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야, 놀자” ... 폴리테인먼트 시대 활짝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4.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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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 마음껏 ‘끼’를 발산하고, 각종 매체는 정치인을 데려다 ‘망가뜨리기’ 바쁘다. 노사모 현상을 신호탄으로 정치와 오락이 뒤섞인 ‘폴리테인먼트’ 전성시대가 열렸다.
“여기 나온 서민정씨 아세요?” “아, 네.” “서민정씨 노래 들어본 적 있으세요? 어떠셨어요?” “노래를 아주 자유분방하게 부르시던데요.” 요즘 음치 연예인으로 한창 인기몰이를 하는 서민정씨와 공동 게스트로 나온 열린우리당 이종걸 의원에게 사회자가 연거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는 지시한다. “그럼 이제부터 서민정씨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무슨 곡인지 알아맞혀 보세요.”

“#@*& #$&@” 서씨가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데 곡목은 요령부득이다. 화면 자막에 비친 가사를 보면 이효리의 히트곡 <10Minutes>가 분명한데, 음정·박자 모두 제멋대로인 서씨의 노래는 오히려 옛 시조에 가깝게 들린다. 더 가관인 것은, 이를 경청하는 이종걸 의원 표정이다. ‘영국 신사’라는 평소 별명에 걸맞게, 웃음을 애써 참는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서씨를 쳐다보던 이의원은 결국 항복을 선언한다. “잘 모르겠는데요.” 서씨 노래를 들으며 이미 배꼽을 잡던 방청객들은, 상황과 따로 노는 이의원의 진지한 대답에 다시 한번 포복절도한다. KBS 2TV 오락 프로그램 <대한민국 1교시>의 한 장면이다.

그런가 하면 한겨레 신문이 발행하는 여성지 <허스토리> 6월호는 ‘명랑국회 개원 쑈쑈쑈’라는 기치 아래 17대 초선 의원 13명을 등장시켜 지상 패션쇼를 펼쳤다. 이 지면은 방식도, 내용도 파격적이었다. 일단 여기 등장한 국회의원들은 일반인이 늘 보던 국회의사당을 피해 조명과 장비를 제대로 갖춘 전문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메이크업 및 의상·소품 선택은 일일이 디자이너 손을 거쳤다.

그 결과 정치인들은 패션모델 뺨치는 스타일로 거듭났다. 일명 ‘츄리닝 패션’에 넥타이를 맨 언밸러스한 차림새의 한나라당 고진화 의원, 우아한 모시 드레스를 입은 채 어깨와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드러낸 열린우리당 강혜숙 의원, 꽃무늬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 꽃분홍색 ‘빤딱이’ 드레스를 공주처럼 차려입은 민주당 이승희 의원….

국회의원으로서, 어찌 보면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떨어뜨릴 수도 있는 이 기획을 의원 대다수는 즐겁게 해냈다. <허스토리> 김경애 취재팀장은, 이 기획을 진행하며 정치인들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고 한다. 사전 섭외할 때 망가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건만, 섭외를 거부한 국회의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노총각인 고진화 의원은 패션쇼만으로 끝내기 아깝다며 ‘지면을 통한 공개 구혼’을 촬영 현장에서 즉석 제안하기도 했다.

정치인인가, 연예인인가. 텔레비전을 포함한 각종 매체에 출연해 자신의 ‘끼’를 발산하는 정치인이 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매체는 매체대로 정치인을 끌어내느라 여념이 없다. 말 그대로 ‘폴리테인먼트(politainment)’ 전성 시대라 할 만하다. 폴리테인먼트란 정치(politics)와 오락(entertainment)의 합성어로, 정치와 오락이 뒤섞이거나 결합한 상태를 일컫는 신조어이다.

조·중·동도 ‘정치 오락화’에 동참

정치의 오락화 또는 정치의 연예화를 추구하는 이같은 경향은 비단 대중 잡지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조중동(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 같은 이른바 권위지도 이 대열에 속속 합류하고 있다. 지난 6월11일 조선일보는 신문 한 면을 통째로 할애해 17대 국회에 등원하는 여성 의원들의 패션을 기사로 다루었다. ‘초선 여성 의원들, 여의도 패션 ‘짱’’. 기사 제목도 튄다.

방송은 더하다. 17대 국회 개원 기념 행사를 방송사가 주최하면서 ‘버라이어티 쇼’처럼 만든 것은 폴리테인먼트의 상징적인 예라 할 만하다. 정치인을 고정적으로 등장시키는 오락 프로그램도 부쩍 늘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대한민국 1교시>가 대표적인 예다. 정치 그 자체를 오락 소재로 삼은 <On Air 여의도 1번지>(KBS 1TV)도 전파를 타고 있다. 주부를 주 시청 대상으로 하는 아침 방송이나 토크쇼도 종종 정치인을 끌어낸다.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씨가 지난 5월부터 진행 중인 CBS 라디오 <저공비행>도 정치인을 끌어들인 일종의 오락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김씨는 이 방송에 출연한 정치인들에게 당면한 정책 현안에 대한 입장보다는 평소 개인적 취향에 대한 질문을 주로 던진다. 이를테면 남경필 한나라당 의원에게 “박근혜 대표의 차림새가 지나치게 단정하다. 망사 스타킹 같은 걸 권해보는 건 어떠냐?”라고 묻는 식이다.

이미 구미에서는 일반화하다시피 한 폴리테인먼트 현상이 국내에 상륙한 계기는 2002년 대선이었다는 데 전문가들은 의견을 같이한다. 경희대 최혜실 교수는, 노풍(盧風)과 노사모 현상을 폴리테인먼트의 본격적인 신호탄으로 해석한다. 노사모는 팬들이 연예인 스타에게 열광하듯 정치인 노무현에게 열광했고, 팬들이 스타의 콘서트를 따라다니며 즐거워하듯 경선 현장을 따라다니며 흥겨워했다.

이를 증폭한 것이 매체 환경의 변화이다. 지난 대선과 총선을 거치며 우리 사회의 여론 주도층으로 떠오른 것이 20~30대 네티즌이다. 인터넷에서 뉴스를 주로 접하는 이들은 ‘의미’있는 기사보다 ‘재미’있는 기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간파한 인터넷 뉴스 매체들은 감각적인 폴리테인먼트형 정치 기사로 네티즌들의 눈길을 끌고자 했다.

스포츠 신문들도 때를 같이해 정치 뉴스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이전만 해도 이들 신문에서 정치 기사는 양념이었다. 그러나 2002년 7월 <굿데이>가 정치면을 고정 설치하고 정당 출입기자를 배치한 데 이어 <스포츠 투데이> <일간 스포츠>도 이같은 흐름을 따르기 시작했다. <굿데이> 정치부 창설 멤버인 한 기자는 “노풍 이후 정치 기사도 신세대의 관심사가 될 수 있다고 경영진이 판단했던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굿데이> 정치 뉴스의 지향점은 ‘열세 번째 연합뉴스는 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기성 12개 일간지와 똑같은 연합뉴스형 스트레이트·해설 기사를 쏟아내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스포츠 신문들은 기성 신문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정치권 뒷얘기, 정치인의 신변잡기 등을 생생하게 담아낸 기사들을 실어 ‘차별화’ 전략에 일정 정도 성공했다. 스포츠·연예 스타마냥 특정 정치인을 집중 부각하는 것도 스포츠 신문 특유의 상품화 전략이었다.

한 스포츠 신문 2년차 정치부 기자에 따르면, 참여정부 초기에는 정치권 5대 스타가 있었다고 한다. 포지티브형 스타로 강금실·유시민·추미애, 네거티브형 스타로 김민석·이인제가 그들이었다. 여기서 포지티브·네거티브란 독자 반응이 우호적이냐 그 반대냐에 따른 구분이다. 그러다가 탄핵 정국을 전후해서는 네거티브형 스타로 홍사덕·조순형 의원이 주가를 올렸다. 최근에는 박근혜·유시민·노회찬·전여옥 의원이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스포츠 신문의 이같은 폴리테인먼트형 정치 기사는 기성 언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치 기사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연합뉴스형, 오마이뉴스형, 스포츠신문형이 그것이다’라는 우스개가 정가에 새로 떠돌 정도였다.

폴리테인먼트형 기사가 자리를 잡게 된 데는 포털 사이트의 영향 또한 컸다. 지난 1~2년 사이 포털 사이트는 뉴스 유통 부문에 관한 한 기성 매체가 따를 수 없는 독자적 영역을 구축했다. 미디어다음 최소영 팀장에 따르면, 포털 사이트에 실린 정치면 머리 기사 조회 건수는 적으면 50만~60만 건, 많으면 3백만~4백만 건에 이른다고 한다. 웬만한 유력지 발행 부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조회 건수가 포털의 파괴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이들 사이트 간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점점 더 자극적인 기사, 흥미를 위주로 하는 기사가 포털 머릿면을 장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폴리테인먼트형 정치 기사는 바로 이같은 점에서 포털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특히 스포츠 신문의 마감 시간대가 오전이라는 점도 일조를 했다. 포털 대부분은 기사를 생산하지 않는다. 기성 언론사로부터 유상으로 제공받은 콘텐츠를 편집·가공해 사이트에 올리는데, 조간형 종합 일간지는 보통 주요 기사를 오후에 포털에 제공한다. 반면 석간인 스포츠 신문은 오전에 기사를 제공한다. 이로 인해 스포츠 신문은, 네티즌들이 포털에 집중 접속하는 점심 시간대에 자기네 기사를 머릿면에 올리는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살맛 나는 정치를 위해 “정치야, 놀자”

최근 한국 사회를 풍미하는 폴리테인먼트 현상에 대한 일반의 반응은 두 갈래이다. 비판적인 이들은, 정치를 지나치게 오락화하는 이런 식의 접근이 본질을 훼손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청와대의 한 비서관은, 스포츠 신문 기자로부터 전화가 오면 겁부터 덜컥 난다고 말했다. 나름으로는 논란 중인 사안에 대해 성심껏 답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면 전혀 엉뚱한 지엽적 에피소드가 기사로 둔갑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폴리테인먼트는 이미지 정치 혹은 포퓰리즘의 도구로 쓰일 우려도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유력 정치인들이 오락 프로그램에 앞다투어 출연하는 것을 두고도 시청자들의 반응은 ‘신선하다’는 지지론과 ‘방송 매체가 특정인 홍보 도구냐’는 비판론으로 갈리고 있다(상자 기사 참조).

이에 반해 폴리테인먼트가 ‘생활 밀착형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대한민국 1교시>의 오광선 PD는 “국민과 정치가 가까워져야 한다는 취지로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라고 말한다.

25~35세 여성 독자가 주요 타깃이라는 <허스토리> 김경애 팀장은 젊은층의 정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라도 폴리테인먼트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2535세대의 특징은 20대 초반처럼 정치에 무관심하지도 않으면서, 선배인 386세대처럼 정치를 엄숙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새롭고 발랄한 정치를 원하는 이 세대를 위해서라도 정치는 좀더 재미있어져야 한다”라고 그녀는 주장했다.

일과 놀이의 구분이 없어지는 것은 새로운 시대적 트렌드이기도 하다. 김용석 교수(영산대·철학)는 지난 10여 년간 진행되어 온 디지털 혁명이 ‘놀이형 인간’의 특성을 더욱 강화했다고 지적한다. 월드컵 응원이나 탄핵 규탄 촛불시위 현장이 축제 분위기를 띠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야, 놀자!’는 살맛 나는 정치를 희망하는 시민들의 21세기형 주문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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