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택] “미국형과 독·일형 중 양자 택일하라”
  • 후카가와 유키코 (일본 장은총합연구소 수석연구원) ()
  • 승인 1998.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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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택일 통해 ‘경제 청사진’ 제시해야
한국의 단기 채무를 중장기로 전환하기 위해 뉴욕에서 열렸던 채권단 회의는 글로벌 경제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여기에서 정보통신 기술을 배경으로 패권 확립을 노리는 미국과 이에 맞서는 독일·일본이 대립했다.

JP 모건을 중심으로 한 미국 금융기관들은 회의에 앞서 자기들의 안을 제시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장기채로 전환해 주는 대가로 고금리를 요구했고, 한국에 많은 채권을 가진 일본과 독일로부터는 채권을 증권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수료를 챙기겠다는 것이 이 안의 골자였다. 당연히 독일이 반대했고, 일본도 모호하기는 했지만 독일 입장에 동조했다. 한국이 이번 협상에서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데에는 미국과 일본·독일의 처지가 같지 않았던 것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미국과 獨·日의 금융 체제 달라

미국과 일본·독일의 처지가 달랐던 것은 금융 및 경제 시스템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 점은 한국의 구조 조정 방향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의 경영자들은 기업의 자금 조달이나 운영을 주식 시장에 크게 의존한다. 따라서 주가 동향이 초미의 관심사이다. 세계에서 가장 두터운 주식 투자층을 가지고 있는 미국은 이를 발판으로 삼아 첨단산업이나 벤처 기업을 단기간에 육성하고 사업 구조 조정이 가능하도록 산업 구조를 다이내믹하게 전환해 왔다. 냉전 시대에 자유주의 선교사였던 미국은, 냉전 이후 자국 경제의 호황을 무기로 하여 자본주의 전도사로 변신했다. 국제표준기구(ISO)·지적소유권·기업회계기준·기업 및 국가에 대한 신용 등급 평가 등은 오늘날 미국이 세계 경제의 패권을 장악하는 데 유효한 수단으로 작용했다.

미국에 견주어 일본과 독일은 오늘날까지 은행 중심의 금융 체제를 발판으로 하여 제조업을 육성해 왔다. 일본과 독일의 경우 자동차산업이나 기계산업이 모든 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고, 이런 산업 분야에 필수인 중소기업 육성과 숙련 기술 유지를 위한 고용 안정을 위해서는 자금 환경의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일본·독일도 미국식 스피드 경영의 장점과 첨단·통신 산업의 높은 부가 가치를 인정해 이를 뒤따라 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일본과 독일에서는 여전히 제조업 분야가 가장 중요한 산업이기 때문에 숙련 기술의 희생을 전제로 한 미국식 고용 조정 정책에 대해서는 저항감이 크다.
세계화의 삼두 마차라 할 수 있는 미국과 일본·독일의 차이는 한국의 구조 조정 방향에도 두 가지 선택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IMF 시대 이후의 한국처럼 단번에 미국형을 지향하는 방법이다. 또 한 가지는, 은행 중심 체제를 갖춘 일본과 독일 형으로 또 한번 조정하는 방법이다.

전자는 빅뱅으로 인한 혼란을 몰고올 수도 있으나 이를 통해 한국 경제 전체가 급속하게 회복될 가능성도 있다. 미국 자본의 처지에서 보자면 최신 설비와 높은 생산성, 거기에 저렴한 가격 조건까지 고려한다면 한국 제조업 중 상당 부분에 구매력을 느낄 수 있다. 또 일본과의 경쟁을 염두에 둘 때도 이는 필요하다. 단, 고용 조정(해고)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일단 고용 조정이 자유로워지면 경영이 본궤도에 오를 수 있고 고용도 회복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일단 주인은 바뀔지라도 한국의 산업 경쟁력은 세계적 수준으로 크게 강화될지도 모른다.

이것에 비해 후자는 당장은 리스크가 적은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한국 자본 시장의 대외 개방도로 보아 더 이상 재벌을 규제하기 어려우므로 이번 위기에서 살아 남은 재벌들이 결과적으로는 은행까지 소유하게 될 것이다. 물론 전후 일본 재벌과 달리 외국 자본 계열의 은행들과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정실에 따른 은행 융자 체제를 유지할 여유는 적어질 것이다. 그러나 재벌이 소유와 경영이 미분화한 상태에서 기업과 금융산업 모두를 지배하면 또다시 과거와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두 가지 방안을 절충할 방법은 없다. 만약 절충하고자 한다면 더 큰 혼란이 올 것이다. 한국의 새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요구를 이행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 경제 시스템에 대한 종합적 청사진을 국민에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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