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두희 수기'에 감춰진 진실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6.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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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매도한<시역의 고민>/"날조 과정 밝히면 암살 배후 드러날 것"
'선생님의 철화 같은 안색! 사자 같은 노효! 외람된 나의 공박에 대하여 드디어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붓을 던지고 벼루를 던지고 책을 던지심에까지 이르렀다…. 오호! 나의 손에 뽑힌 권총은 드디어 역사적인 시역의 불을 뿜고야 말았구나. 선혈에 물들어 쓰러지시는 선생님을 정시할 수 없어 옆 마루방으로 튀어 나왔다…. 하늘도 말이 없고 땅도 소리가 없다. 아직도 손에 쥐어진 권총에서는 화약 연기가 나고 있다….’(<시역의 고민>에서).

10월23일 오전 부천 소신여객 버스 운전기사 박기서씨의 곤봉에 맞아 숨진 안두희씨는, 죽기 전 백범 암살의 진상과 관련된 책을 남겼다. 바로〈시역(弑逆)의 고민〉(55년 11월 학예사)이다. 본문 1백30쪽 분량에 서문과 발문이 달린 이 책은, 안두희씨가 감옥에 있을 때 틈틈이 수기 형식으로 써두었다가 출옥 후 냈다고 알려져 왔는데, 암살범이 자기 손으로 암살 당시의 정황과 진상을 소상히 기록한 책으로는 유일하다.

그런데 안씨의 죽음을 계기로 〈시역의 고민〉이 다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책이 비록 안씨 이름으로 나왔으나 위작임이 분명하고, 내용마저 백범 암살의 진상을 왜곡하고 있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백범 암살에 대한 논쟁은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되어 왔다. 하나는 백범이 이승만과 권력을 놓고 투쟁하는 와중에서 치밀한 계획 아래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안두희 개인이 우국 충정에서 저지른 우발적 사건이었다는 시각이다. 문제는 〈시역의 고민〉이 바로 후자의 주장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백범의 정치 노선과 행동을 싸잡아 ‘반민족적’이라고 몰아붙인다는 데 있다.

옥중 집필 불허 기간에 옥중 수기 썼단 말인가

〈시역의 고민〉 내용 가운데에는 안두희씨가 범행을 저지르기 직전 백범과 언쟁하며 백범의 정치 노선을 비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서 안씨는 백범이 이승만 정권을 부인하고, 미국을 침략자로 규정하며, 이승만을 사대주의자로 매도했다고 썼다. 또 안씨는 백범에게 송진우·장덕수 등 주요 정치 지도자의 암살 배후를 물음으로써, 그들이 백범에 의해 피살된 것처럼 묘사했다.

정치 평론가 김삼웅씨는 ‘〈시역의 고민〉은 백범 암살을 정당화하고, 암살의 배후를 은폐하기 위해 정권이 날조한 것이 분명하다’라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백범 암살을 목격한 측근들의 증언과 비교해본 정황으로 보나, 안두희씨가 복역 중이던 때의 감옥안 상황으로 보나 〈시역의 고민〉은 완벽한 위작이라는 것이다.

안두희씨를 백범에게 안내한 선우진씨(당시 백범 비서)의 증언에 따르면, 백범 피격은 안두희씨가 그의‘수기’에 묘사한 것과 달리 그야말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또 안씨가 수기를 집필했다고 밝힌 기간(49년 6월27일~8월2일)은 정치범에게 옥중 집필이 일절 허가되지 않던 시기였다. 안씨 주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런 시기에 수기를 썼다는 행위 자체가 정권으로부터 비호와 후견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김삼웅씨의 주장에 따르면, 〈시역의 고민〉은 이승만 대통령이 50년대 말 ‘정권 안보’를 강화하고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정권 홍보를 위해 당시 이정권이 이 책을 대량 구입해 언론 기관에 배포했다는 것이다.

이 책이 위작되었다는 사실은 안두희씨를 추적해온 권중희씨에 의해 다시 한번 확인된 적이 있다. 92년 9월 권씨가 안씨를 납치해 백범 암살 진상을 자백케 했을 때 안씨로부터 “나는 다 쓴 원고뭉치만 읽어 보았을 뿐, 쓴 사람은 따로 있다”라는 진술을 얻어냈다는 것이다. 이 때 안씨는 자신의 수기 원고를 변조한 사람으로 사건 당시 인천 특무대장 김일환과,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의 부하인 장 아무개 대위를 지목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삼웅씨는 이 책의 위작 과정을 면밀히 따지는 일이야말로 백범 암살의 진실을 밝히는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김씨는 “안두희가 백범 암살에 대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은 채 죽었으나, 그렇다고 진상 규명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충분한 증거 자료가 있고, 이를 해석해줄 증인들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시역의 고민〉은 그중에서도 단연 중요한 자료다”라고 말한다.

안두희씨는 죽었지만그의 책은 아직 끝나지 않은 진실 규명 작업 때문에 앞으로도 한동안 ‘손 때’를 묻힐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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