다.
한국이 아시아의 글로벌 전진 기지로 떠오를 것이라고 예상한 답은 적었다. 언어 문제가 가장 큰 장벽이었다. 한 다국적 기업의 임원은 “솔직히 한국은 외국 임원들이 오기를 꺼린다. 언어가 잘 안통하고 자녀 교육에도 문제가 있어 한국은 외국인이 선호하는 환경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를 주목하는 사람이 많았다. 스탠더드차타드은행 오경림 지배인은 “4, 5년 전부터 외국에서 각국 담당자들을 만나보면, 중국·말레이시아 등지에서 온 사람들의 실력이 나날이 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국내 글로벌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들은 글로벌 기업이 한국에서 활동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로 정부의 규제가 많다는 점을 꼽았다. 김지연 유럽상공인회의 이사는 “한국에는 외국인이 보기에 이해하기 힘든 규제가 많다”라고 말한다. 김이사는 화장품 규제를 예로 들었다. 김이사는 “국내에서는 화장품을 의약품처럼 다루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한다. 유럽·미국·일본 등이 안전성에 문제가 없으면 사전 규제를 하지 않는 반면, 한국에서는 기능성 화장품으로 허가받으려면 외국에서 실시하지 않는 안정성 테스트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 진출한 한 글로벌 기업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안정성 테스트를 전담하는 한국인 직원을 본사에 파견해야 했다.

김이사는 “정부기관에서 요구하는 서류도 복잡하다. 실험 시설, 기구, 데이터, 제품 개발 경위 등을 제출해야 한다. 효능이 좋지 않으면 시장에서 살아 남지 못한다. 서류가 품질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 중심 사고에 익숙한 외국인들 눈에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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